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정한 서술자
올가 토카르추크 지음, 최성은 옮김 / 민음사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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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
인간이 자신의 고유한 언어를 잃고 집단의 언어가 사적인 언어를 모조리 집어삼키는 것보다 더 무서운 질병은 없다.  



이 책은 작가의 노벨 문학상 수상 기념 강연록과 (미발표를 포함한) 다른 일련의 강연록들, 그리고 글씨기에 대한 에세이를 비롯한 몇 편의 에세이, 그리고 비평서 등이 실려 있다. 









인간은 스스로를 지구에서 유일하고 단일한 존재로 인식하며 전종의 생명체 뿐만 아니라 동종인 인류 안에서도 차별과 편견없이 관계 안에 동참하고 연대하기를 거부하며 세상을 독점하고 일방적으로 파괴했다.


현재, 세계는 점점 더 복잡하고 다각적인 양상으로 바뀌어가고 있고, 동시다발적이면서 연쇄적으로 여기저기에서 폭죽이 터지듯한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원인이 지구온난화든 아니든 이상 기후와 감당 불가능한 자연재해가 발생하고, 역사적으로도 손에 꼽을 만한 전염병이 발생하고, 심지어 제3차 세계대전을 운운하고 있다. 그렇다고 모든 것을 포기하고 자급자족하는 시대로 회귀할 수는 없다. 그렇다면 이 지점에서 우리가 짚어봐야할 것은 무엇인가를 작가는 얘기한다.


탈중심주의, 익숙한 사고방식이나 행동반경을 벗어나려는 경향, 고질적인 의식과 안정적인 세계관에 부합하는 집단적 관습으로부터의 탈피. 작가는 이 세상을 새로운 방향으로 움직이는 것은 창의적이고 기발함과 더불어 앞서 언급한 성향들이라고 말한다. 일반적인 상식의 가치를 잊지 말고, 논쟁을 즐기고, 순응과 위선에 맞서 운명의 궤적을 바꾸려는 용기있는 태도가 필요하다. 그는 문학이 상호 간의 영향과 연결이라는 통합적 관점으로 세상을 조망하는 데 가장 강력한 장르라고 생각하며, 문학이란 세상에 대한 이야기를 직조하는 끊임없는 과정이라고 얘기한다.



여행에 대한 이야기. 관광객은 여행이 이국적이기를 원하지만 한편으로는 너무 과하지 않기를 바란다. 사실적이고 긴장감 있는 체험과 현지인과의 접촉을 원하지만, 그렇다고 소위 문명의 이기를 포기해야하는 불편함은 감수하고 싶지 않다. 여행은 낯섦의 과정. 그러나 현재 우리는 어느 도시를 가더라도 익숙하다. 소위 세계화로 인해 각국의 음식과 문화가 보편화되었고, 커피, 의류, 장신구 등 다국적 기업과 프랜차이즈 시스템으로 도시들은 고유의 개성을 잃은 채 점점 더 유사해지고 있다. 또한 획일적인 기념품, 대형 유원지를 비롯한 관광산업은 여행객이 낯섦의 세계로 향하는 것을 방해하고 있다. 어느 에세이스트가 현대 사회에서 관광객은 많지만, 여행자는 거의 없다는 말이 어느 정도 일리있다는 생각이 든다.



작가는 도덕적 토대로서 평등의 원칙이 동물과의 관계로까지 확대되어야 한다는 윤리학자 피터 싱어의 주장에 동의하며 종차별을 부정한다. 고통은 모든 생명체에게 주어진 본질적인 특성이기에 적어도 '고통'에 대해서는 인간과 동등한 위치에서 성찰해야 한다는 것이다. 동물 학대는 인간의 편견이나 원시적 욕망이라는 차원에서 접근하는 것은 오류이고, 근본적으로 인간의 무지와 무관심에서 비롯되었음을, 작가는 강조한다.


지구 생명체에서 주류는 인간이고, 인간 내에서도 주류가 존재한다. 종 차원의 주류인 인간의 잔혹함은 인간 세상 내에서도 벌어지고 있다. 전쟁을 비롯한 각종 범죄 현장에서는 인간이 동물을 도륙하듯 같은 종끼리 무참한 살육을 벌이지만, 우리는 이러한 무작위적 위협과 공포에 노출되어 있음에도 애써 외면한다.  



토카르추크는 우리가 자신의 고유하고 사적인 언어를 지키기 위한 방법으로 문학을 제시한다. 창작자의 언어와 소통하고 교류하는 행위야말로 집단의 언어에 휘둘리지 않는 치료법이라고. 이에 따라 번역가는 창작자의 경험을 통한 문화 창조의 행위와 내밀함을 타인에게 전달하고 공유함으로써 작가와 동등하게 책임을 나눠갖는다고 말하며 번역의 중요성과 번역을 통해 읽기의 자유로움에 대하여 감사하게 여긴다.


