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노우 엔젤
가와이 간지 지음, 신유희 옮김 / 작가정신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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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사랑도 슬픔도 느낄 수 없는, 감정없는 영원한 평온.

모든 감정에서 해방된 순수한 평온은, 천국일까? 지옥일까?



2017년 9월 24일, 한 남성은 자신이 몰고 가던 승용차로 보행자 전용도로에 진입해 보행자 십여 명을 들이받은 후 이어 백화점 벽과 충돌하고 쇠지레를 이용해 시민과 백화점 내 이용객들을 무차별적으로 구타.살해하며 9층 테라스까지 올라가 난간에서 '천사 님'을 외치며 뛰어내려 즉사했다. 그는 향정신성 약물 중독자다.


9년 전, 추락사로 위장한 살인 사건을 동료와 추적하던 형사 진자이 아키라는 범인들의 함정에 빠져 현장에서 동료가 죽고 분노를 이기지 못해 범인 다섯 명을 총으로 사살하고 도주했다. 현재 그는 실종선고를 거쳐 법률상 사망자로 등록되어 있다.

사건 해결은 고사하고 날품팔이로 하루 벌어 먹고 살기에도 빠듯한 진자이를 찾아온 형사 시절 상사였던 기자키 헤이케스는 누군가를 만나달라고 부탁한다. 기자키의 부탁으로 만난 사람은 후생노동성에서 근무하는 미즈키 쇼코, 마토리 즉 마약 단속관이다. 그녀는 진자이 앞에 신종 합성 약물 알갱이 두 개를 내놓는다. 일명 '스노우 엔젤'이다.

경찰과 마토리와 접점이 없는 인물을 찾던 미즈키는 기자키에게 추천을 받아 진자이를 찾아온 것이고, 스노우 엔젤의 유통업자에게 접근하여 마약조직단의 우두머리인 하쿠류 노보루와 연류된 증거를 확보해달라는 협력을 구한다. 미즈키로부터 가능한 정보를 받은 진자이는 말단 마약 판매상 이사 도모히코를 미행하고 약물 중독자로 위장해 접촉한다. 몇 차례의 만남으로 진자이에게 호의를 보이는 이사는 콤비로 함께 일하자며 운반책을 맡아달라는 제안을 하고, 진자이는 받아들인다.


125.

마치 혼이 육체의 속박을 벗어난 것 같은 부유감. 이 세상이 아닌 다른 어딘가에 와 있는 듯한 비현실감. 신이나 천사를 보았나 싶은 환각, 길고 고된 수행을 계속한 사람만이 도달할 수 있다는 숭고한 경지에 도달했나 싶은 더 없는 행복...... .



이사를 따라다니면서 마약이 일반 서민들에게 깊숙이 퍼져있는 상황을 직접 목격하면서 낙담한 진자이. 어느날 이사는 진자이를 데리고 약물 중독 갱생 시설에 가고, 그곳에서 정부가 약물 중독을 해결하기 위한 근본적인 대책을 마련하고 있지 않음을 깨닫는다. 또한 이사를 통해 마약 시제품은 인체 실험만이 가능하기 때문에 위험이 그대로 노출되어 심각한 상황이라는 사실을 파악한다. 그리고 이사가 '스노우 엔젤' 제조업자와 연결되어 있다는 증거를 확인한다. 한편 진자이는 범죄자를 체포하기 위해 함정수사를 명분으로 일반 시민에게 약물을 파는 자신에게 회의를 느낀다.


184.

아무리 흑막을 검거하기 위해서라지만, 시민에게 위법한 약물을 파는 행위가 정당화될 수 있을까?



