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스토옙스키의 명장면 200
석영중 지음 / 열린책들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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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영중 교수의 주석이 달린 책이라니! 아카데미에서 열심 찾아 듣던 강의가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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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의 공화국
안드레스 바르바 지음, 엄지영 옮김 / 현대문학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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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년 전, '인디오 공동체 통합 정책'을 시행하기 위해  사회복지과 과장직을 맡아 가족과 함께 산크리스토발에 도착한 화자. 그가 도착한 산크리스토발은 아름다운 풍경 뒤에 녜에 인디오들의 더럽고 불결한 낙후된, 가난한 삶의 현장이 숨어 있었다. 도착 후 집 열쇠를 받으러 시청으로 향하던 중 차로 들개를 치고 말았고 동물병원으로 옮긴 그 개는 극적으로 목숨을 건져 '모이라' 라는 이름으로 가족이 되었다. 화자는 이것이 길조인지 흉조인지 알 수가 없었다.  
 


 

매 페이지마다 복선이 아닌지 의심될만한 사건의 연속이다. 미스터리한 사건을 처음부터 드러내 놓은 상태임에도 독자는 작가의 사소한 언급이 사건의 열쇠가 될 수 있다는 생각에 긴장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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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의 공화국
안드레스 바르바 지음, 엄지영 옮김 / 현대문학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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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 파리대왕이라니. 이미 반은 넘어간 상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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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치 2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206
표도르 도스토옙스키 지음, 김희숙 옮김 / 문학동네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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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스토옙스키는 1인칭 화자 '나'로 등장해 3부 시작부터 행정 시스템에 대해 비판한다. 전문적인 인적 자원이 있음에도 잘못된 관행ㅡ관직 세습ㅡ과 구습  때문에 실무 현장에서 실용성과 효율성이 떨어지고 있음을 지적하고, 예의 범절에 맞는 방정함과 소심함이 사회 통념상 착실하고 반듯한 사람의 필수 자질이 되어온 만큼 발명가와 천재 등 창의성이 상스럽다고 간주됐지만, 이제는 이러한 사고를 바꿔야 할 때가 됐음을 얘기한다.








작가는 예브게니 파블로비치를 통해 현재 자유주의자들이 이전의 지주 계급과 신학생 계층(특수 계급)에서 배출되어 러시아적이라고 말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국민적이지는 않다고 말한다(비록 두 사람은 지주 출신이기는 하지만). 또한 문학에서 로모노소프, 푸쉬킨, 고골만이 진정으로 자신만의 고유한 것을 갖고 있다고 얘기하면서 더불어 현재 지주나 신학생 출신만 있는 러시아 사회주의자들은 러시아적 사회주의자라고 할 수 없다고 말한다.


또한 므이쉬킨의 별장에 모여 난상 토론을 벌이는 사람들로부터, 사람들이 인류의 행복을 명분으로 산업화를 급진적으로 추진하고, 빵(물질)을 볼모로 노동자를 착복하며 그로인해 인민의 박탈감, 정서적으로 폐폐해져가는 당시의 현대인들의 상황을 비판함과 동시에 맬서스의 주장이 반인륜적이며 비도덕적임을 식인에 빗대어 지적한다. 더하여 입폴리트는 행복이 절정에 달하는 순간은 최종적인 발견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삶을 발견하고자 하는, 끊임없는 영원한 탐구에 있다고 말하는데, 이 부분은 체호프의 희곡 <벚나무 동산>에서 폐차의 대사('스스로 도달하거나 아니면 도달하는 길을 다른 사람들에게 가르쳐 줄 거야')와 비슷한 선상에 있다.  


입폴리트가 쓴 '해명' 논문은 입폴리트를 관찰자로 함으로써 그의 주변에 있는 인물들 즉, 당시 러시아 인민들의 삶을 담아내고 있다. 입폴리트 본인이 폐병 환자로서 죽음을 기다리고 위층에는 얼어죽은 아기가 있으며, 문서 몇 장과 얼마간의 돈이 파멸을 결정할 만큼 절박한 이들은 대부분 중앙 정부의 힘이 미치지 않는 지방 관리의 만연한 부정부패로 인해 삶이 피폐해져 지방에서 일자리를 얻기 위해 도시로 온 자들이다. 시한부 인생을 사는 자(입폴리트)는 현재의 순간을 사는 인간이기에 가장 충만하고 직접적인 삶을 산다. 그런데 병에 의해서만 시한부 인생을 사는 것은 아니다. 당장 생계가 막막한 이들 또한 시한부 인생이고, 희망이 없는 자들도 마찬가지다. 
 

이처럼 3부에서는 작가가 소설에 직접적으로 끼어들어 자신의 생각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부분이 많다.




