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자와 달빛 휴머니스트 세계문학 18
세르브 언털 지음, 김보국 옮김 / 휴머니스트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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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만연체가 지루하지 않은 소설을 만났다. 


낭만적인 제목과는 다르게 삶과 죽음에 대해 치열하게 사유하는 소설이다. 주인공 미하이는 끊임없이 죽음을 향해 가고 있는 듯 보이나, 본인 스스로 의식하지 못하지만 그가 찾고자 하는 것은 살아야 할 '명분'이다. 








미하이의 심상한 생각으로 시작하는 소설은 신혼부부임에도 미하이의 예사롭지 않은 행동으로 인해 그들에게 어떤 사연이 있는지 궁금증을 자아낸다.  


철학적이고 관념적이며 그 무엇에도 얽매이지 않고 선의와 예의로 행동하는 아름다운 보헤미안 미하이. 그는 이번 신혼여행으로 자신이 결혼을 통해서도 어른이 될 수 없음을 인정한다. '폐허가 된 고대 성벽의 유적에 앉아 몇 시간에 걸쳐 행복하게 움브리아의 경치를 바라보'는 장면은 단편적이나마 미하이를 다 보여주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나는 왜 이 대목에서 미하이가 격하게 이해되는 거지?) 


미하이는 자신이 원하는대로 살기보다는, 다른 사람들이 기대하는대로 살면서 혹사 당했다(고 본인은 생각했다). 그리고 가장 큰 자기 혹사는 바로 결혼이었다. 어쩌면 정서적으로 돌아갈 곳이 없었던 미하이에게 열차에 잘못 오른 것은 그의 무의식이 이끈 것일지도 모를 일이다. 그런데 현대 사회를 살고 있는 우리의 삶이 미하이가 혹사라고 표현하는 바로 그 삶과 크게 다르지 않음을 독자는 안다. 도망가듯 도착한 산악 도시에서 미하이의 행색은 관광객이 아닌 '도망자'다. 그런데 이 표현이 더할나위 없이 적절하다는 생각이다. 


한때 모든 것을 함께 나눈 친구였던 세베리누스 신부(에르빈)에게 고해 성사를 하듯 그동안 자신이 얼마나 가짜 어른의 삶을 살았고, 결혼을 망쳤고, 어디에서부터 시작해서 어디로 가야하며, 어떤 미래를 기대해야 하는지 모르겠다고 토로하는 미하이. 그러면서 제발 외롭게 혼자 있는 자기를 내버려두지 말라고 부탁하는 모습은 살고자하는 그의 처절함이 잘 나타난다. 세베리누스 신부는 우연에 스스로를 맡기고 일정 없이 그 자신을 온전히 놔둬보라고 조언하는데, 소설의 마지막에 이르러서야 이 조언에 의미를 알 수 있다. 



소설에서 가장 흥미로운 지점이라 할 수 있는 발트하임과의 만남. 죽어가는 것이 에로틱한 행위라는 발트하임의 말에 터마시를 떠올리는 미하이는 그것을 어떻게 이해했는지 묻는다. 발트하임은 죽어가는 것은 성적 쾌락과 같은 것이며, 따라서 이때 죽음을 욕망하는 자들은 치명적인 사랑을 갈망하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근대 이후에 원초적인 본능과 죽음의 욕망을 억누르는 것이 '문명인'으로서의 기본 소양으로 정착해 사람들은 욕구를 억누르게 되었다 설명인데, 물론 이것은 어디까지나 이론적일 뿐 발트하임은 누구에게도 자살을 권유할 생각이 없다. 그러나 발트하임과의 만남으로 미하이는 에버에 대한 집착과 터마시를 향한 열망이 더 강해진다. 어디에서도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하는 미하이는 터마시와 같은 죽음을 맞기를 바랐고, 자신이 죽어가는 순간 에버가 지켜봐주기를 바랐다. 터마시에게 해주었던 것처럼.


ㅡ 


겉으로 보기에 미하이는 자신의 욕구에 충실한 사람이다. 먹고 싶을 때 먹고, 유부녀든 비혼녀든 가리지 않고 사랑하고 싶은 대상이 나타나면 주저하지 않으며, 죽고자 할 때 죽으려 한다. 그의 행동에 미래에 대한 계획이나 타인에 대한 도덕적 배려와 의무는 찾아볼 수 없다. 어른이 되기를 포기하고 이러한 삶을 선택한 그가 자신의 삶에 있어 목적하는 바는 무엇일까?  


