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종말
그레이엄 그린 지음, 서창렬 옮김 / 현대문학 / 2021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1939년부터 1946년까지를 배경으로 화자 모리스 벤드릭스의 서술로 이어지는 소설은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세 남녀의 사랑과 우정을 이야기한다.   


소설은 얼핏 읽기에 연애 혹은 치정 소설로 읽힐 수 있지만 중반을 넘어가면서 이들의 사랑은 신앙과 종교적 사랑, 그리고 인간이 추구해야할 사랑의 형태까지 확장된다.



주인공 세 사람이 정의하는 사랑은 무엇일까.
세라는 육체적 욕망과는 별개로 진심으로 상대의 행복을 바라는 사랑을 추구하지만, 모리스에게 끌리는 지극히 인간적인 욕망과 욕망을 초월한 사랑 사이에서 갈등한다. 모리스는 사랑은 육체적 욕망과 밀접한 관계가 있으며 질투, 즉 증오와 사랑의 크기는 비례하며 또한 시들어가지 않고 끊임없이 욕망하는 것이야말로 사랑이라고 믿는다. 헨리는 세라가 자신을 좋아해주는 것으로 만족한다. 인간의 본성에 따르면 사랑에도 만족이 필요하다고 말하는 그의 모습을 보면서 그가 원했던 것은 보호자였는지, 아내였는지 의문이 든다.



모리스의 집착이 사랑일까를 고민하는 세라는 그들 자신이 서로에게 뭘 원하는지에 대해 자문한다. 그들은 사랑 때문에 행복하고, 사랑 때문에 불행하다. 삶에서 사랑이 전부인 사람은 질투의 화신인 모리스가 아니라 세라다. 모리스와 부적절한 관계를 유지할 때는 헨리에게 애정을 갖고 지켜볼 수 있었다는 것에 반해 모리스가 떠나자 헨리를 향한 분노가 들끓는 세라. 그가 진심으로 원하는 것은 모리스의 아내가 되는 것인데, 모리스를 사랑했던 동안에는 헨리도 사랑했으나 소위 정숙한 아내가 되자 아무도 사랑할 수 없게 된 이 알쏭달쏭한 사람의 마음이여. 세라는 신에게 당신을 믿지 않는다고 되뇌이지만, 끊임없이 신에게 의지한다. 어쩌면 사랑의 크기만큼 증오의 크기가 같다는 모리스의 말처럼 신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은 욕구의 크기만큼이나 신에게 의지하는 것이 인간이 갖는 숙명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잠시 들었다.  


세라는 이혼을 결심하고 1939년부터 시작된 모리스와 관계, 그리고 그를 사랑한다는 내용의 편지를 헨리에게 쓰지만, 세라에게 떠나지 말아달라고 애걸하는 헨리를 차마 외면하지 못한다. 신에게 죽음으로써 자신을 행복하게 해달라고 기도하면서 차라리 두 남자가 아닌 자신에게 고통을 달라고 호소하는 세라의 모습은 희생과 고통을 자처하는, 신이 인간을 향하는 사랑의 모습과 흡사하다. 세라의 고단함은 사랑을 쟁취하지 못해서라기보다 누군가를 사랑하면서도 다른 행위를 하는 자신을 믿지 못함에 있는 것으로 보인다. 어쩌면 이 소설에서 가장 인간적인 모습을 보이는 것은 모리스가 아닌 세라가 아닐 싶다. 신을 믿지 않았던 세라가 신에게 의탁하자 죽음을 맞이한 아이러니는 종교적 사랑을 나타내는 또다른 모습이라는 생각도 든다.
 
 


모리스의 사랑은 지극히 육체적이고 독선적이다. 이루어질 수 없는 모리스를 향한 사랑으로 고통스러워 결국 신에게 의지할 수 밖에 없었던 세라의 마음을 헤아리기보다는, 신을 향했던 세라의 마음 한조각까지 온전히 제 것이 되지 못한 것에 신한테까지 질투를 일으키며 세라의 죽음으로 자신의 일부가, 존재가 상실됐음을 절감한다. 모리스에게 성욕=사랑이며 인간이 성욕을 느끼지 않는다는 것은 사랑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그래서 정신적으로 숭고한 종교적 사랑을 믿지 않는다.  


