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들이 모조리 사라진다면
리처드 파워스 지음, 이수현 옮김, 해도연 감수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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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은 아스퍼거 증후군, 강박장애, ADHD를 진단받고, 더하여 엄마를 잃은 후 외상 후 장애를 겪고 있는 소년과 홀로 아이를 양육하는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넘어서 동물권활동가인 얼리사, 우주생물학자 시오를 통해 인류가 지향해야 할 바를 따뜻하고 설득력있게 써내려갔다. 지난 역사 안에서 이루어진 과오가 현재를 살고 있는 우리에게 미치는 영향과 지금의 지구를 차지하고 있는 우리가 공존과 연대 의식을 통해 지켜내야할 것이 무엇인지를 여러 지점에서 얘기한다.  


책을 읽다보니 로빈이 또래 아이들에게 괴롭힘을 당하는 이유를 알 것 같다(이 말이 그럴만하다는 의미가 아니다). 대부분의 아홉 살 아이들에게서 로빈처럼 한 분야에 깊이 파고드는 경우는 보기 힘들다. 더구나 인간이 약간이나마 양보(라는 표현도 적절하지 않지만)해서 동물들과 공존해야 한다는 것을 실질적으로 받아들이지 못한다. 왜냐하면 학교에서의 배움을 통해 지식적으로는 이해하지만, 가정이나 여타 사회 활동에서 이를 실천하는 어른을 만나기는 극히 드물기 때문이다. 수업 시간에 세계 시민, 민주 시민 교육을 받은 후 그 교실에서 학교폭력이 자행되는 사태는 아이가 아닌 어른들이 가져야할 경각심이다.  










독자는 이 소설을 출판사의 소개글처럼 '세상에 상처받은 연약한 소년이 자신만의 언어로 펼쳐 나가는 무해한 사랑과 순수한 저항의 여정'의 감동 스토리로만 끝내면 곤란하다. 세상의 편견으로부터 이해받지 못하고, 차별적 폭력으로 인해 소외됨에도 불구하고 괜찮아질 수 있다는 말과 함께 멸종 위기종 동물 그림을 그리고 팔아서 NGO 단체에 기부하겠다는 아홉 살 소년 로빈, 열다섯 살에 기후 변화 대책 마련을 촉구하기 위해 1인 시위를 벌인 그레타 툰베리. 우리가 이 아이들 앞에서 얼마나 더 부끄러워져야하는지. 


우리가 걱정스러워해야 할 것은 공감 능력이 커 대부분의 사람들보다 일상이 어려운 로빈보다 혐오가 난무하는 세상에 무감한 '대부분'의 부류에 속한 우리들이다. 후자의 '우리들'이 변하면 전자의 개인에게 벌어지는 문제는 많은 부분 해결될 것이다.   


ㅡ 


로빈은 아홉 살이다. 스스로 1인 시위, 홈스쿨링을 결정하고 그 방법까지 찾아내 보호자를 설득하고 실행한다. 현실적으로 채 열 살이 되지 않은 아이가 이러한 자발적 결정과 행동이 가능할까라는 생각을 하다가 문득, 우리 어른들이 그 선택과 결정의 권리를 박탈한 것은 아닐까라는 데에 생각이 미쳤다. 경험을 무기로 빠르고 정확하다는 명분으로 아이들의 권리를 침해해 그들의 인생을 제멋대로 설계하고 있는 건 아닌가라는 생각 말이다. 


로빈은 '모든 지성체가 불필요한 고통에서 해방되기를' 바란다는 어느 경전의 말을, '살아 있는 모든 것들이, 우리에게서 해방되기를' 바란다로 바꿔 말한다. 여기서 '우리'란 인간일 것이다. 그러나 인간조차 인간에게서 해방되지 못하기에 모든 생명체는 행방하기가 요원하다. 


죽고 죽이는 것에 무감한 지구가 아닌 다른 행성에서 살고 싶다는 로빈이 차디 찬 물속으로 걸어들어간 것은 다른 행성으로 가는 또다른 방편이었을까. 강박장애를 앓고 있는 아홉 살 소년이 그러거나 말거나 세상은 변함없이 사건.사고가 끊이지 않고, 어떤 생명체의 희생을 담보로 유지된다.   