이사와 콤비를 이루고 한 달이 넘은 연말 어느날, 진자이를 의심한 이사는 진자이에게 '스노우 엔젤'을 권하고 의심을 피하기 위해 결국 약을 먹게 된다. 더없는 행복, 천국을 경험한 진자이. 그가 깨어나자 이사는 의심을 거두고 '최후의 레시피'에 대한 이야기를 해준다. 이틀 후 진자이는 빼돌린 '스노우 엔젤' 한 알을 미즈키에게 넘기고 그가 약물 후유증이 전혀 없다는 사실에 그녀는 샤로노프 박사의 '최후의 레시피'에 대해 자세하게 설명한다. 만 하루만에 금단현상이 나타난 진자이는 스스로 손목에 수갑을 채우고 수없이 플래시백을 반복한다. 얼마 지나지 않아 드디어 아쿠류의 꼬리를 잡았다. 이에 미즈키 쇼코는 함정수사를 통해 일당을 현장에서 검거하기 위해 엄청난 대사기극을 제안한다.


인체에 무해하지만 완전한 의존물질로써 한 번 복용하면 절대 끊을 수 없으며 사람들의 정신을 마음대로 조종할 수 있는 전설의 마약 '최후의 레시피', '스노우 엔젤'을 독점하는 자는 세상의 왕이 될 수 있다.


진자이의 기시감. 그리고 믿고 싶지 않은 범인의 실체!






수사 도중 과잉방어로 살인을 저지르고 도주한 형사가 9년 후 자신도 모르는 새에 마약 범죄에 이끌리듯 개입되면서 소설은 마지막 반전을 향해 전개된다. 소설은 사이마다 독자가 한 번 쯤 생각해볼 만한 물음표와 메세지를 던져 준다.


비록 도망자 신세로 전락했으나 한때 경찰로서의 소명감을 잃지 않고 있는 진자이는 아무리 범죄를 소탕하기 위해서라지만 시민에게 마약을 팔고 스스로 마약을 복용하는 상황에 갈등하고 회의를 느낀다. 악을 막기 위해 스스로 악인이 되는 것과 같은 연장선에 있다. 이것은 독자에게 던지는 윤리적 딜레마일 것이다.


소설에서 정부는 국가 재정을 위해 보통은 범죄라고 할 수 있는 두 가지를 합법화하려고 한다. 첫 번째는 카지노다. 음지로 흘러드는 돈을 양지로 끌어와 국가 재정에 보탬이 되게 한다는 명분을 가지고 있지만 이는 국민을 대상으로 도박을 합법화한다. 실제로 우리나라에도 합법적인 카지노가 있고, 그로인해 많은 부작용이 발생한 것으로 알고 있다. 도박을 통해 국가의 재정을 보충한다는 설명은 국민을 위해 국가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국가를 위해 국민이 존재한다는 발상을 전제한다. 이러한 논리는 권력자가 국가를 자신과 동일시 하는 굉장히 위험한 셍각이다.


등장인물 이사는 진자이에게 약물 범죄 박멸 방법 세 가지를 알려준다. 첫 번쩨는 교육, 두 번째는 담배 금지, 세 번째는 약물 구매자 엄벌이다. 그리고 약물 중독자에 대한 국가의 근본적인 해결책을 내놓지 않는다는 점을 지적한다. 그러면서 묻는다. 왜일까?


소설의 마지막장은 덮었지만 이대로 끝나지 않는다. 죽음의 문턱에서 겨우 살아난 진자이, 그리고 스치듯 지나가지만 독자의 머릿속에 여운이 남아있는 두 명의 인물들. 파트너를 죽인 범인은 아직 잡지 못했다. 진자이의 수사는 계속 될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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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켄슈타인 - 200주년 기념 풀컬러 일러스트 에디션 아르볼 N클래식
메리 셸리 지음, 데이비드 플런커트 그림, 강수정 옮김 / 아르볼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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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이 되고자했던 인간에 의해 창조된 피조물이 괴물인가, 

괴물을 창조해 낸 오만한 인간이 괴물인가! 



소설은 인간에 의해 창조되고 그 창조자에의 해 버림받은 한 괴물의 이야기다. 작가는 이 괴물의 눈을 통해 인간의 본질과 오류와 부조리에 대해 지적한다.  