그런데 모리스의 갈등과 혼란은 정작 세라가 죽은 이후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여기저기서 세라의 장례식을 카톨릭식으로 치러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도 모자라, 세라가 사실은 카톨릭 신자였으며 그의 순수한 선의를 통해 발현된 기적을 증명하는 이들이 찾아온다. 모리스는 신의 사랑도, 신의 평화도 원하지 않았다. 그가 원한 것은 오직 세라와의 사랑, 그와 평생을 함께 사는 것 뿐이었다. 이것이 신으로부터 시험을 받을 만큼 대단한 일이었던가. 신의 구원을 받기 위해 지극히 인간적인 욕망과 사랑을 거부해야 한다면, 모리스는 그 구원을 단호히 거부한다.  


모리스는 생각했다. 세라를 두고 싸운 이 싸움의 진정한 승자는 '신부'였다고. 그러나 세라를 기억하는 이는 종교가 아닌 그녀와 교감하고 사랑을 나눴던 자신들이라고 반발한다. 그러나 모리스를 아프게 찌르는 신부의 한마디. "신경쓰지 마세요, 벤드릭스 씨. 이제 당신이 무얼 하든 부인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건 없을 테니까요". 죽음으로써 모든 것의 의의가 소멸된다면 세상은 얼마나 하찮은가. 그러나 적어도 살아있는 동안 삶의 충만함은 가질 수 있으니 그 의의를 하찮다할 수는 없을 것이다.  


헨리는 세라가 죽은 후에 집안이 공허하지 않는 것에 당황스러워한다. 퇴근 후 세라가 집에 없었던 적이 종종 있었기에 빈 집에 들어오는 것이 익숙하고, 오히려 세라가 살아있을 때 느꼈던 공허함을 그녀가 죽은 현재에는 크게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인데 그가 말하는 감정이 어떤 것인지 알겠다만은 그가 과연 세라를 사랑했는지 의문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이것이야말로 헨리 방식의 사랑이 아닐까하는 생각도 들고.  
 
 



세라가 사회적 규범 차원에서 봤을 때 정숙한 여인이라고 보기에는 어렵다. 사랑이 없으면 살 수 없고, 삶의 의미를 찾기 어려워 때로는 공허한 유혹을 하기도 한다. 그러나 자신의 사랑에 그녀만큼 진솔하게 고민하는 이가 얼마나 있을까.  


모리스를 제외한 다른 사람들이 기억하는 세라와 모리스가 기억하는 세라는 아주 다르다. 모리스는 세라의 성적 욕망과 사랑을 위해서라면 불륜도 서슴없이 저지를 수 있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안다. 그런데 육체적 욕망과 사랑을 갈구하는 것이 왜 죄악인가? 모리스는 타락한 인간의 욕망과 숭고한 신의 사랑, 인간 사회의 규범에서 오도가도 못한 채 결정을 내리지 못한 우유부단함과 스스로를 소멸시킨 세라의 죄를 증오한다.  