로빈의 한 마디 한 마디가 따뜻한 감동이기에 앞서 유리못처럼 가슴에 박혀 지워지지 않았다. 아마도 로빈이 분노하고 절망하는 것들에 대한 원인에 나 역시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일 것이다. 이 소설은 우리가 어떠한 경각심을 가지기 이전에 무척 슬프고 아프다.  




# 출판사 지원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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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이사르의 여자들 3 - 4부 마스터스 오브 로마 4
콜린 매컬로 지음, 강선재 외 옮김 / 교유서가 / 201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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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노나이 이전에 로마에 도착하기 위해 카이사르는 바닷길을 선택했고, 짐과 인력을 최소화했으며, 모든 결정을 신속하게 처리했다. 카이사르에게 주어진 시간은 열이틀, 그는 기적적으로 그안에 오스티아 항에 도착해 마스르 평원에서 폼페이우스와 만나 원로원 상황을 듣고, 자신의 부재 중 집정관 출마 요청은 크라수스에게 부탁한다. 


카이사르가 폼페이우스와 연합할 것이기에 폼페이우스가 그의 부재 중 집정관 출마 요청을 할 것이라고 예상한 원로원은 그 둘을 물어뜯기 위해 이를 갈고 있었는데, 엉뚱하게도 이 발언이 크라수스에게서 나온다. 이 요청의 합당성을 논리적으로 설득한 크라수스 덕분에(그가 로마 정통 귀족이라는 이유가 더 컸겠지만) 무난히 동의를 얻는 듯 했으나, 카토가 카이사르의 여성편력과 사치를 빗대어 도덕성 부재를 빌미로 일장 연설을 하면서 의사진행 방해를 의도한 탓에 부재 중 출마는 불가능해졌다. 카이사르는 집정관 출마를 위해 개선식을 포기하기로 결정한다. 크라수스는 임페리움이라는 명예의 희생을 안타까워하지만, 카이사르는 전해 괘념치 않는다. 어차피 자신에게는 앞으로 수많은 개선식이 기다리고 있을테니까.   


카이사르는  이미 지나간 개선식을 아쉬워할 여력이 없다. 원로원 내 예상치 못했던 자들이 적으로 돌아섰고, 보니파는 자기들 사람을 당선시키기 위해 뇌물을 쓸 터였고 완고한 카토는 카이사르를 제거하기 위해서라면 이를 모른 체 할 것이었다. 그리고 수석 집정관으로 당선된다고 해도 정적인 비불루스를 감당해야 했고, 그들은 차후에 내년 집정관들에게 속주를 주지 않기로 결의할 것이다. 카이사르에게는 당선까지의 길도, 당선 후의 길도 평탄하지 않을 전망이다.  




이유가 어쨌든 카이사르의 여성 편력은 문제가 될만하다. 아무리 공과 사를 구분해야 한다고 하지만, 정치든 행정이든 사람이 하는 일이니 사적인 감정이 전혀 개입하지 않을 수 없다.  


로마에서 개선식은 군단 경험을 한 남성이라면 누가나 염원하는 최고의 명예다. 이는 군인, 시민, 동료 등 모든 로마 제국 시민에게 임페리움으로서 인정받는, 집정관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이를 과감하게 포기한 것도 대단하지만, 앞으로 무수한 개선식을 할 거라는 장담도 그가 어느 정도의 자신감으로 무장된 사람인지 알 수 있게 하는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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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이사르의 여자들 3 - 4부 마스터스 오브 로마 4
콜린 매컬로 지음, 강선재 외 옮김 / 교유서가 / 201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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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전 60년 5월, 로마는 보니파가 실권을 쥐었고, 로마는 와해되고 있다. 


징세청부업자는 폼페이우스의 동방 속주 네 곳에서 가져온 막대한 전리품을 보고 터무니없는 조건으로 입찰을 계약하고, 감찰관들은 최고 액수를 써낸 입찰자들을 선택했다. 그런데 문제는 징세청부업자들이 예측한 것보다 전리품의 값어치가 낮았고, 동방 속주들은 청부업자들이 아무리 독촉해도 그들이 요구하는 금액을 지불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결국 징수업자들은 크라수스를 찾아가 동방의 세금 징수 계약들을 취소하고, 적정한 금액의 새 계약을 감찰관들이 내놓도록 지시하는 청원을 넣어달라고 부탁한다. 크라수스는 그들의 부탁대로 원로원에 청원을 했으나 보니파의 반대로 인해 불가능해졌다. 그러나 원로원이 크라수스의 요청을 거절하자 징세청부업자들이 보복으로 국고에 돈을 한 푼도 내지 않는 통에 원로원과 기사 계급의 힘싸움이 교착상태에 놓여 있었다.  