괴물이 지켜본 오두막 노인의 일가를 통해 선택된 소수의 이익을 위해 다수의 사람들이 평생을 소모해야하는 사회적 부조리와 눈이 보이지 않는 노인가 괴물의 대화를 통해서 인간의 가식과 허위를 비판한다. 또한 프랑켄슈타인이 갖는 양심의 가책에서 그가 향해야 할 죄책감의 방향은 누구를 향해야 하는가를 독자는 깊이 생각해 봐야 할 것이다. 자신의 오만한 발명으로 가족과 친구의 죽음에 대해서만 향한 가책 뿐만 아니라 피조물에 대한 미안함도 따라야 할 것이다. 


괴물의 외로움을 짐작해 대조해 볼 수 있는 장치는 소설 초반에 시작한다. 북극탐험을 위해 항해하는 월튼은 누나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무엇보다 친구가 없는 외로움을 토로한다. 그에게는 편지를 보낼 누나가 있고,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선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친구가 없음을 가장 아쉬워한다. 하물며 자신이 왜 세상에 존재하고, 어째서 버림을 받았는지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스스로 감정과 사물을 인지하고 습득하면서 외로움을 비롯해 다양한 감정을 알아간다. 괴물이 프랑켄슈인에게 요청한 것은 오직 자신과 흡사한 여자 생명체를 만들어 달라는 것 뿐(이것은 아마도 오두막에서 관찰한 일가의 모습에서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그러나 유년시절 단란한 가정에서 유복한 성장과정을 거친 프랑켄슈타인은 괴물의 감정에 공감하지 못했고, 그가 자신을 찾아오기까지의 과정을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북수에 대한 두려움만 있을 뿐 괴물을 이해하려는 노력조차 하지 않는다. 괴물을 발견하면 가슴에 칼을 꽂아달라는 프랑켄슈타인의 부탁에도 불구하고 월튼이 괴물에게 연민을 갖는 이유는 괴물이 가졌던 공포, 두려움, 외로움 등을 공감했기 때문일 것이다. 괴물은 호소한다. 


300.

모든 인간들이 내게 죄를 저질렀건만 왜 나만이 죄인 취급을 받아야 하는가? 친구를 무례하게 내쫒은 펠릭스는 왜 미워하지 않는 건가? 자기 자식을 구해 준 은인을 죽이려 든 농부는 왜 비난하지 않는 건가? 그래, 그들은 선하고 순결한 존재들이지! 나, 바침하게 버림받은 나는 멸시당하고 쫒겨나고 짓밟히는 실패작이고, 지금도 부당하게 당한 기억을 떠올리면 피가 끓는다. 


이 울부짖음, 낯설지 않다. 
우리 사회에서 죄인이 되어야 하는 이들은 사회적 약자 계층이다. 세상은 하루가 다르게 발전한다고 하지만 억울한 일을 당해도 돈이 없으면 변호사를 구할 수 없고, 부당 해고와 산업재해로 인해 무릎이 꺾이고 멸시를 당하고 외면을 당하는 이들은 늘 그들이다. 


159.
나는 괴물, 인간들이라면 마땅히 도망치고 멀리해야 하는 지상의 오점인 걸까? 

 


현재, 세상은 인공지능 개발로 신인류를 창조를 눈앞에 두고 있다. 인공지능의 발달로 생활은 편리해졌지만, 인간의 존재 가치에 찍는 물음표의 숫자도 더불어 늘어나고 있다. 멀지 않은 시간 안에 가상세계에서 벌어지는 범죄까지 고민해야 하는 시대가 도래할 듯 싶다. 프랑켄슈타인과 그가 창조한 피조물은 현대 인류에게 경종을 울린다. 다가올 세상에 범람할 기계가 복수에 미쳐 날 뛰게 될지, 조화롭게 살아갈지의 여부는 우리의 선택에 따라 달라질 것이다. 


200주년 기념 특별판으로 나온 <프랑켄슈타인, 현대의 프로메테우스>는 무엇보다 삽화가 압도적이다. 이미 메리 셸리의 작품을 읽은 독자라 하더라도 내용의 긴장감을 더해 주는 삽화의 매력을 무사하지 못할 듯 싶다. 








