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스턴 사람들
헨리 제임스 지음, 김윤하 옮김 / 은행나무 / 202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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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예폐지론자 집안 출신의 어머니를 둔 여성해방운동가인 북부 여성 올리브, 남북전쟁에 참전하고 패전으로 일가가 몰락한 보수주의자인 남부 남성 랜섬, 그리고 이 두 사람 사이에서 끝없이 갈등을 겪으며 흔들리는 연설가 버리나.  




 



헨리 제임스는 이 소설에서 사회적 권리를 쟁취하고 더 나은 사회로 나아가기 위한 개혁운동을 하는 여성을 서술함으로써 사회적.개인적 한계를 보여준다. 소설 속 서술자는 올리브를 까다롭고 배타적이고 타협하지 않는 성정으로 평등을 주장하면서도 신분의 차별적 인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타인과의 상관관계를 왜곡하는 사람으로 묘사하면서 동시에 구습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하는 인물로 그리는데 이러한 시각이 당시 여성 사회운동가를 바라보는 대다수의 보편적 인식임을 짚은 것인지 아니면 작가 본인의 관점을 빗댄 것인지 그 의도를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소설의 결말에 이르면 이에 대한 궁금증은 더 커진다.  


망언록을 만들어도 될 정도로 벽창호같은 남성우월주의자 랜섬은 말할 것도 없고, 버리나를 향한 올리브의 소유욕과 집착도 불편하지만, 자의식 없이 그때끄때 감정에 이끌려 다니면서 어쩔 수 없다는 말로만 일관하는 버리나 역시 마뜩치 않기는 매한가지다. 가만 생각해보면 미스 버즈아이를 제외하면 이 소설에서 호감가는 인물은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여성운동가들의 정신적 지주라 할 수 있는 미스 버즈아이가 지속적으로 랜섬이 조만간 여성 진보주의자들의 동조자가 될 것이라고 예견하듯 말할 때마다 도대체 그녀는 랜섬의 무엇을 보고 그런 생각을 하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것은 미스 버즈아이의 예견이라기보다 소설에서의 표현처럼 그녀가 품고 있는 보편적 열망, 진보를 희구하는 열정의 표현이었으며, 예견이 아닌 소망에 가까웠다는 생각이 아니었나싶다. 


소설은 내내 독자를 들었다 놨다를 반복하고, 고구마와 동치미를 번갈아가며 선사한다. 작가는 왜 이런 결말을 선택했을까? 그가 짚고 싶었던 것이 당시 여성해방운동가들의 한계였을까, 아니면 그들이 넘기 힘든 사회적 한계였을까. 그것도 아니면 랜섬의 손을 들어주어 은연 중 작가 자신의 의중을 들어낸 것일까. 마지막 문장을 읽으면서 버리나는 어떤 삶을 살든 스스로 뿌리를 내리지 않는 한 끊임없이 흔들릴 것이라 예상된다. 



헨리 제임스의 묘사는 섬세하다. 특히 인물의 감정 및 심리에 대한 묘사는 탁월한데 풍경과 상황에 대한 부분도 마찬가지다. 그리고 소설은 3인칭 서술자를 두고 진행한다. 특히 관찰자 시점과 전지적 서술자 시점을 구분없이 오가면서 어느 순간 소설에 작가 본인이 끼어들어 독자의 관점을 유도하는데, 그야말로 시사성을 장착한 이야기꾼이다. 700쪽에 이르는 책을 지칠 새 없이 읽었으니 가독성은 좋다고 할 수 있겠다. 



나만 그런건가... . 책을 덮고도 한참이나 생각이 길어진다. 당시의 시대성과 내가 살아가는 지금의 시대성. 사실 헨리 제임스가 무엇을 말하고자 했는지, 아직까지 조금(?) 생각이 오락가락하는 중이다.  

저는 그저 제 일을 해내려고 했을 뿐이에요.(...) 진보의 흔적이 바로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진보가 없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그 점을 저는 꼭 말씀드리고 싶었습니다. 훨씬 앞으로 더 나아가야 비로소 자신이 무엇을 해냈는지 알 수 있는 것입니다. - P6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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