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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절은 노래하듯이
오하나 지음 / 창비 / 2022년 4월
평점 :

다가올 일 년이라는 빈 노트를 나는 무엇으로 채울까. 동물의 발자국을 따라가보는 일. 바람을 타고 여행 중인 씨앗을 골똘히 들여다보는 일. 매일매일 달라지는 하늘의 색과 구름 모양, 바람의 냄새를 눈치채는 일. 새를 바라보는 일. 나무와 함께 흔들리는 일. 감추어져 있지 않으나 작고 가만해서 지나치기도, 없다고 착각하기도 쉬운 것에, 하지만 각자만의 고유한 방식으로 높고 위대하게 세상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존재에 마음을 기울이고 그들의 이야기를 전하는 일. 이야기를 전하기 전에 그들과 둘도 없이 소중한 시간을 보내는 일. 그런 일들로 채워진 노트는 훗날 나 자신에게 살아갈 힘으로 반드시 되돌아오리라. _17
제주에서 귤나무를 돌보며 1년 열두 달을 기록한 오하나 시인의 에세이.
24절기 계절의 변화에 맞추어 작은 농원 학교로 등교해서 가지치기부터 시작하는 1년 농사의 시작부터 마무리까지의 과정은 고되지만 결국 가치가 되어 더욱 짙어진다.
자연의 향기가 느껴지고, 자연의 소리가 절로 들려오는 시간.
자연의 리듬에 맞추어 색이, 풍경이, 소리가, 계절이 변화함에 따라 크고 작은 일상들이 내게 잔잔하게 따스하게 느릿하게 포근하게 채워진다.
따뜻한 사람 옆엔 따스한 사람이, 다정한 반려견이, 그들과 함께하는 사람들과 동물들과 귤나무가 있다.
제돌이와 제순이, 페이와 티엔, 메이와 쥰, 장미와 바비, 황두와 자두.
제비와 멧비둘기와 고양이에게 이름을 지어준다는 것, 그들의 다정한 마음과 애정이 내게 전해져 온다.
생명과 자연의 경이로움을, 잠시 놓치고 있던 자연의 변화에 다시금 눈여겨보게 된다.
그들에겐 자연은 일상이 되어 시가 되고 글이 되고 음악이 되어 풍경이 된다.
덩달아 자연스레 자연의 풍경이 싱그럽게 내게 새겨진다.
평화는 끈질기게 화해하자고 손 내미는 것. 그래서 아름다울 수밖에 없는 것. 아무도 미워하지 않고, 원망하지 않고, 모질어지지 않고. 자기에게 총을 겨누는 상대에게 그러지 마요, 우리 화해해요, 하고 자신의 가장 연약하고 보드라운 속살을 있는 그대로 내보이면서 웃음 짓는 것. 이제 나도 누군가가 꿈이 뭐냐고 물으면 있기는 한데 설명하긴 좀 어렵다고 대답할 수 있겠다.
"언제까지나 평화롭게 아름다움을 피워내는 거요. 제가 아는 배나무 형제처럼요." _68
몸으로 삶의 춤을 추던 시간을 글로 남기지 않는다고 해서 없었던 일이 되는 건 결코 아니지만, 글로 써보지 않으면 미처 눈치채지 못하고 흘려보내는 삶의 진실 또는 의미라는 게 있는 듯하다. 여름 농사는 확실히 고되다. 그래도 견디다 보면, 귤나무에 매달린 초록색 아기 귤과 함께 어느새 훌쩍 크고 더욱 짙어진 나를 발견하게 되어 기껍기도 하다. 이 글을 쓰면서 여름 농사의 의미를 하나 더 발견해냈다. 기쁘다! _89
[미디어창비에서 지원받은 도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