보니파가 파괴적으로 변한 이유는 카툴루스의 죽음 때문이다. 그가 죽은 후 보니파가 비불루스와 카토의 손아귀에 떨어졌으니 두 사람의 성정을 떠올려보면 어떤 상황인지 그림이 그려진다.  


원로원은 카이사르가 속주에서 부당취득이나 횡령을 저지르는지 감시하지만, 흠집낼 꼬투리가 없다. 먼 히스파니아 속주민들은 자기들의 총독이 공정하게 관리해주는 것에 대해 감사하고 있으며, 이 소식은 원로원에 그대로 전해졌다. 의사당에서 카이사르의 처신은 총독들의 교범 감으로 치하되고 있고, 온 로마는 그가 수석 집정관이 될 거라고 생각한다.  


원로원 보니파는 카이사르가 다음해 집정관 선거에 출마를 불가능하게 만들기 위해 법안을 바꾸고, 더하여 인심쓰듯 카이사르에게 개선식을 권하면서, 그 날짜를 집정관 후보 등록 사무소 폐쇄일의 8일 후로 정하고 부재중 출마를 불가하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결국 집정관 후보가 되기 위해서는 본인이 직접 와야하고, 개선식을 앞둔 사령관은 개선식 전에 로마로 들어올 수 없는 법을 악용한 것이다. 이 편지를 5월 중순에 받은 카이사르는 집정관 출마를 위해 그 먼 히스파니아에서 6월 5일 이전에 도착해야 한다.  



항상 느끼는 거지만, 법을 입안하고 통과시키는 게 떡 구워먹듯 손쉬운 건지. 스스로를 마그누스라고 칭하는 천하의 폼페이우스도 어쩔 수 없다. 막무가내로 밀고 나가는 것도 한계가 있으니... . 그나저나 나는 카토를 글로만 만나는 데에도 벽을 바라보고 있는 것 같은데, 당시 사람들은 어땠을지 짐작이 간다. 물론 그 우직함이 존경스럽기도 하고, 그의 최후를 떠올리면 독이지 싶기도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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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인의 초상 - 하 열린책들 세계문학 231
헨리 제임스 지음, 정상준 옮김 / 열린책들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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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본이나 희귀본을 좋아하는 길버트 오즈먼드는 영국 귀족의 원본이라고 할 수 있는 워버턴의 청혼을 거절한 이사벨의 태도를 희귀본으로 여기며 그녀가 자신과 결혼할 자격이 있다는 생각으로 자부심을 느낀다. 오즈먼드는 이사벨의 유산을 탐내는 것도 모자라 그녀를 자기의 수집품으로 여기는 것이다.  


이사벨은 길버트가 가난하지만 숭고한 영혼의 소유자라고 믿으며 약혼한다. 그러나 길버트와 마담 멀이 이 결혼에 어떤 목적을 가지고 있는지 이사벨 본인을 제외한 모든 사람은 알고 있다. 이에 대한 리디아의 충고가 명쾌하다. 오즈먼드가 돈을 갖기를 바란다면 그에게 돈을 주고 결혼은 다른 사람과 하라고.  


결혼이라는 새장에 갇혀도 자신이 그 새장을좋아한다면 상관없다는 이사벨의 말은 자유를 소중하게 여긴 1년 전과는 사뭇 다르다. 랠프에게 일 년 동안 세상을 많이 둘러보았고 세상이 아주 유혹적인 광활한 공간처럼 느껴지지 않는다고 말하자 그는 이사벨이 좀더 세상을 두루 살펴보기를 바라지만, 그녀는 그의 말을 간과한다.  