어쩌면 미하이에게 있어서 터마시와 에버는 도달할 수 없는 이상향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잡힐 듯 잡히지 않은 영혼의 목소리 같다고 해야할까. 미하이가 죽기로 작정한 날, 반니니 앞에서 부끄러웠던 이유는 자신의 죽음에 그 어떤 숭고함도 없는 것뿐만 아니라 터마시처럼 죽음 자체를 욕망하는 것도 아닌, 그저 도피에 불과하기 때문이었을 터다. 


밤새도록 환영에 시달리며 죽음의 사자라고 생각했던 사람들은 노동자였을 뿐이다. 죽음의 시간을 삶의 시간으로 바꾼 미하이는 그제서야 자신이 실제로 죽고 싶어하는지, 정말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해볼 의지를 갖는다.



이 소설에서 눈에 띄는 점은 미하이와 에르지를 비롯해 주요 등장인물들이 상대에게 직접 질문을 하고 답을 구하기보다는 혼자만의 생각으로 지레짐작하고 저울질을 하며 제나름의 잣대로 사람이나 상황을 판단한다는 것이다. 스스로 만들어낸 불안과 두려움 속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그들의 모습에서 경쟁에 쫓기며 낙오와 생계의 불안으로 하루하루를 견디는 우리의 모습을 찾기란 어렵지 않다. 


삶에, 살아가는 데에 꼭 의미를 부여할 필요가 있을까? 죽음을 예정한 시각을 불과 서너 시간을 앞두고 이웃의 소소한 초대가 그날을 살 이유가 된다. 작가는 죽음을 이야기함으로써 독자들에게 살아가라고 말한다. 그러니 우리, 살아봅시다.


382.
폐허 속의 들쥐처럼 그 또한 살아남을 것이다. 어떠한 일이 있어도 살아남을 것. 인간은 살아 있어야 항상 뭔가가, 여전히 뭔가가가 일어날 수 있을 것이다. 




사족
이 소설에서 사랑에도 예의가 필요하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에르지뿐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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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더헤드 수확자 시리즈 2
닐 셔스터먼 지음, 이수현 옮김 / 열린책들 / 202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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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지역의 수확령에서는 '수확을 즐기라'라는 고더드의 가르침을 점점 더 지향하는 방향으로 흐르고, 죽음이 더 이상 고결하지 않은 시대로 향하고 있다.  


마음속 신념에 따라 살아가라는 가르침과 마음 따위는 내버리고 본능을 좇아 목숨을 빼앗는 것을 즐기라는 가르침을 두 스승에게 받은 후 언제나 이 둘 사이에서 자아가 분열된 채 갈등하는 로언. 수확 대상자에게 한 달 시한부를 통보하고 삶을 정리할 시간을 준 뒤 수확 방식을 스스로 선택하게끔 해 수확자의 존엄을 지켜주려는 수확자 아나스타샤. 선더헤드는 이 두 사람에게 인류의 희망을 기대하고 있다.    



2권에서는 점점 격렬해지는 수확령의 분열과 갈수록 막강해지는 '신질서'들의 세력, 그리고 이를 막기 위한 등장인물들의 고군분투가 그려진다. 눈여겨 볼 부분은 1권의 「수확자들의 일기」가 스토리의 배경 설명과 '수확자'의 고뇌를 대신했다면, 2권의 선더헤드의 내레이션은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 문제와 인간이 갖는 고뇌를 고스란히 보여준다. 


선더헤드의 정부는 산 사람들의 세계를 다스리고, 수확령은 죽음을 다스린다. 선더헤드는 삶이 의미를 지니려면 죽음이 존재해야 한다고 말한다. 수확령은 그런 이유에서 존재의 의미를 갖는다. 그러나 죽음이 더 이상의 삶의 가치와 의미를 찾는 도구가 아닌 것이 되어버린 시대에도 선더헤드는 이를 지키기 위한 선을 넘지 않는다. 법은 명확해야 하고 지켜질 때 유의미하므로. 그가 루시퍼를 묵과하는 숨겨진 이유다.   