어느날 꿈에서 므이쉬킨은 나스타시야를 따라가려고 하는데 그때 그의 손을 잡는 이가 있어 잠을 깨니 아글라야였다. 나스타시야에 대한 감정이 인간적 연민과 동정이었다면 아글라야는 사랑에 가까운 감정이었을 것이고, 므이쉬킨은 이 두 감정 사이에서 갈등을 느낀다. 이 꿈이 이후 닥쳐올 파국의 복선임을 충분히 알 수 있다.   
 

도스토옙스키는 귀족이지만 기득권층에 속하지 못한 므이쉬킨을 통해 스스로를  빗대어 러시아 증상류층 사람들의 권태와 관습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무능력, 인습과 무기력, 민중에 대한 고정관념에 대해 역설적으로 일갈한다(당신들은 그런 부류가 아니니까요라고). 그러나 그곳에 모인 사람들은 므이쉬킨의 연설에 불쾌감을 느끼지만, 위험하게 여기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그는 그저 뇌전증을 앓고 있는 환자이며 몰락한 가문의 마지막 공작일 뿐인, 무력한 민중의 한 사람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마주한 아글라야가 나스타시야에게 부정한 방식으로 '놀고 먹는 여자'라고 비난한자, 당신도 놀고 먹는 여자 아니냐며 받아치는 나스타시야. 두 사람은 서로의 삶의 태도를 비난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아글라야는 남자들을 유혹해 편하게 살면서 자기 혐오에 빠져있느니 떳떳하게 세탁부라도 되라고 비난하고, 나스타시야는 곱게 자란 아가씨가 노동을 입에 올릴 자격은 피차 없다고 쏘아붙인다. 나스타시야를 향한 아글라야의 비난이 무조건 틀렸다라고 할 수 없지만 그 이전에 전제되어야 했던 것은 나스타시야에 대한 인간적 이해다. 타인의 삶을 함부로 재단할 수 없는 건 말할 것도 없고, 비록 우정에 의한 충고라할지라도 상대의 입장에 이입하기 전까지는 조심해야할 부분인데 아글라야는 이 부분을 간과했다.  



 
예브게니는 제3자의 입장에서 므이쉬킨과 나스타시야의 관계를 얘기한다. 그 두 사람의 시작은 애초부터 허위에서 시작됐고, 므이쉬킨이 현명한 사람이지만 경험 부족, 현실과는 동떨어진 순박함, 이로인한 판단력의 결여에 문제가 있다고 짚으면서, 그럼에도 므이쉬킨은 자신의 신념을 진실하고 자연적이고 본유적인 것이라고만 여긴다는 것. 예브게니는 나스타시야를 향한 므이쉬킨의 감정이 진실하고 진정성이 있는 것인지, 아니면 자신의 신념과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그저 머릿속에서 만들어낸 감상인지 생각해 보라고 충고하면서 나스타시야의 과거는 별개로 현재의 행동 역시 두둔할 수 없음을 지적한다. 또한 혼인은 아무래도 좋고 아무것도 아니라면서, 심지어 나스타시야의 얼굴이 무섭다고까지 하면서 행복과는 상관없이 그냥 혼인하겠다는 그의 말에서, 비로소 나는 이 사람에 대해 알 것 같았다(예판친 집안 사람들이 자신을 대체 무엇 때문에 아글라야와 만나지 못하게 하는지 모르겠다는 므이쉬킨의 말에, 나는 두 손 두 발 다 들었다).


나는 므이쉬킨과 예브게니의 대화를 통해서 므이쉬킨이 순수하고 현명한 사람이라는 것은 인정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진정으로 타인의 감정에 이입하고 공감하는 능력은 결여되었다는 생각이 든다. 이입과 공감은 타고난다기보다 학습과 경험과 노력으로 발달한다. 므이쉬킨은 이성에 입각해 이론으로만 체득한 이타성을 실천하고자 했던 것으로, 어쩌면 사람들이 그를 향해 '백치'라고 했던 것은 순수성을 폄훼하는 것이 아닌 그야말로 성장을 멈춰버린 므이쉬킨에게는 적절한 단어가 아니었을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가 실현하고자 했던 이상은 반쪽짜리에 불과한 것이 아니었을지. 그리고 두 여자를 모두 사랑했다는 므이쉬킨의 말에서 연민이나 동정 역시 사랑의 다른 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면 그의 혼란이 납득되기도 한다.  


그럼에도 나는 므이쉬킨에게 묻고 싶다. 아무도, 심지어 나스타시야조차도 행복하지 않은 그 결혼의 의미는 무엇이냐고. 더불어 나스타시야의 갱생을 바라는 당신의 마음이 '순수한' 사랑이라고 할 수 있느냐고. 혹시 당신은 당신의 '신념'에 대한 집착을 사랑으로 착각하는 것은 아니냐고. 그리고 그녀의 이면을 바라보았으나 아글라야에게 상처를 주는 것을 감수할만큼 나스타시야의 불안과 두려움을 온전히 이해했던 것이냐고.  