이사벨은 여자에게 있어서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과 결혼하는 것은 그 무엇보다 숭고한 일이라고 말하고, 주변에 있는 사람들 모두 자기가 돈 많은 남자와 결혼하기를 바란다고 오해한다. 혹시 이사벨은 복권 당첨처럼 받게 된 유산에 대한 부담감으로 더 오즈먼드와 결혼하려는 것일까? 아니면 자기는 속물이 아님을 무의식적으로 증명하고자 하는 것일까? 


랠프는 오즈먼드와 약혼하는 것을 이사벨의 추락이라고 표현하는데, 이쯤되면 독자를 포함한, 마담 멀과 오즈먼드 본인을 제외한 대부분 등장인물들이 궁금해 하는 것은 '이사벨은 왜 오즈먼드와 결혼했는가?"이다. 이 소설의 줄거리가 간단 명료함에도 천 쪽이 넘는 분량을 차지하는 이유는 주요 등장인물의 복잡한 심리 때문이다. 자유를 갈망하지만 한편으로는 보수적인 귀족 사회에 대한 동경을 뿌리치지 못하고, 돈과 명예에 급급한 결혼을 하지 않겠다는 자신의 소신을 내세워 나름 괜찮은(?) 남자들의 청혼을 거절했으나, 자격이 없는 처지에 유산을 상속받은 것에 대한 양심의 가책과 불편함 때문에 가난하지만 고귀한 영혼을 소유한 심미주의자를 사랑한다고 착각해 사기꾼과 다름없는 인간과 결혼한 후 배우자의 본질과 민낯을 확인하고 모든 이의 반대를 물리치고 꾸린 가정을 지키기 위해 자신을 어디까지 내려놓아야할지 자괴감에 빠진 이사벨의 심리는 그야말로 꼬일대로 꼬여 복잡하기 그지없다.   


또한 이사벨을 잊지 못해 나이 차가 스무 살이 넘는 그녀의 의붓딸고 결혼하겠다는 워버턴(당신이 페드로도 아니고, 무슨!)의 마음도 그렇고, 이사벨을 돕겠다고 내뱉는 말마다 오히려 그녀에게 상처만 더해주고 있어 착잡하지만 그렇다고 마냥 두고만 볼 수 없는 랠프의 심경도 이해가 된다. 독자 역시 19세기 당시의 사회적 상황을 고려해보면 옳고 그름을 단정지어 판단하기가 쉽지 않다(오즈먼드가 아주 나쁜 놈인 건 분명하다). 이처럼 소설은 인물마다 제각각 처한 상황과 입장에 따라서 보이는 저마다의 심리를 굉장히 면밀하고 섬세하게 그려낸다 



개인적으로 이 소설에서 내내 불편한 점은 이사벨의 자책이다. 이사벨은 간혹 자기의 결혼에 마담 멀이 아니었다면 일어나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을 하다가도 그 결혼의 결과가 어떻든 그 책임은 자신에게 있음을 스스로에게 각인시킨다. 더하여 결혼 생활이 불행해진다면 적어도 그 원인이 자기의 잘못이 아니어야한다는 강박이 있다. 그녀는 독자적이고, 더 독자적인 사람이 되고 싶어했던 여성이었고, 오즈먼드는 독립성을 여성의 미덕으로 여기지 않는 사람이었다. 이사벨은 이러한 자기 본연의 모습을 오즈먼드에게 온전히 보여주지 않았기 때문에 그를 속인 것은 자신이라고 자책한다. 과분한 유산에 대한 부담감을 가난하지만 고귀한 사람에게 양도하는 것으로서 양심을 가볍게 하고 싶었다는, 그래서 오즈먼드에게 자선을 베풀고 싶었다는 이사벨의 말은 납득하기 어렵다. 그녀의 방식으로 우아해지기 위해서 오즈먼드와 결혼했고, 이것이 이사벨이 그와 결혼한 절반의 이유다. 