독서는, 특히 문학은 우리가 직접 경험하지 못한 세상을 다양한 방식으로 경험에 동참하게 해 준다. 저자는 독자가 소설의 허구성을 들어 회의적인 반응을 한다면, 그건 이미 벌어져 존재하는 과거와 확정되지 않는 미래의 존재 사이에서 균형을 잡는 능력을 상실했음을 의미한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소설을 읽음으로써 적극적이든 소극적이든 타자의 삶을 살아보고 공감하는 인식의 확장이 가능하다.  


작가와 작품이 상품으로 간주되는 세상에서 이제 작가는 글을 잘 쓰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다. 책이 상품으로 소비되는 세상에서 '저자'는 이에 적극적으로 동참해야만 한다. 이와같은 세태에 유독 문학.예술계에서만 '배고픈 예술가'를 감수하라는 대중의 요구에 대해 올가 토카르추크는, 작가에게 물질적 기반이 제공되지 않으면 문학과 예술은 존재할 수 없음을 짚으며 쓴소리를 한다. 그는 문학을 단순한 상품으로 인식하는 것을 부정한다. 서술자란 우리 사회 정신의 일부로서 세상을 이야깃거리로 탈바꿈해 누군가의 경험을 다른 사람의 경험을 전달하는 매개체 역할을 하면서 의사소통을 통해 공동체를 구축하고 통찰하며 이해 가능한 세상으로 나아갈 수 있게 한다. 파편화된 세상에서 총체적이고 통합적인, 그러면서 제3자의 시선을 잃지 않는 서술자가 필요하다.



창작적 서술자가 설득력을 갖고자 한다면 '다정함'이 동반되어야 한다고 말하는 토카르추에 의하면 작가는 자신이 의미를 부여한 작품 속 인물들에게서도 가르침을 얻는다. 각각의 층위에 있는 인물들을 유기적으로 연결하기 위해 작가가 다각적으로 면밀히 고민하는 과정에서 온당한 세상의 질서를 납득하고 이해하는 자가 작품 속 인물들만은 아닐테니, 저자가 하고자하는 말의 의도가 무엇인지 알 수 있다. 물론 이러한 다정함은 인간에게 국한하지 않는다. 인간과 동물 사이에 존재하는 정서적 친밀감과 유대감은 인간들 사이에서 발생하는 것 못지 않다.


올가 토카르추크는 은유나 비유를 이해하지 못하고, 유머 감각이 쇠퇴하며, 아이러니에 대한 감수성 상실, 모호함을 견디지 못하는 편협성 등 생각의 범위를 제한하고 독단주의와 근본주의 회귀를 초래하는 직해주의에 대해 심각한 우려를 나타낸다. 문학이나 예술을 이해하지 못하고, 넓고 깊은 시야로 바라보지 못하는 직해주의의 가장 큰 문제점은 편협성과 배타성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에 대해 인지하고 물질적인 세상에서 은유와 비유, 사려와 이해의 관점을 잃지 않도록 유의해야한다고, 그는 당부한다.  



세상은 따라가기 버거울 만큼 빠르고 변화무쌍하게 달라진다. 한계없는 다채로움과 복잡성을 이해하면서 그동안 겪어왔던 경험을 잘 정리해 다음 세대에 전달해 주는 것이 기성세대의 역할이 될 것이다.


올가 토카르추크를 비롯해 그가 언급한 인물들은 각자의 방식은 다르지만 대상을 향한 애정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 냉철하게 혹은 강하게 자신들의 주장을 피력하는 사람도 있지만, 그들 역시 마찬가지다. '다정한 서술자'란 그가 말한대로 작가와 서술자가 생명을 부여한 작품 속 인물뿐만 아니라 이 책에서 언급한 인물들을 포함한 주류중심주의와 집단주의를 거부하고 생명의 본질을 짚어가며 전지구적 생명체를 향한 공감과 연대에 대해 이야기하는 모든 이들을 지칭하는 게 아닐런지. 또한 우리가 관계를 맺음에 있어서 반드시 필요한 요소임을 강조하고 있다.


개인적으로 무엇보다 이 책이 좋았던 건 여러 부분에서 이입되는 경험들이었다. 스스로를 독서 중독자라고 표현하는 그의 어린 시절 독서 경험(화장실, 밥상머리 할 것 없이 책을 끼고 살았던 것), 어딘가의 책장에서 무심코 빼든 책에서 찾았던 정보를 발견하거나 혹은 희열을 느꼈던 경험, 십 년 주기의 재독 등 너무 흡사한 작가의 독서 경험에 공감되어 즐거웠다. 또한 이 책에서 언급한 문헌들 중에 느꼈던 감정이나 생각들을 나눌 수 있어 재밌었다.  