세라는 죽음으로써 누구의 소유물도 되지 않았다. 이는 세라 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이 마찬가지다. 3년 동안 그녀를 소유하고 있었다고 생각했던 자신이 얼마나 어리석었는지를 깨닫는 모리스. 인간은 누구도 소유할 수 없다. 사랑이라는 이름 아래에서조차도. 소유될 수 없기에 우리는 망각될 자격이 있으며 죽음은 누군가를 잊어버리는 과정의 시작이다. 아무리 숭고한 사랑이라도 인간의 사랑을 종교적으로 승화시키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 우리는 신이 아니지 않은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사랑의 종말
그레이엄 그린 지음, 서창렬 옮김 / 현대문학 / 2021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오히려 삶에서 사랑이 전부인 사람은 세라다. 그가 진심으로 원하는 것은 모리스의 아내가 되는 것. 모리스와 부적절한 관계를 유지할 때는 헨리에게 애정을 갖고 지켜볼 수 있었는데, 모리스가 떠나자 헨리를 향한 분노가 들끓는 세라. 모리스를 사랑했던 동안에는 헨리도 사랑했지만, 소위 착한 여자가 되자 아무도 사랑하지 않는  이 알쏭달쏭한 사람의 마음이여.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사랑에 빠진 악마 이삭줍기 환상문학 5
자크 카조트 지음, 최애영 옮김 / 열림원 / 2021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나폴리 왕립 근위대 대위로 근무 중인 스물다섯 살 청년 알바로는 어느날 고참 동료 소베라노의 강신술을 목격하고 호기심이 발동한다. 마술적 지식을 얻기 위해 포르티치 동굴에서 공포와 두려움을 이겨내야하는 단계를 거친 후 악마와 대면하고, 마침내 그와의 거래를 성사시킨다. 이에 대한 보상으로 소베르노와 그의 동료들까지 환대해 향연을 벌이는데, 이때 시동으로 등장하는, 성별을 구별할 수 없는 아름다운 비온데타가 알바로의 곁을 지키며 시중을 든다. 알바로는 자신의 임무를 뒤로 한 채 여행을 다니던 어느날, 자객들로부터 칼을 맞고 회복된 후 스스로 여성임을 밝인 비온데타와 사랑에 빠진다. 서로의 사랑을 확인한 순간부터 비온데타의 애절하고 호소력 넘치는 유혹이 시작된다. 육체적 욕망과 향락, 부와 권력, 연금술을 동원한 마술적 지식. 존중과 존경 따위는 치워버리고 오로지 나만 바라보라고, 나만 탐하라고 협박을 가득 담아 사랑을 애걸하는 비온데타의 유혹을, 알바로는 철벽을 치며 막아내고 있지만 점점 한계에 부딪친다. 문제는 비온데타의 말이 너무나 타당하다는 데에 있다.





 


 



현실과 환상의 경계에서 빌미를 제공하는 것은 언제나 인간 본인이다. 알바로가 소베르노의 강신술을 보고 욕망했던 것은 원대한 지식도, 이성적 과학도 아닌 마술적 지식과 능력이었다. 이 자체가 악마에게 유혹을 하도록 만든 원인이 된다. 소베르노는 악마의 공포를 체험하게 함으로써 알바로에게 혼령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우려는 목적이었지만, 결과적으로 더 부추기는 셈이 된다. 그런데 애초에 소베르노가 자신의 능력을 과시하지 않았다면 벌어지지 않았을 일이다. 이런 모순적인 행동을 하는 소베르노가 알바로에게 전하는 경고는 순수한 조언이라고 할 수 있을까? 이면에는 예상치 못했던 기개 발휘한 알바로에 대한 질투와 시기가 없다고 하기에는 어려워 보인다.



소설의 시작부터 알바로가 당하는 유혹은 우리 주변에 넘쳐난다. 육체적 욕망,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물질과 권력의 욕구, 과정보다는 결과를 우선하는 승부에 대한 집착, 타인을 향한 근거없는 의심과 투기.  
  

"케 부오이 Che vuoi?"
무엇을 원하는가?


악마가 알바로 앞에 나타나 묻는 질문이다. 이 질문은 인간이 스스로한테 묻는 질문일 것이다. 비온데타의 유혹에 철벽을 치는 알바로가 수시로 흔들리는 까닭은 그의 말이 지극이 온당하기 때문이다(악마의 얼굴이 두 가지로 설정된 것도 이와 비슷한 맥락일 터다). 설득력있는 비온데타의 말에 넘어가다가도 그동안 옳다고 여기며 지켜왔던 사회적 관념과 도덕성으로 버티는 알바로의 모습은 경계에서 위태롭게 매 순간을 지나오는 우리의 모습이다.