길버트는 아내에게 난폭하지도, 잔인하지도 않았으나 온전히 복종하지 않는 이사벨을 미워했다. 이사벨은 오즈먼드가 도덕적인 사람이라고 믿었지만, 그는 교묘하게 이사벨을 앞세워 도덕성과는 거리가 먼, 탐욕과 오만함으로 치장하고 있는 사람이다. 결혼을 하고나서야 이사벨은 오즈먼드의 허위를 알게 됐고, 오즈먼드는 이사벨이 인형이 될 수 없는 사람임을 파악했다. 서로의 본질을 뒤늦게 인지했으나 이런 상황에서 약자는 여성일 수 밖에 없다. 그는 이사벨의 경제력으로 현재를 누리고 있음에도 그녀가 갖지 못한 것들을 약점 삼아 공격한다. 이사벨은 자유를 명분삼아 저항했으나 오즈먼드로부터 돌아오는 건 그녀를 저속하게 취급하는 비웃음 뿐이다. 거기다 의처증에 가까운 질투심이라니. 그런데 여기서 오즈먼드가 갖는 모순은, 이사벨이 미국 여성으로서 전통성도 없고 귀족적이지 않다는 것인데, 오즈먼드 역시 미국인이고 귀족이 아니다. 그저 귀족을 흉내내는 허세에 찬 한량일 뿐이다. 


사실 소설을 다 읽은 후에도 랠프처럼 사려 깊고 공정한 사람이 아주 가까이 있어 자주 대화를 나누고 조언을 해주었음에도 이사벨이 이러한 무모한 선택을 한 것은 여전히 납득되지 않는다.   


ㅡ 


랠프의 임종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전보를 받은 이사벨이 랠프에게 가봐야겠다고하자 독설을 쏟아내며 영국으로 가는 것을 반대하는 길버트를 마주하고서야, 비로소 결혼이 갖는 굴레, 즉 결혼이란 한 여자가 남편에게만 충실해야 한다는 것을 뜻한다는 사실을 깨닫는 이사벨. 거기다 길버트와의 결혼 배후에 숨겨진 모든 비밀을 알게 되자 죽음을 떠올릴 정도로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랠프의 죽음 앞에서 그녀는 아직 살아 내야 할 인생이 남아 버티고 있음을 생각한다. 아주 먼 곳으로 떠나야 할까, 체념하고 감당하며 다시 돌아가야 할까. 그 어떤 예측도 할 수 없지만, 이사벨이 아는 것은 고통만 느끼고 살 수 없으며, 그러기에는 자신이 너무 소중하고, 행복해질 힘이 아직 자신에게 남아있다는 것, 그래서 도피하지 말고 대면해 끝까지 버텨야한다는 것이다.  


자유를 갈망하고 많은 기회가 열려있었으나 잘못된 결혼으로 주저앉아 버린 이사벨의 이야기를 통해서 우리가 섣불리 단정해서 안되는 것은, 이사벨을 비롯해 가정에서 안주한 여성들의 삶이 보잘 것 없다고 말할 수 없다. 모든 여성이 문인으로서 기자로서 세계 곳곳을 여행하며 하루가 다르게 변해가는 세상을 경험하고 새로운 현재에 눈을 뜨는 헨리에타의 삶을 살 수는 없다. 또한 헨리에타의 삶이라고 해서 마냥 경이롭기만 하겠는가.  


한 치 앞을 모르는 인생에서 미래를 장담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사랑 또한 사람이 하는 것인지라 환경과 관계에 영향을 받는다. 그렇기에 누군가와 사랑하고 이해하고 존중하는 것을 오랫동안 유지할 수 있기까지는 많은 것을 함께 경험하고 극복해야 비로소 가능한 일일 터다. 미국인으로서 남다른 애국심을 가졌던 헨리에타가 오랜 기간 우여곡절을 겪은 밴틀링과 영국에서 정착하는 데에는 이와같은 과정이 있었기에 더욱 단단하게 느껴진다.  


워버턴, 굿우드, 헨리에타, 간접적으로는 팬지까지 이사벨에게 다른 삶을 선택할 수 있다고, 그렇게 하라고 말하고 있다. 모든 사람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길버트를 선택했듯, 이번에도 역시 선택은 이사벨의 몫이고, 어떤 선택을 하든 그녀는 변함없이 최선을 다할 것이다. 우리가 우리의 삶에 최선을 다하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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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진 반쪽
브릿 베넷 지음, 정연희 옮김 / 문학동네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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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남부 외곽의 작은 마을 맬러드. 백인으로 받아들여질 일은 없으나 니그로로 대우받기 거부하는 사람들을 위한 타운이다. 1848년 앨폰스 드퀴어가 물라토와의 결혼을 시작으로 그들은 세대를 이어갈수록 피부색이 옅어졌다. 맬러드 마을 사람들의 목표는 각 세대가 직전 세대보다 더 하얀 피부가 되는 것이다. 맬러드에서는 아무도 피부가 검은 사람과 결혼하지 않았고, 타운을 떠나는 사람도 없었다.