에세이를 읽으면서 우리 세대에 존재하기를 바라는 지식인의 모습이 이 책 안에 담겨있다. 그의 강의를 들었던 우츠 대학의 학생들은 어떤 영향을 받았을지 궁금해진다. 독서, 문학, 작가, 번역의 역할에 대해 서술한 이 책에는 인류가 지향해야 할 바를 모두 내포하고 있다. 독자는 올가 토카르추크의 다정함에 매료될 수 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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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조 히데키와 제2차 세계대전 - 일본을 패망으로 몰고 간 한 우익 지도자의 초상
호사카 마사야스 지음, 정선태 옮김 / 페이퍼로드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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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
"우리들은 인격人格이다. 하지만 폐하는 신격神格이다."



이 한마디에 도조 히데키의 모든 것이 담겨 있다.

도조 히데키의 평전을 기본 바탕으로 하고 있지만, 청일전쟁 무렵부터 일본의 대외 정책과 국내 정치적 상황을 함께 짚으며 그들이 왜 독일에 영향을 받았고, 무엇 때문에 태평양 전쟁에 뛰어들었는지를 집중적으로 서술하고 있다. 또한 일본의 내부 사정과 대외 차원의 대처 뒤에 숨은 이면들를 상당히 구체적으로 얘기한다.   









20세기 초 일본의 육군은 천황과 밀착해 국방 방침의 구체적인 안을 일방적으로 결정했고, 정치와 외교 책임자에게는 사후 승인을 구했다. 이는 육군이 정치를 능가할 수 있다고 여기게 했고, 이후 육군의 정치 개입은 명백해졌다. 1930년대 육군이 일본 내에서 주장하는 바는 거국일치내각, 즉 정당정치의 배격이었다.   



미드웨이 해전 및 과달카날 전투 패배를 기점으로 전황이 악화되면서 정계 및 여론이 흉흉해지며 도조에 대한 반발이 거세지자 급기야 언론탄압까지 하는 도조.  전세가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 상황임에도 도조는 여전히 전쟁은 정신과 의지의 싸움이니 일본정신으로 무장해야 한다는 정신론만 되풀이했다. 더하여 총리라는 자가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자신은 군인이기에 외교는 전혀 모른다고 공공연히 발언한다는 것이 과연 상식적인지, 나로서는 납득하기 어렵다.   



미국이 요구하는 전범 리스트에 도조의 이름이 맨 위에 올랐다. 다각도로 압박을 느낀 도조는 자결을 결심한 듯 하다. 그러나 육군성과 참모본부의 요직에 있는 자들은 군사재판에서 전쟁 책임의 소재를 추궁할테고, 천황을 면책하기 위해서는 도조가 필요했다. 그들에게 있어서 도조의 자결 미수는 다행이었고, 그는 마지막까지 영웅심으로 채워진 꼭두각시였다. 본인은 충성심과 책임감이라고 항변하겠지만. 


ㅡ 


나는 도조 히데키 인생의 전환점은 만주 부임이고, 태평양 전쟁의 방점은 그해 가을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그가 만주로 가기를 거부하고 제대했다면, 그리고 고노에 수상의 주장을 따랐다면 전쟁사는 달라졌을까? 그렇지 않았을 것이다. 그의 인생을 따라가본 결과 그는 한 시대를 좌지우지할 정도로 여러 의미에서 특출났다거나 영향력이 있는 사람이라고 보여지지 않는다. 그야말로 군대 조직에 맞게 아주 잘 다듬어진 군인이자 부속품같은 존재였던 것 같다. 그저 그가 거기에 있었을 뿐, 누가 있더라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을 것이다


더하여 도조는 천황 외에는 받드는 이념이나 사상이 없었다. 그가 전쟁을 주장했던 까닭 역시 그가 일본의 승리를 확신하고 실리를 추구해서라기보다 그가 군인이었기 때문이고, 육군성이 전쟁을 원했기 때문이었을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고 생각된다. 고노에가 태평양 전쟁 발발 직전에 도조에게 중국 철병을 간청했지만, 도조는 그의 요구를 일축했다. 퇴각은 항복과 같고 군인에게 있어서 항복은 있을 수 없다는 게 이유였다. 이런 사람이 정치를 했으니. 