작가의 마지막 장치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미친듯 돌아가는 이 세상은 실제인가, 환상인가. 만약 우리가 행복해지기만 한다면 무엇을 취하든 상관이 없는 걸까.


여력이 될 때마다 챙겨 읽는 환상문학. 유럽, 남미, 아시아의 환상문학은 조금씩 다른 묘미가 있다. 남미가 에로틱하고 아름답다면 아시아는 종교나 신화적 요소가 강하다는 느낌이고, 유럽은 과학을 바탕으로 유니크하다. <모팽 양>에 이어서 읽는 프랑스 환상문학인 이 작품은 연금술을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가에 대한 의문으로 시작하면서 인간의 탐욕을 얘기하고 있는데, 악마의 이중적 얼굴은 결국 인간의 이중성을 빗대고 있는 게 아닌가하는 생각을 해본다. 



143.
우리의 적은 인간들이 서로를 타락시키기 위해 만들어낸 계략들을 차용함으로써 그 공격 방법에 있어 놀랍게도 교묘해졌다는 사실을 우리는 인정해야 합니다. 그는 자연을 충실하게 그리고 선택적으로 복제합니다. 그는 사람들의 마음에 들 만한 재능들을 동원하고, 아주 꾀바르게 계획된 축제를 열고는, 열정으로 하여금 가장 유혹적인 언어를 말하도록 하지요.




□ 출판사 지원도서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사랑의 종말
그레이엄 그린 지음, 서창렬 옮김 / 현대문학 / 2021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60.
나는 내가 사랑한 유일한 것을 내 인생에서 자꾸만 몰아내고 있었다. 사랑은 오래도록 변치 않는 것인 척할 수 있는 한 나는 행복했다. 심지어 나라는 사람은 함께 살기 좋은 사람이고 따라서사랑도 변치 않을 것처럼 나 자신을 속였던 것 같다. 그러나 사랑이 죽어야 한다면 빨리 죽기를 바랐다. 우리의 사랑은 덫에 걸려서 피를 흘리며 죽어 가는 조그만 짐승과도 같았다. 나는 눈을 질끈 감고 그 목을 비틀어야만 했다. 
 

 
이전 작품에서도 느꼈던 바지만, 나는 이 작가의 문체가 좋다. 건조하지만 건조하지 않게 전달하는 문장들을 하나하나 주의 깊게 읽도록 하는 힘, 군더더기 없는 문장, 그 적당한 무게감이 좋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그 부류의 마지막 존재
시그리드 누네즈 지음, 민승남 옮김 / 엘리 / 2021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주 화자인 조지의 회고로 서술되는 소설은 앤과 조지, 그리고 조지의 동생 솔랜지를 중심으로 1968년부터 1990년대까지 약 30여년의 세월을 이야기한다.  









이 소설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지점은 조지와 앤이 학교를 떠난 이후다. 조지가 비교적 일반적으로 떠올려지는 당시 여성들의 삶을 살아갔다면, 앤의 삶은 예상치 못한 급진적인 변화를 맞는다. 20여년간 재소자 신분으로 살면서도 자신의 신념을 절대 놓지 않았던 앤의 원동력은 무엇이었을까. 더구나 시대가 바뀜으로써 앤이 추구했던 혁명과 진보는 퇴색하고 오히려 앤 본인이 그토록 경멸했던 자신의 출신 때문에 그의 소신과 진정성까지 폄훼되는 상황에서도, 그는 바뀌지 않았다. 그야말로 앤의 무구한 이상을 곡해없이 바라본 이가 바로 다수의 삶의 방식으로 살고 있는 조지다.  