영구적인 삶과 경제적 안정을 통해 스트레스 혹은 생계형 범죄는 사라졌고, 지혜와 양심과 연민이 다스리는 세계가 확립됐다. 그러나 사회 불안은 여전하다. 선더헤드는 이 지점에서 삶의 의미를 '저항'에서 찾는 부류를 짚는다. 이들에게는 오히려 '불미자'라는 낙인이 명예롭다. 그렇다면 고더드같은 부류의 인간도 '저항'으로 분류할 수 있을까? 어쩌면 진짜 불미자는 로언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든다.    



읽으면 읽을수록 선더헤드와 수확령의 성격은 극명하게 나뉘어져 있다. 인간의 수명이 영구적이라는 사실만 제외하면 선더헤드는 사망 시대 이후를, 수확령은 사망 시대 이전을 상징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선더헤드의 세계가 원칙이 살아 있고 부패가 없다면, 수확령은 욕망과 탐욕, 경쟁과 질투, 정의와 불의, 선의와 악의 등 인류사에 존재했던 모든 것들이 살아 들끓고 있다. 그들은 '고결한 수확자'라고 불리지만, 때로는 여느 인간보다 더 태초의 본능에 가장 가까운 인간이 된다.   


선더헤드가 수확령을 침범할 수 없는 것(더 정확히 말하자면 침범하지 않는 것)도 의미심장하다. 앞서 말했듯 선더헤드가 삶을, 수확령이 죽음을 관장함으로써 지구에 전지전능한 절대자는 존재하지 않는다. 또한 선더헤드는 자신이 정한 규칙에 의해 얽매여 원하는 바를 이루지 못하는 모순에 붙잡혀 완전한 존재가 아님을 보여준다.  



2권에서 흥미로운 점은 클라우드가 진화한 선더헤드에게서 인간성이 간간이 드러난다는 것이다. 모든 인간의 손상과 고통을 담고 있는 선더헤드는 종종 애도를 하고, 분노와 격분을 경험하고 이를 자제하는 노력을 기울이며, 종단에는 비록 짧은 시간이지만 분노를 표출한다. 또한 정의와 불의를 조율하고 고독을 인지하며 누군가로부터 이해받고 싶어한다. 그야말로 인간보다 더 인간적인 존재라고 할 수 있겠다. 기계가 관장하는 세상에서 타인에 대한 연민과 애도 없이 살아가는 인간과 오히려 이러한 인간들을 연민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클라우드. 이 역설적 배치를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문득 영구적인 삶에서 죽음이 새로운 삶의 통찰을 가져다줄 수 없다면 인류가 존속해야할 필요가 있을까라는 의문이 든다.  


ㅡ 


어정쩡한 사회과학이나 철학 관련 책보다 훨씬 실질적으로 여러 명제에 깊이 들어가지는 소설이다.   


관찰과 감시의 차이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도움을 주기 위한 관찰은 감시에 해당하지 않을까? 개인 사생활 보호, 그리고 범죄 예방에 따른 감시카메라 설치. 이 간극에서 둘 사이의 경계는 어디쯤일까? 선더헤드는 관찰이 필요 없는 세상이 되기를 바라지만, 오히려 세상의 사각지대를 없애야하는 상황이 더 빨리 오게 될 것이라 짐작한다. CCTV 확대와 코비드 시국 당시 개인 사찰에 가까운 정보 노출을 떠올려 볼 때 그러한 짐작에 힘을 보탠다.  


고더드의 연설문과 퀴리의 연설문은 그들이 지향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확실하게 보여준다. 모든 미드메리카 수확자들이 원하는 만큼 생명을 수확하게 하며 수확자가 갖는 권리의 한계를 없애는 것으로써 인류의 안전한 존속을 우선하기보다는 수확자가 세상을 지배하게 만들겠다는 자, 수확자가 원하는 세상이 아닌 세상이 수확자에게 무엇을 필요로 하느냐를 우선하며 높은 가치와 이상을 지켜내 스스로를 자랑스러워할 수 있게 하겠다는 자. 누구를 택할 것인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상황을 바꾸는 것은 대단한 계획도, 거창한 대의도 아니다. 그저 인간이 갖은 한순간의 즉흥적이고 나약한 감정이다. 패러데이는 로언에게 부패한 수확자를 거두기 전에 그들의 삶의 이면을 살펴보고, 먼저 그들을 향한 애도를 하라고 가르친다. 우리가 서로에게 가져야 할 감정일 것이다.  