♧ 출판사에서 도서를 지원받아 쓴 지극히 사적인 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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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위트 투스
이언 매큐언 지음, 민승남 옮김 / 문학동네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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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회 주교의 딸로 태어나 유복한 유년시절을 보낸 세리나 프룸은 문학을 전공하고 싶은 자신의 뜻과는 상관없이 어머니의 강요로 케임브리지대학 수학과에 진학한다. 졸업을 얼마 남기지 않은 어느날 남자 친구 제러미의 전공 교수인 역사학 교수 토니 캐닝과 마주치고 그는 교내 학생잡지에 실린 그녀의 글에서 재능을 발견한다. 제러미가 박사과정을 위해 에든버러로 떠난 후 토니와 세리나는 연인 관계로 발전한다. 

 
두 사람의 밀회 장소인 한적한 오두막집에서 세리나는 토니에게 역사와 독서 지도를 받는다. 또한 토니는 그녀에게 매일 신문 읽기를 종용하고 토론하며 보안정보국에 지원을 권유하고 시험을 준비시킨다. 그러나 얼마 후 작은 오해로 인해 두 사람 관계는 끝나고 만다. 토니와 결별하고 준비했던 MI5 면접 시험을 통과해 업무를 시작한 때는 1972년이다. 
 
말단직원으로 허드렛일을 하며 박봉에 시달리는 세리나는 제러미로부터 받은 편지를 통해 토니가 젊은 시절 영국특수작전국 소속이었고 MI5 요원으로 퇴직했으며 세리나와 사귈 당시 암투병 중으로 지금은 사망했다는 소식을 듣는다. 토니는 자신의 모든 것을 수제자에게 남기 듯 세리나를 가르치고 MI5로 인도했다. 그것은 토니가 세리나에게 남긴 유품이었다. 
 
MI5에서 강연이 있는 날, 세리나는 직장에서 친하게 지내는 셜리와 함께 참석하고 강연 도중 셜리가 속어를 써가며 소리를 질렀는데 문제는 강연실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세리나의 행위라고 착각한 것이다. 질책을 예상하고 있는 그녀에게 오히려 임무가 전달되고 셜리와 함께 외부로 파견된다. 그런데 임무라는 것이 고작 청소. 남자 동료들에게 그 일을 시키기 곤란해 파견한 것이라니! 그런데 세리나는 그곳에서 토니와 연관된 단어가 쓰인 신문조각을 발견한다. 그 단어가 토니와 연관있음을 아는 사람은 최근 호감을 갖고 교제를 시작한 맥스 뿐이다. 우연일까? 다음날 상사 해리 탭과 맥스를 포함한 몇 사람이 참석한 가운데 세리나의 면접이 이루어지고 드디어 첫 임무가 주어진다. 
 
지식인들을 후원하고 그들에게 냉전체제에서 자유세계를 옹호하는 글을 쓰게함으로써 IRD의 이념을 세상에 널리 퍼지도록 하는 목표를 가진 작전으로 문학, 특히 소설에 조예가 깊은 세리나를 선발한다. 그들이 지목한 작가는 스물일곱 살의 젊은 소설가 토마스 헤일리. 작전 암호명은 '스위트 투스'다. 그런데 세리나는 친한 동료 셜리의 고백을 통해 그녀가 해고됐다는 사실과 MI5 상부에서 자신을 지속적으로 감시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세리나는 토마스 헤일리의 단편들을 읽으면서 작품에 호감을 느끼고 그를 찾아가 계획대로 지원금 제안을 한다. 톰은 비록 결정하는 데에 있어 시간을 필요로 했지만, 세리나와의 정기적인 만남을 조건으로 제안을 수락한다. 세리나가 톰의 작품에 빠져든 시간보다 더 빠르게 두 사람은 연인이 된다. 타깃과 사랑에 빠진 정부 요원. 두 사람은 한 배를 탔다. 
 