법정에서 정신과 의사는, 앤의 물질적.정서적으로 유복했던 어린시절에서 결여된 것은 삶의 잔혹성이나 인간에 대한 인간의 무자비함에 직면했을 때 그것에 대처하는 메커니즘이라고 얘기한다. 조숙한 감수성을 가진 청소년기의 앤에게 전 세계에서 저질러지는 죄악들, 역사적으로 이어져 온 죄악들은 선택받은 자로서 갖는 자기혐오와 자신이 속한 계층에 대한 증오라는 것. 판사는 앤이 응석받이로 자라 자신의 판타지 속 세상에 들어맞지 않는 모든 사람을 경멸하고 증오하는 무지하고 오만한 사람이라고 꾸짖는다. 그러면서 판사는 앤에게 '당신 부류의 마지막 존재가 되기를 바란다'고 말하는데, 이 말을 앤의 변호사는 그가 '그 부류의 마지막 존재일 수도 있다'고 달리 말한다. 판사가 말한 마지막 존재와 변호사가 말한 마지막 존재의 의미는 각각 무엇일까.


조지는, 앤을 소설 중반에서는 '시몬 베유'와, 마지막 부분에서는 '개츠비'에 비유한다. 앤의 삶의 결이 시몬 베유와 아주 유사함은 알 수 있다. 그런데 왜 개츠비일까. 어쩌면 데이지를 향한 개츠비의 무한한 사랑과 열정, 이상이 차별받는 계층을 향한 조지의 신념과 닮아 있기 때문일 것이다. [7부]의 화자로 등장하는 동료 재소자는 앤의 면전에서 그가 이기적이라고 비난했다. 앤은 꼭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면서 다른 사람들을 돕는데, 그 누군가는 대개 자기 자신이었다며 그가 보기에 앤은 자신을 죽이고 있었고, 그에겐 그것이 최악의 이기심으로 여겨졌다는 말과 함께 앤이 증명하려는 것이 도대체 무엇이냐고 묻는다. 내 생각으로는, 앤은 증명하고자 하지 않았다. 그저 삶을 자신의 소신대로 살아냈을 뿐이다.  


소설은 [5부]와 [7부]를 제외하고 모두 조지가 화자가 되어 1인칭으로 서술한다. 5부에서 3인칭 관찰자 시점으로 바뀌는데, 3인칭이지만 조지가 관찰자 역할을 함으로써 자신을 타자화하는 것으로 읽혀진다. 앤이 가장 증오하고 분노하는 특권층 세상 한가운데에 자리한 조지는 처음에는 이 윤택한 생활과 다정한 부모를 버린 앤을 납득하지 못하지만, 앤조차도 몰랐던 이면들을 터너와의 대화를 통해서 알아가며 앤을 향한 더 큰 이해와 연민을 갖게 된다. 이는 조지가 살면서 경험해보지 못했던 앤의 유년 시절ㅡ다정한 아버지(연인), 경제적.문화적으로 풍요로운 생활, 자신의 약점을 스스럼없이 털어놓을 수 있는 의지가 되는 존재ㅡ을 잠시나마 체험하는 모습으로 보이는데, 이로써 앤의 삶을 면밀하게 이해할 수 있게 된다. [7부]는 짧지만 앤의 수감 생활을 가장 가까이에서 지켜본 동료 재소자의 1인칭 서술로 진행한다. 이는 앤과 직접적으로 연관이 있었던 인물이 아닌, 제3자의 입장에서 객관성을 갖기 위함이 아닌가 싶다.  





두 여성의 삶과 생각에 한발자국 더 들어가 보자.  


학교를 중퇴하고 여성 잡지사에서 일을 시작한 조지는 꾸준히 커리어를 쌓아간다. 일보다는 육아를 우선하고, 남편과 공동 대표로 있으면서 육아와 병행할 수 있는 일을 선택할 수 있는 상황에 행복감을 느낀다. 조지의 주변 여성들은 전업주부일 때 혹은 일을 하면서도 육아를 우선하는 그를 경멸했다. 그는 다른 여성들처럼 육아에 매달릴 때 왜 갇혀 사는 기분을 느끼지 못하는지 스스로도 알 수 없다. 다만 본능적으로 아이들이 우선이었다. 전업주부로서 사는 조지를 납득하지 못하고, 왜 어머니 세대의 삶과 똑같은 삶을 살려고 하는지 의아해 하는 동시대 여성들.


