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살주식회사
잭 런던 지음, 한원희 옮김 / 문학동네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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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만 보고 "잭 런던이 쓴 느와르(혹은 스릴러)라고?" 이런 호기심으로 읽기 시작한 소설. 나의 착각이었다. 암살, 청부살인이라는 다소 자극적인 소재를 데려와 윤리의 딜레마와 사회 이념 및 철학적 의도를 가진 소설이다.  


꿈을 꾸며 이론만 늘어놓고 분노만 쏟아낼 뿐 어떤 성과도 이룩하지 못한 채 실질적으로 행동하지 않는 무정부주의자들에 대한 날선 비판은 마치 작가가 소설 속으로 뛰어들어 내뱉는 말처럼 들린다.  







 
도덕적 정당성을 주장하는 암살국 수장, 암살자 조직을 무너뜨리려는 목적을 가졌던 자가 (임시) 수장이 되어 조직을 운영하고, 그것도 모자라 자신이 암살을 지목한 사람이 연인의 아버지이며 이제는 필사적으로 구해야하는 사람이 조직의 설립자라는 부조리. 이렇듯 소설은 처음부터 모순과 딜레마를 툭 던져놓는다.  


잭 런던은 일정 부분 자신을 투영하고 더 나아가 로망했던ㅡ돈 걱정 없는 부유한 사회주의자ㅡ모습을 덧붙여 윈터 홀이라는 캐릭터를 완성한 것으로 보인다. 스스로도 잘 알고 있었던 잭 런던의 한계는 암살국 조직원들이 대부분 학자, 교육자, 언론인 등 지성인 집단이라는 설정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정의구현이라는 명분을 내세워 어떠한 예외도 인정하지 않으며 무자비하게 살인을 저지르면서 그것이 곧  도덕성이라고 주장하는 모순에 빠진 자들이 사회의 기득권층이라는 점에서 그렇다. 물질적 근심없이 사유와 도덕이 지배하는 고결한 집단. 그들을 날카롭게 비판하면서도 그 계층에 진입하고 싶어했던 작가가 열망한 이상향이 아니었을까. 


이 소설은 독자에게 '정의를 실현하기 위한 폭력은 정당한가', '상식에서 벗어난 약속도 지켜져야 하는가', '원시사회에서부터 진화한 인간에게 도덕 의식은 언제부터 생겨난 것일까' 등 몇 가지 윤리적 문제에 대해 질문을 던진다. 아마 잭 런던은 인문학적(혹은 철학적) 차원에서 이러한 질문을 던졌다기보다는 자본주의 국가에서 사회주의자로 살면서 본인이 가졌던 이중적 모습(신념과 동경)을 반추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윈터 홀은 암살국이 옳은 기관인지의 여부와 그들이 갖는 명분의 정당성에 대해 따지지만, 설령 정당성이 있다고 하더라도 누가 그들에게 그 명분과 정당성을 부여할 수 있는가도 생각해볼 문제다.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점점 더 결말이 궁금해지지 않을 수 없다. 독자는 그들의 부조리를 알면서도 어느새 아무도 죽지 않기를 바라게 된다. 잭 런던은 걸핏하면 철학적 딜레마에 빠져 자기들끼리 논쟁을 주고받는 이 못말리는 고지식하고 고집불통 지성인 집단을 통해 하고 싶었던 말은 무엇이었을까? 어떠한 유혹에도 흔들리지 않는, 뿌리가 단단하게 내려서 원칙과 신념이 존재하는 사회를 희망했던 것이었을까, 아니면 미혹에 흔들리지 않는 사람이 되고 싶었던, 스스로에게 바라는 소망을 담은 것이었을까.   


윈터 홀뿐만 아니라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자기모순ㅡ계약이 만료되어 그루냐의 결혼식을 보고 싶은 마음도 크지만, 결국 자기가 살아남는다면 그가 세운 암살국의 완벽한 시스템의 부정否定이 된다ㅡ에 괴로워하는 드라고밀로프의 모습 역시 잭 런던의 한 단면이지싶다(그런데 사실 소설의 결말은 잭 런던이 쓰지 않았다. 물론 그가 의도한 바와 크게 다르지 않다).  



쓰다보니 스스로를 '생각하는 기계'라고 칭하며 인생을 살지 못했다고 말하는 드라고밀로프의 말이 문득 떠올랐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학업을 마치고 취업을 하든 사업을 하든 각자 나름의 성공적인 경제 성과를 이루며 살아가고 있다. 참 열심히 사는데 어째 삶의 생동감은 크지 않다. 이러한 드라고의 회한 아닌 회한은 소설의 맥락과 조금 동떨어져있다는 느낌이 들기도 하는데, 끝내 마무리를 하지 못했던 작가의 당시 심경이 이와같지 않았을까, 나 나름대로 짐작해본다. ( 꽤 공감하는 부분이기도 하고.)


나는 소설을 읽으면서 어쩐지 내용 자체보다 그가 어떤 마음으로 등장인물들을 설정했을지에 더 마음이 쓰였다. 죽음조차 두려워하지 않는 강한 사람이 되기를 바랐지만 단단하지 못한 삶을 살았던 그의 바람이 다 담겨있는 듯 느껴졌다.   


책을 덮으면서 상상해본다.
호놀룰루의 어느 섬에 모여 현실적으로 영양가 하나 없는 그 열띤 논쟁을 벌이는 유쾌한 그들의 모습을, 그리고 그들 가운데에서 웃고 있을 젊은 홀과 그루냐를.  




※ 출판사 지원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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