328.
그가 독창적인 목소리와 뛰어난 정신의 소유자라는ㅡ그리고 나의 멋진 연인이라는ㅡ믿음은 부실한 작품 두어편으로 사라지지 않을 터였다. 그는 나의 프로젝트, 나의 일, 나의 임무였다. 그의 예술, 그의 작품, 그리고 우리의 연애는 하나였다. 그가 실패하면 나도 실패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간단했다ㅡ우리는 함께 성공할 것이다.  
 

 
두 사람의 관계는 급속도로 진전하고 세리나는 톰과 정기적으로 시간을 보내면서 사랑이 깊어지자 그를 속인다는 죄책감에 괴로워한다. 사실을 말해야 한다고 다짐하지만 사랑이 끝날 것에 대한 두려움과 임무 완수에 대한 욕구로 갈등을 반복한다.
 
톰은 그의 첫소설로 권위있는 오스틴상을 수상하고 기쁨도 잠시 얼마 후 그가 MI5의 자금을 받았다는 기사가 신문에 보도된다. 그는 졸지에 '좌익 성향에 대해 웅변적으로 회의를 표하는 우익 작가'가 됐으며 예술적 자유에서 구속받은 청렴하지 못한 문화인으로 내몰렸다. 세리나는 이제 해명이나 변명할 기회도 없이 그에게 신분을 들킬 것은 불보듯 훤하다. 그런데 톰이 MI5 자금 지원을 받는다는 사실을 신문사에서는 어떻게 알았을까? 질투에 눈이 먼 맥스? 느닷없이 나타난 셜리? 그것도 아니면 뜬금없이 편지를 보내온 제러미? 설상가상으로 상부에서는 이 상황을 문제 삼을 뿐만 아니라 세리나가 의도적으로 애인인 톰을 선정하도록 했다는 의심까지 받고 있다. 그녀는 벼랑 끝에 몰렸다. 그러나 세리나의 위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그리고 톰이 세리나에게 보내는 장문의 편지와 반전! 
 
 





시간적 배경이 되는 1972년 영국은 대내적으로는 북아일랜드 분쟁, 노동자와 자본가의 갈등이 심각했고 대외적으로는 냉전체제 하에서 첩보 전쟁이 한창이었다. 세계대전 이후 최대 강국으로 자리잡은 구 소련과 미국이 문화를 자국의 홍보로 이용하기 위해 경제적 지원을 아끼지 않자 이에 질세라 영국도 그 흐름에 뛰어든다. 소설 '스위트 투스'는 이러한 배경으로 전개 된다. 첩보물이라는 흥미로운 요소와 사랑 이야기, 그리고 마지막 반전은 앞서 달려온 500여쪽이 아깝지 않다.  
 
이 소설에서 흥미로운 점은 소설가 톰 헤일리가 쓴 단편들이다. 소설 속의 소설이라고 할 수 있는 초단편 소설들은 당시 여성들의 사회적 위치와 가부장제 아래에서 가지는 허무에 대한 부분들을 만날 수 있는데, 이것은 세리나가 그의 소설에 호감을 느끼는 이유가 되고 여성의 심리를 여성이 되어 써내려간 장치들이 소설 후반부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지 알게 되면 독자들은 저도 모르게 짧은 감탄사를 내뱉게 될 것이다. 
 
마지막 반전만큼 마음을 건드렸던 부분은 토니가 죽은 후 한참이 지나서 세리나에게 전달된 길지 않은 편지였다. 아마 내가 그 편지를 받았다면 소리내어 엉엉 울어버렸을지도 모르겠다. 이 소설은 배경이 어떻든 사랑 이야기다. 너무나 순수했던 첨보원과 첨보원보다 더 치밀했던 소설가의 사랑 말이다.