데지레는 아무리 시간이 흐르고 세월이 지나도 아무것도 달라질 것 같지 않은 맬러드 밖의 삶에 대해 늘 환상을 품고 있었고, 그와달리 스텔라는 아주 현실적이었다. 학업에 열중했고, 맬러드고등학교의 교사가 되고 싶었으며 엄마를 두고 맬러드를 떠날 생각이 없었다. 그러나 가난한 살림으로 인해 아델은 열여섯 살 쌍둥이 자매에게 학업 중단을 통보하고 그들의 일자리를 구해놨다. 대학을 갈 계획이었던 스텔라에게는 청천벽력이었고, 언젠가 스텔라를 대학으로 떠나보내고 홀로 남겨질 것이 두려웠던 데지레는 오히려 안도했으나 부유한 백인의 집에서의 청소일은 쌍둥이가 맬러드를 떠나는 계기가 되었다. 


데지레는 맬러드가 아닌 곳에서 찾을 수 있는 가장 검은 남자와 결혼했고, 스텔라는 데지레를 남겨두고 소리없이 떠난 후 패싱했다. 그리고 사라졌던 쌍둥이 중 데지레가 14년 만에 블루블랙빛 피부를 가진 딸 주드를 데리고 맬러드에 돌아왔다. 


ㅡ 


소설은 1968년부터 약 20여 년간의 시간을 오가며 서술한다. 쌍둥이는 어린시절 아버지 리언이 백인에게 폭행을 당하고 총에 맞는 모습을 목격했다. 특별한 잘못도 없이 화풀이 대상이 된 리언은 두 번째 린치를 당할 때 머리에 총 두 방을 맞고 사망했다. 쌍둥이는 인종이 가져오는 사회적 모순과 폭력적 차별을 바로 눈앞에서, 그것도 아버지를 통해 깨닫는다. 아무리 얼굴이 백인과 가까워져도 그들은 어쩔 수 없는 유색인이라는 것을.  


데지레는 워싱턴에서 까맣지 않은 피부 때문에 남편에게 가정폭력을 당했고, 그녀의 딸 주드는 맬러드에서 유난히 까만 피부 때문에 학교폭력을 당했다. 맬러드에서의 짙은 피부색 흑인, 백인 사회에서의 유색인, 백인과 흑인 사회 어디에서도 인정받지 못하는 패싱. 소속된 집단에서 벗어나면 어디에서도 오롯이 자기 자신일 수 없는 세상. 이러한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해 스텔라는 자신을 늘 가둔다. 유색인들이, 백인들이, 그녀가 패싱임을 알아볼까봐.  


나는 그토록 벗어나고 싶었던 맬러드에, 딸까지 데리고 제 발로 돌아올 수 밖에 없었던 데지레보다 유색인 세계에도, 백인의 세계에도 쉽사리 마음을 열 수 없어 평생을 거짓 가면을 쓰고 살얼음판을 걷듯 살아야했던 스텔라에게 더 마음이 쓰였다. 백인 부유층이 사는 마을에 흑인 유명 배우가 이웃집으로 이사를 온다는 소식에, 자신의 정체를 들킬까봐 두려운지, 아니면 그들을 저지하려는 백인들의 행동이 두려운지 스스로도 갈피를 잡을 수 없을만큼 혼란을 겪는 스텔라의 두려움과 외로움이 안타까웠다.  


어린 시절 백인들에게 모욕과 차별을 당했던 경험이 있는 스텔라가 패싱 이후 어느 순간부터 그들의 위치에서 그들이 했던 행동을 무의식중에 그대로 따라할 정도로 그녀는 어느새 백인이 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어지는 린치를 견디지 못한 이웃 흑인 일가족이 떠나자 데지레를 잃었을 때(비록 본인이 몰래 떠났지만)와 같은 감정을 느낀다. 백인처럼 행동하고, 백인처럼 사고하려고 노력하고 있으나 그녀는 여전히 외줄을 타고 있는 곡예사처럼 위태롭기만 하다.  