돌이켜보면 도조는 무엇을 스스로 결정하기보다는 조직과 시류에 맞춰, 혹은 누군가의 설득에 의해 떠밀린 바가 더 크지 않았나싶다. 더구나 그에게는 정치적 식견이나 세상을 넓은 범위로 꿰뚫는 혜안이 없었다. 적어도 도조가 육군상이 되었을 무렵부터 그는 육군성의 우수한 장기말이자 천황과 군국주의의 허수아비에 불과했다는 게 개인적인 생각이다. 그의 잘못은 과잉된 자아에 도취해 깜냥도 되지 않는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진주만 공습 직전, 루스벨트가 천황에게 보낸 전보가 조금 일찍 전달됐다면 일미전쟁은 피할 수 있었겠느냐는 질문에 저자는 그렇지 않았을 것이라고 판단한다. 나 또한 당시 일본의 지도자 중 정치적.외교적 혜안을 갖춘 인물이 있었다고 보여지지 않는다. 더구나 오로지 명령에 죽고 살며 타협을 불명예라고 여기는 군사 정권이 들어선 마당에, 무엇보다 전반적으로 개전을 원하는 그들이 과연 외교적 수완이 발휘됐을까는 의문이다.


ㅡ  


도조를 따라가다 보면 마치 '천황'이라는 신을 모시는 사이비종교 교주를 보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다. 어디에서, 어떤 상황이든 기승전'정신력' 이고, 일본의 정신 계승자는 오로지 육군뿐이라는, 그래서 그대로 뒀다가는 전 국민을 육군으로 만들어버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까지 들 지경이다.


읽으면서 새록새록 깨닫는 바는 일본 자체가 우물 안의 개구리였다는 사실이다. 이는 균형감각이 결여된, 편협한 군인정신으로만 무장된 군국주의자 한 사람에 국한하지 않은 듯 하다. 소위 '대동아공영권'을 '육군 정신'으로 재편하려했던 그들의 야욕은 어쩌면 시작부터 어불성설이었을 터다.  


다른 또 하나는 일본이 현재까지 우리나라에 진정성 있는 사과를 안 하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극동국제군사재판 과정을 읽다보면 회부된 인물들 뿐만 아니라 언론을 비롯한 각계 각층이 거의 대부분 약속한 것마냥 일본의 죄를 인정하지 않았다. 심지어 도조는 일본이 태평양전쟁에 항복한 것 뿐 다른 전쟁은 범죄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도조 자신조차 제대로 몰랐던 난징학살을 비롯한 잔인하고 반인륜적인 사건을 법정에서 듣고도 죄의식 없이 여전히 서구에 대한 동아시아 해방에 앞장섰다며 자랑스레 떠들어대는 그(들)의 모습을 읽으면서 사죄는 거의 불가능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전쟁에 패해 삼천 년 역사를 더립힌 것이 황공하고 이는 오로지 개전 당시 최고책임자였던 '나'의 책임이라는 말만 강조하는 도조의 모습을 보면서 착각과 오만이 뒤섞인 그에 대한 답답함과 안타까움으로 꽤 한참 씁쓸했다.  


여기서 궁금한 점은 오로지 천황만을 면책시키고자 했던 그들의 일심처럼, 현재 일본인들에게 천황은 그때와 같은 의미일까. 더불어 일본에서 아직도 극우의 세가 막강한 힘을 발휘하는 까닭을 잠작할 수 있었다. 저자조차도 자신의 세대에서는 도조의 공과 죄를 공개적으로 묻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단정한다. 



나는 교수형을 앞두고 도조가 종교에 심취해 자신이 행복한 사람이었다고 회고하는 것도 불편하다. 인생의 절정을 맛봤고, 일가를 꾸려 아무런 해도 입지 않은 채 자손을 남겼다. 인생무상을 깨달았고 마지막 순간에 종교를 믿게 됐으니 더이상 바랄 것이 없다. 이것이 A급 전범의 마지막 소회라니. 그 어디에도 죄의식은 찾아볼 수 없다. 그의 사죄는 전쟁 패배에 대한 일본 국민에게 향하고 있었고, 마지막 순간은 너무나 평온했다. 나야말로 그의 마지막을 접하면서 화가날 만큼 허탈하기 그지없다. 그를 죽이지 말았어야 했다. 죽음으로써 그는 석방됐다.


교수형이 선고된 이후 전범들을 '순교자'라고 표현한 것도 어처구니가 없고, 법정의 판사들이 도조를 '희생양'이라고 표현하며 전승국의 도량을 요구했다고 하는데, 글쎄 과연 그가 희생양인지는 의문이다. 물론 일본이 그를 총알받이로 삼아 전쟁에 대한 책임과 과오를 국가적 차원이 아닌 특정 개인에게 뒤집어씌우며 죄를 무마하고 회피하는 전략은 분명한 잘못이다. 그러나 자진해서 꼭두각시가 된 도조를 동정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오히려 우리가 짚어내야 할 것은 '도조'가 아닌 그의 뒤에 교묘히 숨겨져 있는 진실이다.  