♧ 출판사에서 지원받아 쓴 지극히 사적인 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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팬데믹 : 여섯 개의 세계
김초엽 외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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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코로나19의 급진적인 확산으로 인류는 재난영화 한가운데에 서있다. 마스크와 소독제는 필수품이 되어버렸고 최대한 접촉을 삼가하며 학교는 온라인 수업으로 전환했다. 반가운 사람과 만나도 악수와 가벼운 포옹조차 결례가 되어버린 세상. 최소한의 인간성마저 놓쳐버릴 수 있는 위기와 마스크를 비롯한 일회용품의 증가로 환경오염에 대한 우려는 극에 달하고 있다. 이 상태가 지속된다면 7.5년 후 코로나가 아니더라도 인류는 지구 온난화로 소설에 등장하는 재난을 감수해야 할 것이다. 
  

 
 
Apocalypse 끝과 시작 
 
먼 행성계에서 발견된 의문의 우주 거주구 3420ED에 탐사하러 갔던 '나'는 1천년 이상 지난 인공구조물과 현재에도 뒤지지 않는 뛰어난 기술 문명을 보유한 곳으로 보이며 유기물 한 줌 없는 그곳에서 기계들에게 붙잡힌다. 기계들의 리더 셀은 '나'를, 자신들을 구출하러 온 라이오니라고 믿는다. '나'는 다른 기계들을 통해 3420ED는 월등한 생명공학 기술을 보유한 불멸의 도시로 자신들의 건강한 복제를 계속해서 생산하고 교체하는 방식으로 외부와는 단절한 채 수백 년간 번영했던 곳임을 알게된다. '나' 역시 주형 복제 시스템을 통해 태어난 로몬이다.
(최후의 라이오니 / 김초엽)
 
생명체가 살 수 있는 대륙은 없고, 살 수 있는 곳이라고는 두 대륙 사이의 여명 지대 뿐인 행성에서 고래라고 이름붙인 거대한 동물만이 육지를 대신하고 있다. 감염을 두려워해 서로가 이방인을 받아주지 않던 차에 떠내려온 다른 고래의 등에 올라타 탐사를 하던 세 사람은 예상치 못한 사고로 고립되고 표류한다. 그들의 눈 앞에 나타난 빙산에 내리고 그곳에서 처음 이 행성에 도착한 조상의 시신과 용품들을 발견한다. 이제 화자는 희망을 부여잡고 자신의 글을 미래의 후대가 읽어주기를 바라며 펜을 잡는다.
(죽은 고래에서 온 사람들 / 듀나) 
 
31.
죽음에 기생하여 생명을 이어가는 삶의 방식. 
 
35.
공포와 불안이 퍼지자 질병보다 빠르게 그들을 죽이기 시작한 것은 그들 자신이었다. (...) 폭력은 감염병보다 빠르게 전파되었다. 

 
 
 
 
Contagion 전염의 충격 
 
코로나 확산으로 더이상 서울에서 살 수 없게 된 사람들은 무작정 시골로 향한다. 그 대열에 마지막으로 합류한 미정은 걸어걸어 여주에 도착하고 어느 상가 건물에서 은색이 찬란한 작은 스테인레스 상자를 주워 가방에 넣은 후 그 건물에서 잠이 든다. 이후 잠이 들고 눈을 뜰 때 마다 시간은 거꾸로 흐르고 있다. 더이상 만날 수 없는 유경을 다시 만나다니... .
(미정의 상자 / 정소연) 
 
전염병이 창궐하고 팬데믹 체제로 변한 도시. 항체 미보유자는 출입이 제한적이기 때문에 국가에서 지원하는 식량을 배급받는다. 이 배급을 맡은 이들은 항체를 보유한 자원 봉사자다. 감염으로 의식이 돌아오지 않으면 안락사 후 화장시켜 가족에게 돌려보낸다. 빈 집은 계속 늘어나고 황폐해진 도시는 도둑조차 없다.
(그 상자 / 김이환) 
 
  
 
 New Normal 다시 만난 세계 

 
세상은 전염병과 지구 환경 오염으로 인해 새로운 체제로 구축되었다. 
 
