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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이 거기 있었다 - 함정임의 유럽 묘지 기행
함정임 지음 / 현암사 / 2024년 5월
평점 :
그야말로 취향저격이다.
읽고 있는 중에도 계속 눈에 밟히는, 올해 읽은 에세이 중에 가장 마음에 들어온 책이다.
이 책은 작가를 사로잡았던 소설가, 시인, 화가, 예술가 들의 생애 공간과 영면처를 찾아간 묘지 기행이다. 지면에 언급된 인물들과 그들의 작품, 그리고 사이사이 발췌한 문장들의 주인(?)까지 꼽으면 수십 명 인사가 책 안에 있다. 단순한 기행을 넘어 영면한 이들의 작품들과 죽음 이전의 삶을 무겁지 않게 톺아보는데, 작가의 인문학적 시야가 돋보인다.
프랑스의 파리에 있는 몽파르나스, 팡테옹, 몽마르트르, 페르 라셰즈, 오베르쉬르우아즈로 순례를 시작한다. 반 고흐를 따라 암스테르담에서 아를, 파리, 고흐의 마지막 거처였던 오베르쉬르우아즈까지의 여정을 짚고,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생애 마지막 3년을 보냈고 그곳 성의 예배당에 묻힌 앙부아즈와 다빈치의 이탈리아 고향 마을을 여행한다. 더하여 생폴드방스, 루르마랭, 마르세유, 세트, 드럼클리프, 크레타, 스트랫퍼드어폰에이번, 루앙, 모스크바, 야스나야폴랴나, 베네치아, 베를린, 빈, 샤를빌메지에르 등 수많은 도시와 외곽 마을, 그리고 그곳에 잠든 수많은 이들의 이야기가 다정하고 아름다운 사진들과 함께 서술한다.
기억에 남는 몇 가지들을 짚자면,
책의 처음에 등장하는 사르트르와 보부아르 묘지. 그들은 합장되어 있는데, 서로의 자유를 존중했고 사실혼 관계에 가까웠음에도 한 집에서 살지 않았던 그들이 과연 합장을 원했을지에 대한 가벼운 의구심. 그리고 어머니를 의부에게 빼앗겼다고 생각했던 보들레르가 의부의 가족묘지에 묻히기를 바라지는 않았을 것 같다는 짐작. 이들의 묘지를 따라가면서 든 생각은 비록 본인에 관한 사안이라도 죽음 이후에는 고인의 손을 떠났으니 자신의 죽음 뒤를 걱정하는 건 부질없는 일이라는 것(유언을 남기면 뭐하냐고, 말을 안 듣는데). 반면 착한 아들도 있다. 베케트 가까이 묻어달라는 어머니의 유언에 따라 죽어서 파리로 이사온 수전 손택. 정말 지척에 묻혔더라.
프랑스 파리의 묘지 중 페르 라셰즈 묘지는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다. 몽파르나스, 몽마르트르, 팡테옹도 유명하지만 페르 라셰즈는 파리에 있는 공원과 20개의 묘지 중에 가장 규모가 크고, 파리에서 가장 넓은 녹지를 자랑한다고. 당대의 건축가와 조각가들이 다양한 재료와 스타일로 기념문과 기념비를 만들어 놓아서 전시장을 방불케 한다는데, 개선문과 함께 파리에서 가장 많은 방문객이 찾는 명소이기도 하고, 문화재로 지정이 되어 있어 박물관과 마찬가지로 중요하게 안내되어 있다고 한다. 발자크, 프루스트, 조르주 페렉, 짐 모리슨, 폴 엘뤼아르, 에디트 피아프가 잠들어 있다. 그런데 페렉의 유골은 봉안당 벽에 잠들어 있다. 공간에 대한 애착을 보인 페렉이 잠든 곳이 네모칸 작은 벽이라고 생각하니 어쩐지 쓸쓸한 느낌이 들더라는.
대체로 국립묘지 격인 팡테옹에 안장되거나 특별한 사연이 있거나 혹은 가족이 없는 경우가 아니라면 많은 인사들이 가족묘지에 안장되어 있었다. 개인적으로 이 부분이 꽤 흥미로웠다. 그리고 파리의 묘지에는 프랑스인 외에도 많은 외국인들이 상당수 영면해 있는데 문득 그들에게 파리는 어떤 의미였을지도 궁금해졌고.
기억에 남는 묘지는 아무것도 세우지 말고 소박하게 묻어달라는 톨스토이의 당부대로 그믜 묘는 그야말로 푸른 잔디뿐이다. 말년의 그의 모습을 떠올리면 그와 잘 어울리는 묘지다. 다른 하나는 빈에 있는 쇤베르크의 묘. 빈 중앙 묘지에는 음악가군이 배치되어 있는데, 유독 쇤베르크만이 혼자 뚝 떨어져 있다. 흰 대리석을 육면체 비석 모서리를 바닥에 꽂아 기우뚱하게 세워놓은 형상이다. 마치 현대 미술 작품처럼 보이기도 한다.
사실 인상적이면서 동시에 가장 마음에 들었던 점은 따로 있는데, 파리 시민에게 죽음의 공간이 일상 속에서 조화롭게 자리를 잡고 있다는 사실이다. 묘지의 벤치에서 독서를 하고, 한가로이 산책을 하는 그들의 모습이 보기 좋았다. 묘지의 바람을 느껴본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그 고요한 한적함이 얼마나 마음을 차분하게 해주는지 알 것이다. 그래서인지 파리뿐 아니라 프랑스 곳곳의 공동묘지는 상당히 아름답게 조성되어 있더라는. 그래서 사진에서 보여진 장소들의 공기를 맡아보고 싶었다.
당연한 얘기겠지만, 잘 사는 것만큼이나 죽음을 잘 맞이하는 것 또한 중요하다는 것을 새삼 느낀다. 꽤 오랫동안 역사 답사를 다니면서 가끔 일정에 문학에 등장한 지역 또는 작가들의 생가를 넣기도 하는데, 차후 본격적으로 문학 중심 답사를 다녀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작가는 스무 살부터 그를 사로잡았던 이들을 좇았다면, 나는 나의 청춘 시절을 붙잡아 주었던 문학 작품의 관련한 장소들을 좇아봐야겠다.
※ 도서지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