1896년부터 스페인 제국주의 점령군과 맞서 싸워온 필리핀 혁명가들은 1902년까지 미국을 상대로 게릴라전을 벌였다. 이들은 모든 외세로부터의 독립을 원했다. 필리핀 총독이자 훗날 미국 대통령이되는 윌리엄 태프트Wiliam Taft는 필리핀인이 ‘앵글로색슨식 자유’를감사하게 여기도록 가르치려면 한 세기는 더 피를 흘려야 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미국의 잔혹행위에 대한 보도를 언제까지 저지하거나 검열할 수는 없었다. _537~53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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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남 티롤이라고 부르는 지방은 전에도 말했지만, 오스트리아가 제1차 세계 대전의 결과로 이탈리아에게 할양한 토지이다.
(중략)
제1차 세계 대전 후의 성 제르망(St. Germain-en-Laye) 조약에 의하면, 양국의 국경선은 남북의 강이 분수령으로 결정되어 있었다. 즉 북쪽의 인 (Inn)강 지류와 남쪽의 아디제(Adige) 강 지류가 분수령이다. 이번 발견 현장은 알프스의 가장 주된 산줄기의 서쪽에 위치하고 있고 인 강에 물을 대는 지역에 속한다. 그것에 관한 한 단연코 오스트리아령이다.
그런데 성 제르망 조약 당시의 국경 설정 위원회는 ‘분수령은 일단 판단 기준이고 엄밀한 국경선은 분수령 이외의 기준으로 결정해도 무관하다‘ 고 부기되어 있었다. 예를 들어 이번의 현장인 하우슬라프요흐 주변은 조약 체결 당시는 빙하가 덮여서 분수령이 확실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 부기에 해당하는 지역이 되었던 것이다.
(중략)
미라 발견 지점은 결국 국경으로 부터 이탈리아측으로 94.56m 들어와 있었던 것으로 판명되었다. _85~86쪽, 94쪽



외찌라고 이름붙였던 사람은 비엔나의 칼 벤들(Karl Wendl) 기자인데, 그는 〈외짤 계곡의 설인(雪人)>이라는 의미의 외짤 (Öetzal yeti)를 줄여서 외찌라고 말한 것이다. 그는 사체라든가 미라라는 무서운 호칭을 피하고 좀더 친근해지기 쉬운 이름을 붙이려고 했었다. "이 바싹 마른 이상한 모양의 사체를 왠지 보기만 해도 이야기가 써질 것 같은, 호감이 가는 존재로 만들고 싶었다." 라고 벤들 기자는 말하고 있다. 그가 외찌라고 하는 이름을 처음으로 쓴 것은 사체 발견으로부터 1주일 후인 9월 26일의 일로서 그 이후 이 이름은 전세계를 석권하게 된다. _101~10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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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쉬나메, 신라와 페르시아를 잇는 새로운 자료
최근 페르시아의 고대 서사시인 쿠쉬나메가 한양대 이희수 교수에 의해 발견되었다. 쿠쉬나메는 7세기 후반에 사산조페르시아의 마지막 왕자인 아비틴이 신라 공주 프라랑과 결혼하고 신라에서 활동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_20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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퀴닌은 남부 전쟁터에까지 이르지 못했다. 제퍼슨 데이비스를 비롯한 남부맹방 정치인들이 본인과 본인의 가족들을 위해 상당한 양의 퀴닌을 쌓아놓았기 때문이었다. _48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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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분야에서와 마찬가지로 여기서도 정부는 선택의 자유를 존중해야 한다. 그러나 선택설계에서 몇 가지만 개선하면 사람들이 치명적인 선택을 할 가능성을 크게 낮출 수 있을 것이다. _22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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