동료와 함께 하는 가벼운 술 한잔의 여유는 사회적 거리두기가 대신하고 식사는 언감생심 있을 수도 없는 일이다. 문자 표기법이 바뀌고 우리가 소소한 행복으로 여겼던 평범한 행위들이 역사로 남게 되었다. 후대는 이러한 역사를 불편해 한다.
(차카타파의 열망으로 / 배명훈) 
 
언콘택트 시대. 태아를 배양해 아이를 낳고, 연애도, 산책도, 가족과의 만남도 온라인 가상 세계에서 실현한다. 전염병과 지구 온난화로 예측할 수 없는 이상 기후와 자연현상 등으로 바깥 세상은 위험천만이다. 인류는 스스로를 감옥에 가둔다.
(벌레 폭풍 / 이종산)  
 
195.
당신은 오랫동안 모범적인 수감 생활을 했기에 사면되었습니다. 축하합니다.










이 소설집을 2년 전에 만났다면 별 생각없이 읽었을 것이다. 그러나 코로나19 창궐로 이제 재난 소설은 더이상 소설이 아닌 상황이 되었다. 무엇보다 네 편의 소설은 지금 당장 현실에 대입해도 전혀 어색함이 없을만큼, 그리고 예언서처럼 읽힌다. 집 앞에 놓인 비대면 배달 음식을 먹고, 온라인으로 연애하고, 가상 세계를 현실 세계화 하고접촉을 죄악인양 끔찍해하며 문자 표기는 점점 최소화한다. 탄생에 대한 축복도 없고, 망자에 대한 애도도 없다. 인공지능이 늘 곁에서 다역을 맡아 주고 있으니 친구도, 가족도 필요 없다. 이 허구의 이야기들이 점점 더 현실적으로 와 닿는다는 사실이 두렵고 슬프다.  
 
빙산에 갇혀서 희망을 써내려가는 소녀, 연인과 결혼하기 위해 두려움을 극복하고 문 밖으로 나오는 포포처럼 우리가 지금보다 더 인간다워지기를 간절히 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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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만히 부르는 이름
임경선 지음 / 한겨레출판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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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설계사무소에서 일하는 수진은, 집은 사람이 살고 이야기가 켜켜이 쌓여가고 정다운 사람이 둘러앉아 함께 음식을 먹는 장소라고 생각한다. 처음 보는 사람에게 스스럼없이 말을 건네고 상대방이 필요로 하는 도움을 자연스럽게 내미는 단정한 사람이다. 
 
어느 일요일, 사무실에 출근하면서 회사 건물의 조경을 맡은 한솔에게 작은 배려를 하게 되고 그날 이후 한솔은 수진에게 수줍은 사랑 고백을 시작으로 자신의 마음을 진솔하게 담은 이메일을 보내면서 경계심이라고는 전혀 없는 어린아이처럼 한걸음씩 다가온다. 과거 자신이 혁범에게 그랬던 것처럼.
 
오로지 사랑 하나만을 바라보며 직진하는 맑은 한솔을 보면서, 혁범을 향했던 예전의 자신을 떠올리는 수진. 가만히 짚어보니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한솔의 나이가 몇 년전 혁범을 바라보던 그때 자신의 나이와 같은 스물여덟 살. 수진은 한솔을 통해 혁범과의 관계를 새삼 돌아보게 된다.  
 
부족함 없는 환경에서 잘 성장해 자기 삶에 대한 기본 방침이 정해져 있으며 기본적으로 책임 의식이 강하고 관대한, 그야말로 어른스러운 사람이 혁범이다. 7년 전, 수진은 근무하던 설계 회사에서 사수였던 혁범을 마음에 담았으나 고백도 해 보기 전에 그는 다른 사람과 결혼했고, 그 아픔을 견디기 어려워 유학을 다녀온 후 그가 이혼해 건축 설계 사무소 개업 준비를 한다는 말에 먼저 연락해서 현재는 혁범이 공동대표로 있는 회사에서 일하고 있다. 이제 수진은 혁범을 짝사랑했을 당시 혁범의 나이가 되어 있고, 두 사람은 연인이다. 그러나 모든 것을 혼자 감당하려는 혁범의 성정으로 수진은 함께 있어도 외롭다. 
 