​나스타시야를 향한 두 남자의 집착. 로고진이 죽여서라도 그녀를 차지하겠다는 일념이었는지 아니면 고통과 광기만 남은 인생에서 벗어나게 해주고 싶었는지 알 수 없다. 므이쉬킨이 두 사람을 쫓은 이유가 이러한 사달이 일어날 것을 예감해서인지 혹은 나스타시야를 구원하겠다는 사명감에서인지, 이또한 알 수 없다. 죄의 대가를 묵묵히 받아들인 로고진과 지능 조직이 완전히 손상되어 치유불능 상태에 이르러 그야말로 완전하게 '백치'가 되어버린 므이쉬킨의 비극적인 결말, 그리고 이 비극적인 사단이 일어나서야 므이쉬킨을 용서하고 동정하며 간혹 정신병원에 입원한 므이쉬킨을 들여다본다는 이유로 예브게니를 환영하는(처음 므이쉬킨에게 그랬던 것처럼) 예판친 집안의 사람들을 보면서 인간의 이중성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된다.​ 
 

므이쉬킨의 선의가 의식하지 못하는 부분에서 좋은 결과를 이끌어냈음은 분명하다. 그리고 어린아이 같은 순수함이야말로 미래의 희망임을 모르지 않는다.  작가의 의도가 어떻든 간에 그럼에도 나는 므이쉬킨의 순수함에 마냥 박수를 쳐주기가 어렵다. 어린 아이의 순수함이 때로는 오히려 더 잔인하다는 말처럼, 그의 순수가 어느 누군가에게는 큰 상처가 될 수 있음 또한 간과할 수 없다. 인간의 삶에 완벽한 순수도, 완전한 타락도 없음을 다시 깨닫게 한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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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것도 하지 않는 법
제니 오델 지음, 김하현 옮김 / 필로우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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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가이자 교수인 저자는 이 책에서 현재 우리 사회의 생산성 개념에 의문을 제기하면서, 하지 않는 것, 즉 거부에 대해 얘기한다. 관심 경제를 중심으로 각 장마다 유지 노동과 보존 작업보다 파괴가 더 생산적이라는 관심경제의 부수적 논리를 파악하고, 대안으로써의 도피를 택한 몇몇 인물과 집단을 살펴보며, 거부의 역사를 살피고 동시에 창의적 거부 공간이 어떻게 위협받는지를 보여준다. 그리고 관심경제에서 벗어나 주도적인 방식으로 삶을 영위하고 이상적인 소셜 네트워크를 상상하고 제안하면서 '인간이 인간이 되는 데 전념' 하고자 했음을 밝힌다.








먼저 '딥 리스닝Deep Listening'. 저자는 새소리를 듣는 것으로서 딥 리스닝 방식을 체험하는데, 이때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조용히 걸으면서 새소리가 들릴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다. 그런데 경청도 마찬가지. 우리는 타인과 대화할 때 온전히 상대의 말을 듣기 위해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경우가 드물다. 별다른 이유도 없이 핸드폰을 손에서 놓지 못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하다못해 다른 생각을 한다거나 상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자신이 할 말을 떠올리곤 한다. 저자는 이어서 완전한 몰입 상태에서의 걷기를 예로 들며 일정 기간의 단절이 주는 유의미한 경험과 변화에 대해 말하는데, 이 또한 현대인에게서 찾아보기 어려운 모습이다. 요즘 걷기 운동이 간편하게 실천할 수 있는 운동으로서 인기가 한창이지만, 이 걷기에 집중과 몰입이 동반되고 있는지는 의문이다. 운동에 편리하도록 경량화한 이동통신이 개발되고, 블루투스 무선 이어폰 정도는 모두 귀에 꽂고 다니고 있는 실정이니 인간은 그야말로 시간과 공간의 효율성을 온몸으로 체현해내고 있는 중이다.



저자는 거부하는 것과 모든 것에 안녕을 고하는 것은 다르다고 얘기한다. 후자는 자신이 살아가는 세상에 대한 책임을 방치하는 것일 뿐이라고. 저자의 말처럼 1960년대 코뮌은 무척 매력적이고 낭만적이기까지 하지만, 현실적으로 실현하기에는 불가능에 가깝다. 마찬가지로 잠시나마 인터넷을 멀리하고 뉴스를 읽지 않는 것은 미봉책에 불과하다. 특히나 업무도, 중고대학교의 수업까지 온라인으로 전환하는 팬데믹 시대에 인터넷과 거리두기는 1960년대 코뮌 이상으로 비현실적일 뿐이다. 저자도 이를 모르지 않기에 모든 것을 거부하는 것은 실수라고 재차 말하고 있는 것일테고, 사색과 참여와 대응의 필요성을 제안한다. 한 발짝 떨어져 객관적 관점을 유지하며 현재를 살아가는 동시대인으로서의 책임과 소명이 무엇보다 필요한 때다.


