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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다리 걷어차기 - 앞선 나라는 따라잡고 뒤쫓는 나라는 따돌리던 선진국 경제 발전 신화 속에 감춰진 은밀한 역사
장하준 지음, 김희정 옮김 / 부키 / 2020년 8월
평점 :
현재 선진국들이 어떠한 과정을 거쳐 선진국이 되었는지 역사적 사실에 기초해 학술한 책으로 경제 순환 논리의 이면과 실제 국제 경제가 작동하는 원리, 그리고 선진국들이 주장하는 부자되기 방식의 허점 등을 설명하고 있다. 역사적 관점에서 본 산업 무역 기술 정책, 바람직한 통치 체제를 들여다봄으로써 현대를 사는 우리가 바람직한 경제 발전에 대한 고찰을 해볼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선진국은 현재 그들이 개발도상국에게 권하는 정책과 제도를 통해 부자가 된 것이 아니다. 그들은 경제 강대국의 위치에 서는 과정 동안 철저한 보호개입정치를 거쳤다. 저자는 19세기 독일 경제학자 리스트의 주장을 들어 산업 개발 정도가 비슷한 수준에 있는 나라들끼리는 자유 무역이 도움이 되지만, 개발 수준이 다른 나라들 사이에서는 그렇지 않다고 이야기 한다. 현재 신자유주의를 대표하는 미국도 1세기 동안 보호주의를 거쳐 최강의 산업 국가로 성장했다.
이 책은 주로 19세기와 20세기 초의 역사를 가져와 그들이 산업 국가로 발돋움하는 데 정치.사회적 배경을 들어 선진국의 '사다리 걷어차기'가 무엇인지, 그래서 현재 개발도상국가들이, 왜 이면을 보아야하고 무조건적으로 맹신하면 안되는지를 짚어낸다.
영국이 산업화 과정에서 자유방임주의로 가기 전까지 강력하게 사용한 도구는 보호 관세였다. 그리고 식민지를 활발하게 이용하면서도 식민지의 상품이 우월해서 자국의 산업을 위협할 소지가 있으면 그 제품의 수입을 금했다. 내수 시장이 단단하지 않으면 무역 시장의 문을 열지 않았다는 것이다. 미국 또한 영국과 전쟁을 치르면서 자연스럽게 보호주의 정책을 강화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고, 독일은 보호 관세, 독점 허용 등 일반적인 방법과 더불어 정부가 주요 산업 분야에 적극적으로 관여했다. 프랑스는 앞선 나라들을 따라잡기 위해 뒤늦은 1960년대 후반까지 정부가 적극적으로 경제에 개입하면서 매우 성공적인 구조 개혁을 달성했다. 이외에도 스웨덴, 네덜란드, 스위스 등의 나라들을 살펴보아도 유사한 선상에 있다.
이를 통해 한 국가가 따라잡기 단계에 있을 때에는 유치 산업을 보호하고 앞선 국가의 기술과 인력을 빼돌리고 정부가 시장에 관여하다가, 산업 선진국 대열에 오른 다음에는 자유 무역을 옹호하고 자국의 숙련 기술자들과 기술이 국외로 유출되는 것을 막는 한편 특허권과 상품권을 강력하게 보호하는 정책을 펴기 시작했다. 이는 대부분 선진국들의 공통된 과정이다. 그들은 너나할 것 없이 선진국 대열에 올라서면 가차없이 사다리를 걷어차 뒤를 따라가는 개발도상국들이 올라오지 못하게 한다. 그야말로 '사다리 걷어차기'다.
결과적으로 우리가 알아야 할 점은 경제가 어려울수록 내수 시장에 신경을 써야 한다는 것이다. 이에 대한 예시로 대표할 수 있는 것은 식량이다. 우리나라 식량 자급율은 30%를 넘지 못한다. 그런데 만약 시장을 자유방임으로 일관하다가 외국에서 보호정책으로 돌아서면 우리나라는 당장 식량 부족 사태가 발생하고 만다. 이것은 단순하면서도 가장 기초적이 예시일 뿐이다. 많은 수출을 일으켜 속 빈 강정으로 성장 그래프만 높일 것이 아니라 성장의 질을 다져야 한다.

2004년 초판이 나왔을 당시 서문에서 저자는 전 세계를 휩쓸고 있는 세계화 물결 속에서 개발도상국이 진정한 경제 발전을 하기 위해 사용해야 할 정책과 제도에 관해, 그리고 그것을 제대로 쓸 수 있으려면 신자유주의적 국제 경제 질서는 어떤 식으로 바뀌어야 하는지를 모색하기 위해서 쓴 책이었다고 밝혔다. 그런데 인류는 신자유주의만큼이나 급박한 상황에 놓여있다.
2020년 현재, 전세계적으로 코로나19 위기가 언제 종식될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사회와 경제가 어떤 방식으로 재편할지는 예측하기 어렵다. 분명한 것은 포스트코로나 시대에 많은 것이 변한다는 점이다.
불평등과 사회 갈등을 조장했음에도 신자유주의를 옹호했던 유일한 이유는 경제 성장이었다. 그러나 2010년을 전후로 시작된 경제 침체가 계속되면서 신자유주의의 한계는 분명하게 드러났다. 이제 세계는 열강국의 강요에 따라 유지되어 온 신자유주의 체제가 코로나 사태를 통해 새로운 패러다임을 요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번 위기를 겪으면서 잘 조직되고 투명한 정부의 개입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보여 주었고, 국가의 역할에 대한 고정관념이 많이 깨졌으며 인류에게 진정으로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새삼 깨닫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사회구성원이 공동 운명체라는 연대의식을 함양하고, 무엇보다 선진국에 대한 환상이 얼마나 허약한지에 대해서도 확인하는 기회가 주어졌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알아야 하고, 무엇을 해야 할까?
저자는 선진국들의 개발 역사에 대한 정확한 사실을 알아야 한다. 이는 개발도상국들이 자국에 맞는 정책과 제도를 선택할 수 있게 할 뿐만 아니라 역사를 바로 잡을 수 있다. 내수 시장을 단단하게 구축하고, 제도의 질을 개선해야 함과 동시에 개선은 오랜 시간이 걸리는 과정이라는 사실을 인지하면서 참을성을 가지고 지켜봐야 한다. 따라서 바람직한 제도가 자리잡기 위해서는 바람직한 정책이 겸비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또한 현재 선진국과 국제 개발 정책 주도 세력이 추구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방식의 국제 개발 정책 입안의 필요성을 주장한다.
신자유주의를 지양하는 입장에서 이 책은 나에게 신자유주의의 이해를 높이는 데에 명확한 근거를 제시해 주었다. 모든 정치.경제.사회는 역사와 무관할 수 없다. 바른 역사 인식이 현재의 경제 상황을 이해하고 판단할 수 있게 해준다. 바꿔 말하면 국제 경제에서 정확한 명분을 확보하고 이해를 높이기 위해서는 역사를 바로 세워야 한다. 이 책을 읽어야 하는 이유가 되겠다.
♤ 출판사에서 도서를 지원받아 쓴 지극히 사적인 리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