이 책은 도조 히데키라는 인물의 삶의 궤적과 함께 당시 일본의 상황을 추적하면서 두 가지 문제를 짚어낸다. 도조 히데키와 육군의 중심인물들만이 쇼와 전사에서 전적으로 부정적인 존재인가의 여부, 도조 히데키의 지도자로서의 자질을 근대의 군사정치 형태의 부정적인 국면과 맞물림으로써 왜곡된 문제의 본질이 그것이다. 그리고 도조 히데키의 성향이 최고지도자로서의 입장에 어떻게 반영되고, 그로인해 시대의 양상을 어떻게 바꾸었는지를 검증한다. 저자는 도조 히데키을 실상을 명확하게 함으로써 진실을 바로 알고 잘못된 점을 반성해 일본이 새로운 시대를 열어가기를 바람하고 있다. 그의 바람이 이루어지기를 나 역시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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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 폴리스맨
베선 로버츠 지음, 민은영 옮김 / 엘리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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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1.
패트릭, 이 모든 얘기를 털어놓는 건 나와 톰 사이가 어땠는지 알려주기 위해서다. 우리 사이에 고통만이 아니라 다정함도 있었다는 걸 당신이 알도록. 우리 둘 다 실패했지만 우리 둘 다 노력했다는 걸 알도록.




매리언
열네 살에 처음 만난 톰에게 한눈에 반해 혼자 사랑을 키워왔다. 6년이 흘러 제대하고 경찰이 된 톰이 자신을 찾아왔을 때, 그에게서 벗어날 수 없음을 깨달았다. 친구 이상의 선을 절대 넘지 않았던 톰이 청혼하자 꿈같이 일이 이루어졌다고 기뻐했다. 그에게 그녀보다 더 특별한 친구가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패트릭
서른네 살, 우연한 작은 사고로 인해 스물두 살의 젊은 경찰과 만나게 됐다. 연인 마이클을 안타깝게 떠나보내고 움츠려들대로 움츠려든 그에게는 벼락같은 만남이었다. 첫눈에 알아본 연인. 아주 조심스럽게 다가가리라, 나의 순경님에게. 두 사람은 그 어떤 연인보다 열렬히 사랑했다.  








소설은 1999년 가을에서 시작해 1950년대까지 거슬러 올라가 매리언과 패트릭의 1인칭 시점에서 서술한다.  


개인적으로 이 소설에서 눈에 띄는 점은 등장인물이다. 주요 인물인 세 사람ㅡ매리언, 패트릭, 톰ㅡ외에도 적잖이 영향을 미치는 줄리아가 있다. 이들 중에 세 사람이 성소수자다. 즉 매리언을 둘러싸고 있는 가장 가까운 세 사람은 서로에 대한 이해와 감정이 공유 가능하다는 것이다. 오로지 매리언만이 그들의 상황을 납득하지도 이해하지도 못한다. 그럼에도 칼자루를 쥐고 있는 사람은 매리언이다. 세 사람은 각자의 이유로 매리언에게 그들의 성정체성이 노출되자 두려움을 느낀다. 그리고 매리언은 분노를 참지 못하고 자신의 칼자루를 가차없이 휘두른다. 이처럼 성소수자의 사회적 지위가 어느 정도인지 소설 전체의 흐름에서 나타내고 있다.  


그 안에서도 톰과 패트릭은 아주 다른 모습을 보인다. 소설에서는 성소수자 뿐만 아니라 여성 문제에 대해서도 언급하는데, 여성이 경제적 활동을 하는 것에 대해서 전반적으로 부정적인 시선이 팽배했던 당시 매리언이 교사직을 고수하겠다고 하자 톰과 패트릭의 의견이 엇갈린다. 패트릭은 매리언이 일을 계속하는 것에 대해 긍정적으로 얘기하지만(사실 패트릭의 의도가 명확하지는 않다. 훗날 톰이 매리언과 결별하고 난 후에 그녀의 경제적 상황을 고려해서인지, 일단 그녀에게 잘 보이려고 했던 것인지, 진심으로 여성의 지위에 대해 공정하지 못하다고 생각했던 것인지), 톰은 가장으로서 탐탁치 않게 여긴다.  


