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이지라는 시대 2 - 유신과 천황 그리고 근대화 메이지라는 시대 2
도널드 킨 지음, 김유동 옮김 / 서커스(서커스출판상회) / 201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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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지유신만큼 한국인들이 부러워하면서 제대로 이해못하는 사건이 없다.왜 조선은 그런 근대국가로 건국도 못하고 열강에 뒤쳐져 오늘날까지 한국이 일본보다 대우를 못받는 것일까?
그것은 한편으론 19세기조선의 국내개혁정치의 실패때문이지만 주원인은 근대일본국민의 서구화를위한 노력과 근대정치의식이 큰몫을 한다.
사카모토 료마가 태어난 19세기말중반 일본의 사정을 보자.당시 일본은 유럽이나 미국에 비해서 낙후된 나라였다.쇼군정치와 다이묘들의 구습에 젖은 일본의 위정자들은 근대화를 할 의지가 거의 없었다.
저자는 조슈와 사스마번의 하급사무라이들이 중심이된 메이지유신이 서양을 모방한이래 일본은 어떻게 19세기 민족주의의 각성아래 부국강병을 위해 근대화에 매진했고 일본이 메이지유신후 서양의 학문과 기술을 근대국가를 확립하는데 톡톡히 이용했는지 설명하고 있다.
당연히 쇼군은 권력을 내놓지않으려 발악했고 사무라이들은 보신전쟁같은 내전으로 패를 갈라 싸웠다.
하지만 일본의 위정자들처럼 난학을 보급시키고 포루투칼등의 통상을 통해 세계정세를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막부파와 반막부파가 각기 영국과 프랑스의 지원을 등에 업고 치열하게 싸운 걸보면 외세에 무지하지는 않았다.
미국의 페리제독에의한 강제적 문호개방후 맺어진 불평등조약으로 약소국의 호소는 소용없다는 걸 일본인들은 눈물겹게 깨달았다.세계는 이미 제국주의의로 가고있어서 일본이 강대국들의 세력다툼에서 설 자리는 없었다.위정자들이 근대화없이는 생존이 불가함을 깨달은 것이 천운이라고 볼수있다.개항후 일본도 당연히 물가폭등과 사회불안이 따라왔고 민심이 동요했다.
위정자들은 상대를 멸문시키는대신 정적들과 타협하여 천황파들이 마지막 쇼군 요시노부를 죽이지않고 유형보내고 천황을 복권시킨 건 유혈사태를 피한 지혜이기도하다.뒤따른 폐번치현과 사민평등,소학교설립등등 서구문물의 도입으로 일본인들은 서구화에 눈을 떴다.
하지만 1973년 11월의 징병 조서(詔書)가 공포될시 민란이 일어난 걸보면 일본인들도 신체제에대한 저항이 만만치않았다.사무라이들의 신분도 없어지고 촌락의 천민들과 구분이 없어진 평민들은 불만이 대단했다.
돈으로 징병을 면제받는 세태의 심각성을 자각한 야마가타 아리토모의 군제개혁뒤 그가 총리대신으로 일본이 강대한 군국주의 국가로 출현하는 데 큰 영향력을 행사했던 걸보면 시류를 잘탔다고 할수있겠다.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의 승리 뒤에는 이런 인물이 있었다.당시 태평양전쟁의 총사령관 야마모토 이소로쿠가 청년장교로서 러일전쟁에 종군할만큼 일본은 인재풀이 형성되어있었다.
그당시 일본만해도 메이지유신후 부국강병의 근대화에 박차를 가하고 있었지만 쇄국의 조선은 무지몽매했다.그래서 만만한 조선이 일본의 눈에 띄인 것이다.
하급 사무라이인 메이지의 주역인 그들에게도 근대화란 개념은 낯설었을 것이다.당시 일본인들도 이토 히로부미같이 유학파가 아니고는 입헌왕정이든 민주공화정이든 받아들이기가 쉽지않았을 것이다.시대사조에 앞서간 이들은 평생 자유민주주의 정치사상을 추구하다 비명횡사한 것과 것과 별개로 그들은 천황을 옹립하여 민심과 대의명분을 얻는 지혜를 짜냈다.