ㅡ 


엄마가 아빠에게 가정폭력을 당하고 집을 나와 찾아간 곳은 외할머니가 계신 맬러드. 마을 사람들 모두 백인에 가까운 하얀 피부를 갖고 있어 흑인 중에서도 유독 까만 피부를 가진 주드는 별종 중의 별종이다. 아무도 그녀가 데지레의 딸이라는 것을 믿지 못할만큼 그녀는 까맣다. 그렇기에 주드는 맬러드에서 하루라도 빨리 떠나고 싶다.  


케네디는 자신이 니그로 혈통임을 믿을 수 없다. 자기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다 들어주는 아름다운 엄마가 흑인일리 없다. 종종 롤러코스트를 타듯 감정기복이 심하고 자신의 과거를 꼭꼭 숨겨둔 아름다운 엄마의 신비로운 모습이 모두 거짓이었다는 사실은 받아들이기 힘들다. 


주드는 경제적 궁핍에도 불구하고 연인과 신뢰와 사랑을 다지며 의과대학에 다니면서 자신이 원하는 길을 나아가고 있다. 케네디는 그녀의 소식을 들으면서 자신을 돌아보게 된다. 지하층 아파트에서 이해할 수 없는 남자와 동거하고 대학 학위도 없고 매일 밤 빈 극장에서 노래를 부르고 커피를 서빙하고 있는 자신을. 케네디는 왜 자신을 사랑하지 못하는 걸까.  


케네디의 일탈과 방황이, 스스로를 감추어야했고 유년 시절과 결혼 이전의 삶에 대해서 함구하는 엄마 탓이라고 할 수 없다. 그러나 주드를 만나 엄마의 정체를 알게 되고, 결혼 이후 엄마의 삶이 거짓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는 사실, 무엇보다 딸인 자신보다 조카라고 할 수 있는 흑인 여성이 자기 엄마에 대해 더 잘 알고 있다는 사실은 케네디에게 충격을 주었을 것이다. 더구나 엄마의 거짓된 삶은 곧 자기의 삶 역시 거짓이라고 여겼을테니 정체성 혼란까지 일었을 터다. 케네디는 늘 새로운 삶을 만들어냈고, 흔들렸다. 따지고 보면 스텔라의 거짓된 삶이 케네디에게는 해롭지 않았다(물론 이런 부분까지 염두에 둔 것은 아니었다만). 하얀 피부, 아름다운 금발, 부유한 아버지. 스텔라가 흑인의 삶을 살았다면 케네디가 누릴 수 없는 것들이었다. 그리고 그녀의 방황조차 사치로 취급되는 것 역시 엄마인 스텔라의 거짓된 삶 덕분이라는 것을 알기에 케네디가 더 혼란스러웠던 것은 아닐까.



이 소설에서 눈여겨 볼 만은 관계는 흑인 주드와 성전환자 리스, 그리고 데지레와 얼리의 사랑이다. 흑인, 여성, 성소수자, 전과자 등 사회적 약자인 그들의 사랑은 오랜 세월을 지속하며 진실과 신뢰, 그리고 이해와 배려를 기반으로 하고 있다. 반면 스텔라는 처음 블레이크와의 만남부터 거짓으로 시작해 늘 불안과 두려움을 안고 살아야 했고, 진실을 알게 된 딸에게조차 이해받지 못한다. 타인에게 악의를 갖은 것도 아니고, 누군가에게 피해를 준 것도 아니었음에도 스텔라가 용서받지 못하는 이유는 거짓 때문이다.  


그러나 어린 나이에 아버지의 죽음을 눈앞에서 목도하고 PTSD로 인해 하루도 편하게 잠들 수 없는 지경에 이르고, 자신 역시 아버지처럼 언제라도 벡인에게 죽임을 당할 수 있다는 공포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그녀를 누가 비난할 수 있을까.  


데지레와 스텔라. 두 사람 모두 녹록치 않은 삶을 살았다. 우리는 언제나 선택을 강요받지만, 아무도 이것을 강요라고 말하지 않는다. 자발적 선택, 우리에게 과연 '자발적'인 경우가 얼마나 되겠는가. 




사족
넬라 라슨의 <패싱>, 마리즈 콩데의 <이반과 이바나...>도 같이 읽어보면 좋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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