우리가 실질적으로 도움을 주고 받을 수 있는 존재는 주위 사람이다. 외형적인 부분 뿐만 아니라 이웃과의 소통의 부재와 단절은 인간을 외롭고 피폐하게 만든다. 재난 상황이 발생하거나, 응급 상황이 닥쳤을 때 어딘가에 도움을 요청하고 서로를 보듬어 줄 수 있는 이들은 SNS 팔로워가 아니라 내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다. 21세기에 SNS 친구들이 의미없는 존재라는 것은 물론 아니다. 온라인 상에서 이루어지는 공감과 소통에 진정성만 동반된다면 점점 더 고립되어지는 현대인에게 좋은 동반자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다만 상대를 이해하고 공감하려는 노력을 불필요한 감정 소모라고 여긴다면 현실에서든 온라인에서든 늘 외로울 수 밖에 없다. 무엇보다 다양한 성향을 가진 사람을 만나는 과정에서 타인을 이해하고 자신을 성찰할 수 있는 기회를 생각해 보면 온라인에서의 교류는 분명 한계가 있다.


저자는 상업적인 소셜 네트워크가 시장을 장악하고 있는 동안, 우리가 할 수 있는 진정한 거부는 바틀비의 대답처럼 질문의 성립 조건 자체를 거부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관심경제에 있어 진정한 철회에는 지속적인 훈련이 필요하다. 관심을 거두는 능력 뿐만이 아니라 다른 곳에 관심을 기울이고 관심을 확대.증식하며 관심을 더욱 예리하게 갈고 닦는 능력이 필요하다고. 더 나아가 미디어와 광고가 우리 감정을 이용하는 방식을 면밀히 연구하고, 미디어가 조정하는 알고리즘 버전의 자기 모습을 이해하며, 우리가 무의식 중에 당하는 가스라이팅과 두려움과 불안의 근원이 무엇인지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관심경제에서 '제3의 공간', 즉 관심을 돌리는 행위가 중요한 이유는 개인의 관심이 집단적 관심의 토대가 되고, 모든 종류의 유의미한 거부 행위의 토대가 되기 때문이다. 이에 저자는 생각의 토대를 복원하는 데에 있어 '현상의 공간'에 집중한다. 저자는 아렌트의 말을 빌려 '현상의 공간'을 유의미하게 말하고 행동하는 사람들의 모임으로 정의하는데, 그가 조사한 사례를 찾아본 결과 현상의 공간은 대개 물리적인 공간이었다. 저자는 지금의 상황에서, 소셜 네트워크가 이러한 시간과 장소의 역할을 해주길 기대한다. 잠시 들렀다 사라지는 공간이 아닌, 공감과 책임, 정치 혁신을 배양하는 공간으로 거듭나기를.  





생산성과 효율이라는 자본주의적 사고방식이 당연해지는 세상에서 경제적 안정이 무너진 노동자에게 남은 것은 시간이 곧 돈이라는 압박감과 무한 노동시간이다. 구독과 좋아요가 곧 돈벌이가 된 현 세태에 공감은 허울일 뿐 돈을 벌기 위해서 온갖 자극적인 행위가 밤낮으로 여과없이 무분별하게 이루어진다. 존재하는 시간과 공간이 누군가에게는 모두 돈으로 환산되는 세상은 숨이 차도록 급박하게 돌아간다. 인간은 점점 더 스스로에 대한 통제권을 잃어가고, 변화와 적응에 대한 두려움으로 누군가가 만들어 놓은 알고리즘에 자신을 안주시킨다. 사용자가 미디어의 상품이 되어버린 세상에서 우리가 미디어에 착취당하고 있음에 대한 인지 여부는 무엇보다 중요하다.


이 책을 제목만 보고 '잠시 휴대폰을 꺼두셔도 좋습니다' 처럼 힐링 에세이나 정신 승리를 위한 심리 자기계발서로 판단하면 곤란하다. 저자는 신자본주의 세계에서 인간의 가치가 실용성과 효율성으로 재단되고, 마치 워커홀릭이 유능한 인재처럼 여겨지며, 거래로 이어지는 인간 관계에 얽매이는, 관심경제에 개인의 권리를 빼앗긴 세태에 반기를 들어야 한다고 말하는, 비평서에 가깝다고 볼 수 있겠다.  


저자가 말하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것은 정말 아무것도 하지 말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생각할 시간을 주고 주위에 시선을 돌리며 현재의 관심경제 체제에서 빠져나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가 이러한 사고를 동반한다면 굳이 온라인 세상에서 '로그 오프'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 출판사 지원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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