그들도 일본의 ,조국의 자주독립을 추구하는 젊은들이였다.
반면 조선은 모두 우울안 개구리처럼 국제정세에 시야가 좁았다.
당시 일본의 위정자들이 열강의 제국주의의 흐름을 알아차리고 자신들도 그렇게 변모해야한다고 여긴 것은 불가피한 일이었을까?
당시 영국이나 외국에서 유학을하고 생각이 서구화된 정치인들은 로쿠메이칸같은 문화시설을 짓고 서양의 문물에 익숙해져 일본이 문명국임을 과시하며 서구 선진국의 인정을 얻으려 하고 있었다. 그들은 약소국가 일본이 독립을 유지하는 최선의 방법은, 유럽인과 같은 문화를 공유하는 근대 국가라는 사실을 증명하는 것이라고 믿었다. 이것은 일리가 있었다.
가장 부러운 것은 이토히로부미나 후쿠자와 유키치같은 사가현의 정치인들이 메이지유신의 주역으로 근대화에 성공할 영민한 정치인들이 있었다는 것이다.
당시 다루히토가 초안하고 이토가 공포한 제국헌법을 보자.
1889년, 제국 헌법은 아시아 제국의 어떤 헌법보다 진보해 있었다. 그리고 유럽 제국의 몇몇 헌법보다도 자유주의적이었다. 하지만 이 헌법에서 ‘신성불가침’의 존재로서의 천황 및 천황에 부여된 주권의 강조는 주권이 국민에게 있다는 것과는 거리가 있었다. 그러나 헌법의 수여는 일본에서의 대의(代議) 정체의 개시를 알리는 것이었다. 그날 공포된 상유(上諭)는 제국 의회가 1890년에 소집되면서, 의회 개회로 헌법이 유효하다는 것을 말하고 있었다
또한 메이지시대에도 특히 하루코황후같이 신분높은 이들이 나서 여성에게도 전문역할을 부여하고 교육을 중시하는 풍조가 유행했다.근대화가 이루어지면서 자연스레 일본에도 근대식 학교들이 세워졌고, 특히 이전과 달리 여성교육도 시작되어 여학교들도 세워졌다. 당연히 여성이 산업화에 동참하기시작한 후 사회변화가 생겼다.
왜 조선은 그렇지 못했을까?조선의 권력자들은 오직 양반 지배층만을 위한 관습과 전근대사회에 집착했다.그들에게 입헌정치란 권력을 내놓는 것이었기때문이다.아니 개화에대한 의지자체가 없었다.
이승만과 서재필이 주관한 독립협회가 군주전제정치를 비판한 최초의 민간조직이었으나 박해로 해산했다..
서글프게도 동시대의 조선은 근대화에 가망이 있었을까? 개화운동의 가장 큰 박해자가 고종이었으니 당시 조선은 근대화의 가망이 없었다. 오히려 조선조정이 개화운동을 핍박하는 구한말의 상황에서 이승만같은 이들은 무엇을 할수있었을까?김옥균의 시체를 부관참시할만큼 야만적인 조선정부에게 근대화는 꿈같은 일이었다.가령 이노우에가 조선의 전권대사로 파견되었을시 그는 일본 정부의 개화 정책과 같은 방식으로 조선 정부를 개혁할 생각이었으나 조선 정부가 비협조적이며 재정적 개혁 등에 반발했다고한다. 이노우에의 일본인 재무고문관은 예산을 정하고 지출을 제한하려했다. 그러나 이것을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던 조선 국왕은 무시했다.무능한 군주인 고종은 책임감이나 국가와 백성을 위한다는 의무감따위는 없었고 일신의 안위만 꾀해서 한일합방이후 자신대신 오명을 뒤집어쓴 을사오적을 위로했다는 것도 한심한 일이다.
일본이 제국주의의 옹호자로 동양평화를 위해 영국과 결탁해 조선을 보호국화하겠다는 명분으로 한일합방을 하게될때까지 고종은 유유부단했었다.이것은 일본뿐아니라 미국 영국 프랑스 러시아까지 유사한 제국주의의 명분이었다.안중근의사가 이토를 저격했을시 그가 동양평화를 위협한다고 고발했다지만 실상 이토가 조선을 합병하는 걸 반대했다는 건 아이러니다.