사족.

자신의 진짜 모습이 그레이슨인지 슬레이드인지 혼란스러워하는 그레이슨 톨리버의 모습은 전편 <수확자>에서 로언이 겪었던 정체성 혼란과 흡사한데, 영화 <무간도>도 잠깐 생각이 났더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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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의 길 휴머니스트 세계문학 19
그라치아 델레다 지음, 이현경 옮김 / 휴머니스트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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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6년에 쓰여졌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만큼 소설은 심리스릴러를 방불케 하는 쫀쫀함으로 독자의 긴장감을 조여 쥔 채 이야기를 끌고 간다. 또한 소설의 마지막은 어느 현대소설보다 세련됐다.   


사랑과 질투, 배신과 복수심이 엇갈리며 등장하는 인물들은 마치 서로에게 화살을 겨누듯 육욕과 열망의 늪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며 허우적거린다. 두 주인공 마리아와 피에트로의 감정선을 따라가다보면 독자가 힘에 부칠 지경이다. 



마리아의 심리 상태는 그야말로 뒤죽박죽이다. 처음에는 피에트로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단호한 입장을 보이더니 키스 한 번에 홀랑 넘어간 뒤로는 허영심 때문에 연인 관계를 주변에 숨기고, 급기야 몰래 결혼까지 감행하면서 한때 연인이었던 남자의 복수에 대한 두려움과 한편으로는 그가 자신을 무심하게 대하는 듯한 태도에 실망한다. 시간이 흐르면서 마리아는 자신의 경솔하고 변덕스러웠던 행동들을 부끄러워하지만, 젊은 시절에 누구나 그럴 수 있다는 핑계로 후회나 반성은 하지 않는다. 


후반부에 마리아가 짧은 시간 동안 진실과 거짓 사이에서 혼란스러워하며 격렬하게 갈등하는 장면이 대여섯 장에 걸쳐 서술된다. 이 장면을 통해 마리아가 어떤 사람인지를 알 수 있는데, 자책은 하지만 원인을 타인에게 전가하는 모습은 어떤 면에서 보편적인 우리네 모습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소설의 중반부를 넘어서면 식상하더라도 한 번쯤 묻게 되는 질문. 마리아를 향한 피에트로의 감정은 사랑이냐, 집착이냐, 그의 자존심이냐. 무엇일까? 누군가를 사랑하고 아끼는 마음을 표현하는 방식은 사람마다 제각각일터다. 사랑하는 이의 안온함을 위해 박수를 쳐주며 보내주는 이가 있는가하면, 모든 장벽을 극복하거나 타인의 희생쯤은 나몰라라 하며 쟁취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아마 피에트로는 스스로 마리아를 진심으로 사랑한다고 믿었을 터다. 마리아가 진작에 피에트로에게 진정성 있는 사과를 하고 그녀의 진심에 대해 진솔하게 말했다면, 소설에서 보여지는 피에트로의 성향을 봤을 때 이렇게까지 파국으로 치닫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짐작해본다. 마리아를 위해 무슨 일이든 하겠다는 피에트로의 말은 희생과 사랑이 아니라 욕망과 탐욕이었다. 



드라마 <더 글로리>에서 정작 본인이 모르는 억울함이 무엇인지를 궁금해하며 답답함을 안은 채 교도소에서 남은 생을 살아야하는 연진이나 폐쇄된 공간에서 살아 있는 동안 자신이 쥐도 새도 모르게 언제, 어떻게 죽을지 모르는 공포에 떨어야 하는 죄수 '3724'처럼, 마리아야말로 남은 생이 지옥 아닌 지옥이 될 것이고, 죽음에 이르러서야 해방될 것이다. 


애초에 니콜라가 피에트로를 채용하지 않았다면, 피에트로가 로사의 말을 귀담아 듣지 않았다면, 훔친 고기 한 점을 먹지 않았더라면, 마리아가 다시 돌아온 피에트로를 외면했다면 그들의 인생 행로는 달라졌을까. 쓸데없는 가정이다만.  


ㅡ 


포도를 수확하고, 포도주를 만드는 과정, 마리아와 프란체스코의 결혼식 장면 등은 샤르데냐 섬의 서정성과 문화를 충분히 드러냈고, 무척 아름답게 그려졌다. 5월 목초지에서 보내는 마리아 부부의 일상도 경험해보고 싶은 삶의 모습이다. 생계를 위한 혹은 필요에 의한 노동이 아닌 노동은 얼마나 한가롭고 낭만적으로 보이는지. 