그런데 여기서 재밌는 점은 톰의 직업이다. 그는 성소수자이면서 동시에 그들을 범죄자로 잡아들이는 권력자인 경찰인, 한마디로 톰의 입장 자체가 모순된다는 것이다. 소설 전반에서 톰의 남성우월주의, 가부장적 모습이 자주 보여진다. 아마도 톰은 자신의 직업 때문에 성소수자에 대한 사회적 차별과 편견, 그에 따른 폭력까지 너무나 잘 알고 있어서 비겁해질 수 밖에 없었을 터다. 



소설에서는 성소수자를 향한 혐오는 말할 것도 없고 그들을 협박해 돈을 요구하는 사람들이 등장하는 것처럼 그들은 불특정다수에 의한 정체불명의 위협에 끊임없이 시달렸다(지금이라고 뭐 얼마나 달라졌으랴마는). 여성으로서 차별적 시선을 느끼는 매리언조차 톰이 달라질 수 있다고 울부짖으며 남편의 성정체성을 부정했고, 패트릭이 어쩔 수 없이 만난 정신과 의사는 동성애를 정신질환이라고 단정했다. 사람들은 동성애가 치료를 요하는 질병이자, 본인의 노력 여하에 따라 치료 가능하다고 여겼다. 


동성연애자는 범죄자, 성적 욕망을 드러내는 여자는 혐오스러운 존재였던 시절에 어쩌면 그들의 불행은 서로에 대한 애정과 육체적 욕망을 떳떳하게 드러낼 수 없는 현실의 문제에 기인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결국 정상성 범위 안에 있다고, 그렇게 될 수 있다고 믿었던 매리언은 많은 것을 잃는다. 그녀는 자신이 실패했다고 고백한다. 누군가를 지키길 바랐던 그들 모두 사랑하는 사람과 스스로를 망가뜨렸다. 매리언이 죄책감으로 얼룩진 사랑에 진정으로 이별하는 그 순간이 너무 늦어 안타까웠다. 긴 세월 동안 그녀는 얼마나 스스로를 괴롭히며 고단했을까.  


매리언의 고백을 통해 진실을 알게 된 두 남자는 자신들이 매리언에게 어떤 짓을 저질렀는지, 그리고 그들이 외면하고 기만했던 것이 무엇인지를 깨닫는다면 매리언을 용서할까. 지독하게 아픈 사랑의 이야기다. 


이 소설을 읽었다고해서 일장 입바른 소리를 내뱉고 싶지 않다. 아마도 소설을 읽다보면 우리가 여전히 얼마나 편협한 시선으로 세상을 보고 있는지, 그 편협한 시선으로 누군가를 불행하게 할 수 있다는 사실에 대면할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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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개토태왕 담덕 3 - 여명의 기운
엄광용 지음 / 새움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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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권은 377년 고구려와 백제의 평양성 전투를 시작으로 하대관과 해평의 반란까지(384년)를 다룬다.  








 
부소갑을 두고 전쟁을 벌이는 고구려와 백제를 보면서 먼저 떠오른 건, 부소갑에서 인삼 농사를 짓고 있는 백성들이었다. 안타깝게도 부소갑이 노른자위같은 땅이라는 사실은 부소갑의 농민들에게는 오히려 독이 된 셈이다. 전쟁의 가장 큰 피해자는 그들일텐데 기실, 누가 왕이 된다한들 그들에게 무슨 차이가 있겠는가.   


전쟁은 이기든 지든 큰 피해를 남긴다. 2차 평양성 전투가 대왕 구부에게는 한풀이 복수극을 성공적으로 마친 셈이지만, 남편과 젊은 자식을 전쟁터로 보내고 흉년에 군량미까지 바쳐야했던 백성들의 핍박한 삶의 고통에 대해서는 어떤 보상과 위로가 가능할까. 승전을 했으나 전쟁보다 더 지독한 가난과 기아가 기다리고 있는 백성이 할 수 있는 것은 도적질 뿐인데.    


을두미는, 신화는 인간의 마음을 그린 지형도와 같은 것이고, 사람들의 정신세계를 이야기하거나 그림으로 형상화해 놓은 것에 다름 아니라고  했다. 또한 신화란 민족의 정신을 담는 그릇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민족 정신은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하자'는 것일텐데, 우리는 현재, 우리 모두를 이롭게 하고 있는가.  


ㅡ 


383년 동진과 전진의 비수전투. 이 전투의 결과로 선비족 출신 모용수가 후연을 세워 비상한다. 모용선비가 후연을 세우고 스스로 황제로 칭하며 세력을 키운다는 것은 곧 고구려 서북 국경을 노린다는 것을, 그리고 고구려가 요동지역을 두고 후연과 전쟁을 벌여야할 위기에 처해 있음을 의미했다.  