러일전쟁후 일본이 조선을 한일합방한 것에는 이런 열강들의 묵인이 있었다.륀순학살로 여론이 악화되자 노기 마레스케가 순사(殉死)할만큼 러일전쟁의 피해는 막강했지만 이 전쟁은 동북아시아에서 일본의 우위를 결정지었다.거기에 러시아에게서 배상금을 톡톡히 받아내어 일본자본주의의 발전을 자극한 것도 무시할 수 없었다.
일본처럼 부국강병과 사민평등은 고사하고 조선은 여전히 전근대적 존왕양이적 사고에 매여 무지했다. 자유민권사상은 근대문명에서 가장 이른 민중계몽운동이자 입헌정치의 척도이나 조선의 지식인들조차 그걸 받아들일 사고가 준비되어 있지않았다.
한편으론 저자는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한 안중근의사의 다른 면도 기술한다.그의 동양평화와 일본제국주의에대한 인식이 지금까지 독자가 생각한 것과는 다른 것도 눈에 띈다.
ㅡ안중근은 반일주의자가 아니었다. 안중근이 가장 높이 평가하고 있던 인물은 의심할 나위 없이 메이지 천황이었다. 이토 히로부미에 대한 안중근의 가장 통렬한 고발 가운데 하나는, 이토가 의도적으로 천황을 기만했다는 것이다. 안중근에 의하면 천황이 바라고 있었던 것은 한국의 예속 따위가 아니라 동아시아의 평화와 한국의 독립이었다. 안중근이 천황의 생각을 알게 된 것은 1904년, 러일 전쟁을 선언한 선전 포고서에서였다. 안중근은 러시아에 대한 일본의 수많은 승리 기사를 읽고 기뻐했다. 백화의 앞잡이인 러시아의 패배를 한국과 청나라 동포들은 마치 자신들이 이기기라도 한 것처럼 함께 기뻐했다고 안중근은 말하고 있다. 안중근이 오직 하나 유감스럽게 여겼던 것은 러시아가 전면 항복하기 전에 일본이 전쟁을 중단한 일이었다. 책속에서 p710ㅡ
일본의 식민통치가 악랄했지만 하지만 냉정히 생각해보면 식민지가 된 원인은 조선을 근대화못한 고종과 유교에 젖은 대신들이 좌지우지하던 조선조정이 책임져야하는 것이었다. 구한말 피폐해진 백성을 생각하기보다는 군주독재와 왕권의 유지에만 급급했던 조선왕조는 개화보다 외세에 기대어 왕조의 안위만 생각할만큼 한심했다. 황후에게 휘둘리며 매관매직을 일삼은 고종은 개화는 생각지도않았고 황국협회따위나 만들며 군주가 군주로서의 책임감이 없었고 조정대신들이 무능하고 부패할때 문명개화에 앞장선 것은 서재필 안창호 이승만같은 선각자들이였다.양반관료들은 파벌다툼에만 열을 올리고 중국과 러시아 일본의 러일전쟁이나 청일전쟁으로 국토가 유린되는 사이 백성들은 굶어죽거나 유리걸식하는 이가 부지기수였다.
한일합방이후 일제에의한 의병들의 토벌로 조선이 초토화될때 고종은 무엇을 하고 있었나?고종은 러시아에 줄을 잘못 선지도 모르고 궁중에서는 굿을 하며 이승만같은 개화사상가들을 투옥하여 죽이려한 것외에는 없다.
반면 일본의 위정자들은 당파를 막론하고 국가의 부국강병을 위해 고분군투한걸보면 부럽다못해 존경스럽다. 이토 히로부미나 야마가타 아리토모가 우리에게는 원수지만 일본인들에게는 애국자이자 선각자들이였다.미국인인 저자가 동북아시아의 역사를 이토록 상세히 이해하고있다는 것이 놀랍다.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지만 동전의 양면같은 이중성도 있다.메이지유신을 잘 이해한다면 현재 대한민국이 처한 미묘한 국제관계를 타파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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