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좋았던 시간에 - 김소연 여행산문집
김소연 지음 / 달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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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에 이끌려 펼쳐든 책. 펼쳐보다 차례 속에 '여행이 가고 싶어질 때마다 바라나시를 생각한다' 이 소제목에 꽃혀버렸다.

책날개의 저자 소개가 계속 생각난다. "구경하는 것보다 뛰어드는 것을, 공부하는 것보다 경험해보는 것을 선호한다. 그러고나서 후회를 배우는 것을 선호한다."
후회를 배운다..라는, 보통의 저자 소개와는 다른, 그래서 김소연 시인의 여행산문집에는 무엇이 담겨있을지 궁금해졌다.

1, 3부에는 '시'와 함께 여러 나라의 도시들에서의 단상들이 담겨있다.
시로 시작하는 글들은 시로 인해 지나간 나의 시간들이 마음에 머물렀다. 평범함 속에서 특별함을, 특별함 속에서 평범함을 느낀 글 이었다. 
나와는 다른 시선으로, 혹은 같은 시선으로 바라보는 글들이 특히나 가슴에 남았다. 무언가 내가 겪었던 감정들을 김소연 시인이 글로, 시로 표현해준 기분이 드는 책이었고, 왠지 일기를 쓰고 싶어지는 글이다. 하지만 내 감정을 글로 표현하는 건 쉽지 않다.

목적지보다는
목적지에 가다가 만난
시골 마을이 더 좋았다.
(...)
목적보다는
목적한 적 없는 것들이
언제나 좋았다. [121, 시골 마을 中]

2부는 2개월 동안의 인도 여행의 일들이 담겨 있다. 글을 읽으며 10년 전 떠난 인도 배낭 여행의 기억들이 스쳐 지나갔다.

세탁물을 찾아왔는데, 멋지게 찢어진 나의 청바지는 모든 구멍들이 깔끔하게 누벼졌다. 세탁소 아저씨가 "이건 서비스야, 완벽하지?"라며 자랑스러운 미소를 짓지 않았더라면 화를 낼 뻔했다. [134]

나도 인도 여행 중 옷 한 벌을 세탁을 맡긴 적이 있다. 오전에 맡기고, 돌아다니다가 낮에 강가에서 열심히 빨래를 하는 사람들이 보였다. 그 손에 보이는 익숙한 옷은, 내 옷이었다. 와. 어찌나 열심히 빨던지. 방망이로 두들기고, 옷을 패대기치며 열심히 빨래하시던 분의 모습이 정말 강렬하게 기억 속에 남았다. 그리고 또 걷다 다시 돌아와보니, 강가 근처에 가지런히 널어져있는 빨래감 속에 내 옷이 보였다. 누가 훔쳐가면 어쩌지? 하는 걱정과 함께 다시 또 걸었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 잘 말려진 빨래감을 받았다. 사실 세탁기로 빨아줄거라 생각하고 맡겼는데, 강물에 빨아 당황했지만, 그래도 산처럼 쌓인 빨래감 속 내 옷을 열심히 세탁하는 모습이 강렬하게 남았다. 왜 그 순간 내 옷이 보였던걸까?

이른 아침 바라나시에 도착하기로 되어 있던 기차는 오후에 되어서야 도착했다. 멍하게 앉아 창밖을 바라보았다. 도시를 옮길수록 나는 점점 시간에 대하여 둔감해져간다. [139]

인도에서의 첫 기차를 기다리던 내 모습과 점점 여유롭게 기차를 기다리던 내 모습, 친구 없이 혼자 기차를 기다리던 내 모습. 항상 기차를 기다리던 내 모습은 달랐다. 

 
궐레궐레. (안녕히 가세요)



나에게 여행은 낯선 사람이 되는 시간이다.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를 구별 짓고, 오늘의 내가 내일의 나로 기꺼이 나아간다. 낯설어져서 비로소 새로워지는 나를 자랑하고 싶을 때, 엽서를 사러 나간다. 엽서를 고르는 데에 한나절, 엽서에 쓸 문장을 고르는 데에 한나절을 쓴다. 엽서를 부치면 나는 내용을 잊는다. 그 내용을 기억하는 건 친구들의 몫이다. "나는 이 곳에 와 있어"로 시작되는 엽서 한 장을 쓰기 위해서 어떤 하루를 다 쓴다. [35]

어떤 여행지에서는 여행을 멈추는 게 더 좋은 여행일 때가 있다. 여행을 멈추고 방을 얻어 많이 자고 많이 먹으면서 많이 쉬는 것이 더 좋은 여행이 될 때가 있다. 이렇다 할 찾아갈 장소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아무것도 없는 장소인 것은 아니다. 그곳은 지내기 좋은 빵집과 찻집이 있고, 오래 머물기 좋은 서점과 도서관이 있고, 무엇보다 모든 것이 저렴하다. 모두가 인심이 좋다. 그런 도시에서 방을 얻어 한참 동안 머물고 나면 또다시 무거운 배낭을 짊어지고 여행을 떠날 힘을 얻는다. [1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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