혁범이 자신의 책임을 다하기 위해 자리를 비우는 시간이 많아지고 그럴 때마다 혼자 보내는 수진의 시간에 어느날부터 한솔이 들어와 있고, 오롯이 자신만을 향해 있는 한솔의 무채색같은 순수한 마음에 수진은 흔들린다. 그러나 수진도, 한솔도 안다. 수진의 마음이 한솔을 향하지 않고 있다는 것을, 한솔을 통해 다른 사람을 보고 있다는 것을. 그리고 누구보다도 한솔의 마음을 잘 알기에 수진은 마음이 아프고 죄책감을 느낀다.  
 




 
 
사랑.
누구도 쉽게 정의내릴 수 없고, 단정할 수 없는 수만가지의 색깔을 가진 감정. 그래서 인류 탄생이래 끝없이 반복되며 인간을 울고 웃게 만드는, 그리하며 수많은 분야에서 지치지도 않고 소재로 이용되는 복잡미묘한 그것. 
 
우리는 수진, 한솔, 혁범이 겪은 사랑을 한 번쯤은 경험해 봤을 것이다. 누군가를 맹목적으로 순수하게 사랑하고, 사랑이 끝날때마다 조금씩 노련해져 어느새 누구의 사랑이 더 깊은가를 저울질하게 되며, 노련함을 발휘하지 못하면 주변에서는 철부지로 치부해버린다.  
 
수진은 처음 혁범을 선배로서, 직업인으로서, 인격적으로 그를 존경하고 사랑했다. 그의 말에 한치의 의심도 없이. 그런데 서른다섯 살 현재, 이혼하고 아이와의 시간을 보내는 그를 보면서 그의 말이 정말 다 사실인지 의문을 갖는다. 우리는 사랑을 하면서 시간이 지날수록 곁에 있는 사랑에 대해 당연하게 여긴다. 일심동체, 이심전심이라는 말로 같은 생각, 같은 마음일 거라고 넘겨짚고 아이러니하게도 가장 사랑하기 때문에 우선 순위에서 밀어놓는다. 익숙함과 편안함을 지루함으로 여기며 가슴 뛰는 설레임만이 사랑이라고 착각한다. 사람은 왜, 상대를 지속적으로 신뢰하지 못하고 무언가를 끊임없이 요구하며 새로운 상대를 찾아다닐까?  
 
요즘에는 사랑도 사치인 세상이다. 돈이 없으면 연애도 할 수 없다는 말, 참 씁쓸하다.  작가는 '온 마음을 다해 누군가를 사랑하는 어떤 진심을 이야기하고 싶었다. 하물며 겁도 없이 다가서고, 계산 없이 이해하고, 상처를 온몸으로 떠안는 그런 한치의 주저함도 없는 투명한 사랑'이 필요한 시대라고 이야기하며 '진정한 어른의 사랑이란 그러한 어린 아이의 마음으로 사랑하는 일임을 갈수록 확신하게'된다고 말한다. 
 
상대가 나이듦을 지켜봐주고, 내가 기쁜 일에 사심없이 기뻐해주고, 한때 느꼈던 강렬한 빛은 더이상 없지만 그 특별함이 평범함으로 바뀌는 모습에 안도하는, 그리고 이전까지 볼 수 없었던 상대의 모습을 발견하면서 신기해하는, 그리고 아주 가끔 지금보다는 더 젊었던 시절 저돌적이고 맹목적으로 누군가를 사랑했던 자신과 그런 자신을 닮은 누군가를 떠올리며 감사해하고 다독거릴 수 있는 그런 잔잔한 사랑이 아름답다. 그들처럼.  
 
소설을 덮으면서 내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내가 여전히 당신을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종종 삶에 찾아오는 위기마다 손을 놓지 않는, 놓을 수 없는 그대들이 있어 참 다행이고 또 다행이라고 되뇌인다.




♧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쓴 지극히 사적인 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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