마지막 장을 덮으면서 피에트로가 마리아에게 다짐했던 "당신에게 해를 입히지 않겠다"라는 말이 새삼 떠오른다. 사비나도, 피에트로도 사랑했던 사람에게 해를 입히지는 않았다. 거만함과 위악이 마치 부러 쓴 가면인 양 허세를 부리며 양심적인 듯 괴로워하지만 결국 제 이기심과 자기합리화로 무장한, 그래서 세상이 늘 자기 편이라고 자만해 타인의 감정 따위는 모르쇠로 일관했던 마리아, 당신이야말로 가장 큰 유죄. 그리고 어리석고 또 어리석은 욕망과 사랑에 스스로를 던져 악의 길을 선택한 피에트로 역시 유죄. 이 난장판같은 복수극에서 진정한 승리자는 연적에게 지옥을 선사한 사비나일지도... .



351.

어떤 의사도 그들의 질병을 고칠 수 없듯이 어떤 판사도 그들에게 이미 내려진 형벌보다 더 큰 형벌을 선고할 수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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견딜 수 없는 사랑
이언 매큐언 지음, 한정아 옮김 / 복복서가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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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읽은 이언 매큐언의 작품이 <스위트 투스>였지싶다. 사실 속죄만큼 임팩트 있는 작품을 만났다고 말하기에는 다소 아쉬운 점이 있었는데, 이 소설은 <속죄>를 쓴 무렵에 쓰여졌다고 하니 기대가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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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확인 홀
김유원 지음 / 한겨레출판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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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수리 삼총사라고 불리는 희영, 필희, 은정을 중심으로 그들의 가족과 주변인물까지 이야기가 확장되는 연작 형식의 장편소설이다.  
 






동거 - 파혼 - 은둔 - 돌봄 노동으로 이어진 오십 평생 끝에 가까운 사람 하나 없이 홀로 남은 외로움, 처음 해 본 사랑에 미쳐 두 딸을 두고 집을 나온 것에 대한 죄책감과 그리움, 커다란 상실로 인해 기쁨도 절망도 없이 분노만 짓누르며 살아온 자의 심술궂은 복수심, 유년시절의 불안을 성인이 되어서도 안고 살며 과거를 잣대로 현재를 재단하고 앞서 불행을 예감하며 벗어나지 못하는 트라우마, 행복한 가정에 대한 염원 등 굴곡진 삶을 살아가는 이들의 이야기가 잔잔하게 펼쳐진다.  


학교 폭력이든, 노사 협상이든, 공권력이 작용하는 현장이든, 늘 약자들에게서 원인을 찾는 이상한 나라에서 사회의 약속을 일일이 의심하지 않고, 사법부와 경찰을 믿을 수 있는 세상을 바라는 것은 너무 큰 욕심이려나.  


마흔이 훌쩍 넘어서까지 부정과 비극이 세상의 이치라고 믿으며 예측 가능한 영역에 보이지 않는 울타리를 친, 자신을 복수의 도구로 여기고 십대부터 스스로를 단단하게 벼리며 살아온 이의 황폐함. 울다가 죽을 매미가 마치 자신같아서 제발 매미의 울음 소리 좀 들어달라고 울부짖는 중년의 여성은 여전히 어린 아이의 작은 어깨처럼 애처롭다. 마음에 난 구멍은 무엇으로 메워야 할까. 때로는 누군가의 오지랖이 다정할 때가 있지 않나. 소설 속에서 등장하는 몇몇의 오지랖은 긴 사연을 동반하지 않아도 무척 감동스럽다.


은수리에서 시작한 소설은 은수리에서 끝난다. 희영이 찾아간 은수리에 은정이 돌아와 있어서 얼마나 다행이었는지. 두 사람을 통해 내가 더 위로받는 기분이었다.  




사족
생뚱맞지만 나는 가끔 도시든 시골이든 고향이 있는, 더 정확히 말하자면 부모가 살던 집에서 대를 이어 살아가는 친구들이 부럽더라. 그런 집은 그들만의 이야기가 여전히 살아있으니까.  




※ 출판사 지원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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