고구려는 평야성 전투에서 승리한 후 5년 동안 흉년을 겪었고, 그로 인해 백성들은 오래도록 곤궁한 생활에 시달려 왔다. 백제 역시 지진이 발생한 데다 대기근이 겹쳐 고구려를 공격할 엄두도 못 내고 있고, 신라는 오래전부터 고구려에 복종하여 대외 관계까지 의지하는 편이었다. 고구려가 신라의 외교까지 연결해 주면서 전진과의 우호 관계가 더욱 돈독해져, 고구려는 서북방 변경에 대해서도 안심하고 있었다. 대기근에서 벗어나 점차 안정을 찾아가고 있을 무렵 다시 위기가 찾아온다. 순탄하기만한 세월은 없구나라는 생각이 새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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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으면서 사이사이 들었던 짧은 생각들은, 


머리를 쓰는 데에 있어 사람마다 활성화되는 부분이 다르다는 것. 화적떼들이 '비려'라고 불리는 지우두의 소금 호수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우신은 만약 염수에서 소금 캐는 권리를 갖게 되고, 그것을 고구려까지 운반하여 팔게 된다면 대상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을 한다. 부르는 게 값인 소금 채취권과 교역권을 거머쥔다면 고구려는 더욱 부강한 나라가 될 수 있을 거라는 데까지 생각이 미친 우신은 미래 대비책까지 세워놓는다. 집 나간 딸을 찾겠다고 슬픔을 억누르며 방방곡곡을 헤매는 아비가 그 짧은 순간에 이런 계획까지 세웠다는 게 이런저런 이유로 재밌기도 했다.  


추수가 뗏배의 노를 저으면서 아리랑을 흥얼거리는 부분을 읽다가 문득 아리랑의 기원은 언제부터일까가 궁금해졌다. 막연히 오래된 우리 터전의 구전민요라는 것과 학교에서 배운 지역적 특성에 대한 상식 정도는 알고 있지만 막상 언제부터 시작됐을까라는 생각은 해보지 않은 것 같다.   


삼국시대를 다룬 역사서를 읽으면서 가끔 상상하는 것은 '근초고왕과 광개토왕이 동시대에 살았다면?' 이다. 둘 다 영토확장형 군주라 어지간히 싸웠을 것 같은데... . 여기다 진흥왕까지 보태지면...! 어쩌면 이들이 세대를 달리해서 태어난 것은 신의 오묘한 섭리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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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덕은 똘똘하게 자라고 있고 그의 인생에서 그림자가 되어줄 것 같은 마동과 두치를 만났으며, 추수는 해적잡는 일목장군이 되어 다시 세상 밖으로 나왔다. 소진은 여전히 무명대사를 찾아다니고, 소진의 아비 우신은 딸의 뒤를 추적하는 중이다. 동부욕살 하대곤의 가당치도 않았던 꿈은 물거품이 되었다. 아버지 무의 뜻과는 다르게 증오와 복수심만 차곡차곡 쌓은 해평의 예상치 못한 인생 행로. 대왕 구와 사유가 그랬듯 다시 한 세대가 저물어간다. 


생뚱맞게, 사람이든 동물이든 식물이든 피고 지는 게 당연한 순리임에도 어느 순간 늙는다는 건 서글픈 거라고 말씀한 어느 분이 생각났더랬다.  


4권에서는 청소년기의 담덕을 만날 수 있을 것 같다.
그나저나 배 타고 나간 겁없는 두 소년은 어찌 됐으려나? 





♤ 출판사 지원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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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러줘 우리를, 우리 지닌 것으로
어맨다 고먼 지음, 정은귀 옮김 / 은행나무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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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말부터 2021년까지, 우리는 역사의 한 페이지에 기록될 전무후무한 팬데믹 시대를 지나왔다. 인류는 14세기의 흑사병, 20세기의 스페인 독감, 아시아 독감, 홍콩 독감, 신종플루 등 전지구적 전염병 대유행을 겪어왔지만, 특히 현재 우리가 겪고 있는 코비드19는 역대 찾아볼 수 없는 전염력으로 인해 사람들을 공포로 몰아넣었다. 2022년의 끝을 석 달 앞둔 현재, 많은 나라에서 코비드19 종식을 선언하고 있는 중이다. 


이 시집은 팬데믹 시대를 지나오면서 다양한 지점에서 우리가 감내해야했던 수많은 상실과 고통을 직시하면서 이에 대해 탐구함과 동시에 우리가 나아가야할 길에 무엇을 바탕으로 두어야하는 지를 이야기하고 있다. 스물세 살이라는 젊음이 돋보인다고 느껴질만큼 구성이나 형식이 독창적이다. 시인의 시어와 분위기는 무겁지 않으나 사유는 결코 가볍지 않음을 보여주는 시집이다.  