우리는 간혹 성평등을 외치는 와중에 육아와 살림을 폄하하는 경향을 보일 때가 있다. 아이를 키우고 교육시키는 일은 가치를 가늠할 수 없을 만큼 중요하다. 다만 황금물질주의 시대에 돈으로 환산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육아=경제적 무능으로 치부되고 있다. 누가 할 일인지보다 누구든 반드시 해야할 일임을 인식해야 한다. 앤이 콰메에게 복종적인 모습을 보이는 것에 오히려 조지가 의문을 품는 모습은 우리가 짚어야할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해보게 하는 대목이다.


ㅡ 
 


앤은 학교를 떠난 후 한때 흑인 급진주의자였으나 평범한 교사로 일하는 할렘 출신 남자 콰메와 사랑에 빠진다. 콰메는 안정된 가정을 원했고, 앤의 생활 방식이 바뀌기를 바랐으며, 순종적인 아내를 요구했다. 그가 흑인이라는 사실을 제외하면 전통적으로 떠올려지는 남성의 모습이다. 그런데 이러한 앤의 태도는 아버지 터너에게 쏟아내는 비난에서도 나타난다. 어머니가 타락한 부르주아의 생활을 지속하는 것은 어머니를 휘어잡아 교육시키지 않는 아버지의 방치 때문이라는 것이다. 앤은 왜 남녀의 불평등은 당연하게 여겼을까. 소설에서도 앤이 여성을 친구나 동료로 여기는 모습을 볼 수 없다. 그저 돌봄을 필요로 하는 존재로 여길 뿐(물론 콰메가 백인이었다면 앤은 어떤 태도를 보였을까라는 가정도 생각해볼만 하다). 인종 평등을 외치며 성평등은 외면했던 앤의 모순. 그런데 이러한 모습은 지금 우리 사회에서도 볼 수 있다. 집단을 이루며 각자의 입장에서 평등을 외치지만 그 어느 곳에도 속하지 못한 소수자에 대한 평등을 외면하는 우리의 모습은 앤 스스로도 인지하지 못했던 그의 모순과 닿아있다. 
 

앤은 부모가 돈 때무에 결혼을 했다고 여겼고, 부모가 서로 사랑한다는 것을 믿지 않았다. 돈과 피부색으로 결정된 특권층을 본인이 정해놓은 규격화된 모델 틀 안에 우겨넣은 셈이다. 돈 많은 백인에게는 진정한 사랑도, 인류애도, 없다고 여겼다. 그래서 백인과 부자의 특권에 수치심을 느꼈고, 계층적 죄책감은 그를 끊임없이 흔들었다. 달리 생각해 보면 앤의 외골수적인 우직함이 그녀의 삶을 결정지었던 것 같다. 앤이 아버지 터너와 대화하는 데에 시간을 조금만 할애했던라면 어땠을까라는 생각을 해본다.  
 


아무튼, 특권층으로서 갖는 수치심을 극복하기 위해 극단적인 삶을 살았던 그의 삶은 참으로 고단했다. 비극적이되 불행하지는 않은 사람, 앤이다. 
 


사실 책을 읽으면서 이 입체적인 인물을 어떻게 납득하고 이해해야할지 고민스러워 완독까지 예상보다 시간이 더 소요됐다. 스스로를 몰아붙이며 치열하게 살았을 앤이 단지 소설 속 인물에서만 존재할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내가 이 세상에 존재하기 전에 이미 세상과의 고독한 싸움을 시작한 수많은 '앤'들은 지금 어떤 삶을 살고 있을까 궁금해졌다. 그들의 안온한 삶을 기원한다.





출판사 지원도서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