 
우리는 코로나라는 질병 자체보다 전염병에 대한 불안으로 더 피폐해졌는지도 모르겠다. 지금도 악수와 포옹은 선물 같다는 시인의 말에 공감한다. 코비드19가 한창일때 우리는 아무리 반가워도 가벼운 포옹은 고사하고 손끝조차 스치지 않기 위해 무척 조심하지 않았던가. 그래서일까. 여전히 악수를 위해 내미는 손이 때로는 무례가 되지 않을까 우려가 앞선다.  


한동안 본의 아니게 최대한 외출을 자제하던 시기. 반강제적 고립은 인간을 마치 상동행동을 하는 감금된 동물처럼 만들었고, 죽은 자들에 대한 애도는 사치가 되었으며, 사랑과 책임과 위로는 사라졌다. 어떤 목적도, 기능도 없이 사고가 멈춰버린 채 불안과 우울의 우물에 갇혀버렸다. 


시인은 코비드19 사태를 홀로코스트의 트라우마, 한국인 한恨에 비유하며 우리에게 깊고 짙은 슬픔과 충격을 안겼음을 얘기한다. 동시에 '집단기억'을 언급하면서 우리가 과연 이 경험에 대한 기억을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를 묻는다. 경험을 잊고, 지우고, 검열하고, 왜곡할 것인가, 아니면 비록 고통의 과정을 수반할지언정 서로에게 묻고 듣고 공유하며 그 경험이 반복되지 않도록 진실을 말할 것인가를. 포스트 코로나, 그건 우리의 선택이다. 


총알과 포탄이 날아다니는 전장과 소리없는 전염병의 전장은 한 치도 다르지 않다. 목숨이 오락가락하는 전쟁, 전염병 와중에도 여전한 차별과 편견. 이것들은 사람을 괴물로 만든다. 정당한 분노는 당연한 권리이고, 증오가 바이러스가 되지 않도록 포스트 코로나 시대에 우리가 가져야할 목표는 보복이 아닌 회복, 지배가 아닌 존엄, 공포가 아닌 자유여야한다고 시인은 역설한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편리함보다 본질과 더불어 살아야함을, 타인을 미워하고 책임을 떠넘기기보다 더 나은 길을 모색해야 한다. 때로는 위기가 우리를 더 우리 자신이게끔 해주고, 아이러니하게도 고통과 슬픔을 통해 우리의 존재를 확인한다.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우리에게 생긴 일은 우리를 통해 생겼다는 사실, 그리고 인간은 절망 속에서도 늘 생을 품어왔고 살아남을 것을 의심하지 않았다. 우리는 아직 존재하고 있으며, 우리를 형성하는 '관계' 안에서 더 나아질 것이다. 희망은 실질적인 실천을 대동해야 한다. 그전에 우리에게는 충분히 비통해할 시간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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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을 읽으면서 코비드19 발병 직후부터 지금까지, 각종 매체에서 보도되었던 내용들과 개인적인 일상들이 하나하나 떠올랐다. 마스크를 착용하지 않은 사람은 말할 것도 없이 누군가 밀폐된 공간에서 코를 훌쩍이거나 기침이라도 하면 의심 가득한 가자미 눈을 뜨고, 마스크 대여섯 장을 사기 위해 100미터 이상 줄을 서는 것을 감수하며, 확진자는 죄인 아닌 죄인 취급을 당했던 어처구니 없었던 시절. 한겨울 발병한 전염병. 마스크를 쓰고 여름을 나야할 우려가 무색하게 어느새 두 번의 여름을 거쳤다. 이렇게 살 수는 없어,라고 말했지만 그렇게 2년을 지나왔다.   


팬데믹 시대에 우리가 발견한 건 우리의 부끄러운 민낯이다. 시인은 전쟁과 팬데믹의 첫걸음은 고립과 단절이라고 얘기한다. 무기와 흉기를 사용하지 않는 선에서 이보다 더 극단적인 폭력이 있을까. 이보다 더 인간을 바닥으로 끌어내리는 것이 있을까. 더더욱 무서운 것은 어느새 이러한 현상들이 지속되는 것에 익숙해지면서 우리 스스로 서로를 적으로 만든다는 점이다. 온건한 전쟁은 없으며, 내던져질 수 없는 평화는 없다는 시인의 말이 격하게 와닿는다.  


시인은 팬데믹 뒤에 숨은 진짜 전쟁을 끝내는 방법은 우리의 이야기를 소리내어 이야기하고, 쓰고, 전달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 시집의 제목처럼 우리는 서로를 불러줘야 한다. 그 부름이 모두를 존재하게 할 것이다. 또한 타인에 대한 연민이야말로 우리가 길을 잃지 않게 해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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