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이름은 데몬 코퍼헤드
바버라 킹솔버 지음, 강동혁 옮김 / 은행나무 / 202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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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덮고 곧바로 리뷰를 쓰지 않았다. 서른 살도 되지 않은 데몬의 삶의 궤적을 다시 짚어보고 싶었다. 자신을 엄마의 '나쁜 선택'으로 태어났다고 믿는 아이. 아들을 사랑하지만 마약 및 알콜 중독으로 가정을 돌볼 수 없는 엄마. 소설은 이렇게 시작한다.  


1980년부터 1990년대까지(소설은 2000년 초까지 이어진다) 사실상 미국의 서민들이 겪어왔던 사회적 문제들을 고스란히 담아내고 있다. 공공기관의 부정부패, 위탁 가정 및 위탁 가정을 통해 본 사회복지국과 의료 체계의 허점, 정치 기업 의료계의 유착, 청소년 마약 중독, 빈부격차, 유색 인종 및 성소수자 혐오, 힐빌리로 통칭하는 백인 취약계층 차별, 균등하지 못한 교육 제도, 열악한 노동 환경과 과잉노동, 산업 현장의 기계화로 인한 실업, 이 모든 것이 결과로 나타나는 가난과 불운의 대물림.  





 



데몬은 나고 자란 환경에 의해 노력을 통해 얻은 성취에도, 누군가의 인정과 칭찬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스스로를 의심하는 모습을 보인다. 데몬의 영재성을 알아봐준 암스트롱 선생님과 그의 그림에 남다른 재능을 발견한 애니 선생님 말씀에도, 미식축구팀 제네럴스에서 확고하게 자리를 잡고 학교 내에서도 인싸가 되었음에도, 데몬의 자존감은 낮았다. '여전히 자신을 아무 가치 없는 똥 덩어리라고 여겼다. 자신은 언제든 고아 계급으로 돌아가게 되리라 예상하고 그에 걸맞는 평판을 꾸며대려' 했다.  


그러나 독자가 데몬에게서 눈을 뗄 수 없는 이유는 그가 무엇보다 성장을 원했고, 결정적으로 스스로의 삶을 '선택'했다는 사실이다. 그 선택의 결과가 좋든 나쁘든 데몬에게는 삶의 전환점이 된다. 암스트롱과 애니 선생님과의 만남, 할머니 벳시 우들을 찾아낸 일, 부상을 핑계 삼은 자퇴, 도리와의 연애와 동거, 그리고 라이라와의 만남. 


많은 일들이 있었고 수동적으로 이끌려 다니는 순간도 있었지만 결국 자신의 길을 결정한 사람은 데몬, 그 자신이었다. 그 기준이 옳고 그름을 떠나서 페곳 부부를 기다리지 않고 벳시 할머니를 찾아나선 처음 선택부터 주변의 충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도리를 떠나지 않았던 일, 가까운 이들을 위해 위험을 감수하며 서슴치 않고 나선 행위, 준 이모의 제안을 받아들여 재활 센터로 들어간 일, 앵거스의 조언을 허투루 듣지 않았던 점, 라이라의 도움을 사심없이 수용하고 배움을 얻었던 일. 열악한 환경에서 데몬은 자신의 삶을 능동적으로 헤쳐나갔다. 


ㅡ 


열 살 아이가 자라서 무엇이 되고 싶냐는 질문을 한 번도 받아보지 못한 채 자란다는 건 계속 살아남는다는 뜻이라고 말한 데몬의 주변에 '어른'은 없었다. 위탁 가정을 운영하면서 양육비를 갈취하고 제대로 된 음식과 잠자리도 제공하지 않은 채 아이들의 노동력까지 착취하는 크릭슨과 매코브. 유일하게 마음을 붙일 곳인 페곳 가족의 집은 금지를 당하고, 집도 위탁 가정도 가고 싶지 않은, 그저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되고 싶은 어린 데몬의 고립은 안타까움, 그 이상이다.  


데몬의 이야기가 흘려 읽히지 않는 이유는 그의 서사가 국가와 도시를 막론하고 지금도 현재진행형이기 때문이다. 가정폭력은 어제 오늘 일이 아니고, 마약 문제는 더 커지고 있다. 우리 주변에도 부모와 분리 조치되어 가족없이 성장기를 보내야하는 아동과 이렇다할 지원없이 자립을 준비해야하는 청(소)년들이 많다. 데몬의 주변에는 그가 흔들릴 때마다 붙잡아주고 도움을 준 사람들이 있었다. 암스트롱과 애니 선생님, 준 이모, 앵거스, 토미, 라이라 등 그들이 없었다면 데몬이 제 삶을 살 수 있었다고 장담할 수 없다. 데몬 역시 에미, 매곳, 토미, 해머를 돕기 위해 적극적으로 몸을 던졌고, 끝까지 도리를 혼자 두지 않았다. 가끔은 우리도 누군가의 '준 이모'가 될 필요가 있다. 


ㅡ  


이 책을 읽기 시작할 때 마침 두 권의 책을 완독한 직후였다. <그들의 슬픔을 껴안을 수밖에> <아빠가 엄마를 죽였어>. 여타 다른 책에서도 발견할 수 있는데, 가정폭력에서 아버지가 자식을 학대하고 폭행하는 데에 어머니가 방관하는 이유는 대체로 세 가지다. 남편의 가스라이팅, 남편에 대한 두려움, 그리고 경제적 능력의 부재. 여러 책을 접하면서 마지막 이유가 가장 자주 등장한다. 우리가 섣불리 방관자 혹은 동조자인 어머니를 비난하기 어려운 점은 이 이유가 한 개인이 해결하기에는 너무 어렵기 때문이다. 소설에서도 데몬의 어머니는 재혼한 남편 스토너에게 딱 한 차례로 아들을 건들지 말라고 얘기하지만, 구타 한 번에 태도를 바꾼다. 여기에는 폭행에 대한 두려움도 있겠지만, 남편의 경제력이 가장 컸을 것이다. 소설에서 다른 선택을 한 머라이어는 아들을 구해냈으나 자신은 12년 동안 감옥에 갇혀 아들과 떨어져지내야만 했다. 


이 소설이 정말 좋은 작품이라고 생각되어지는 지점은 스토리의 힘도 크지만, 한 명 한 명, 빌런을 따라가다보면 거미줄처럼 촘촘하게 엮어진 부정부패의 카르텔이 드러나고 작가는 이를 면밀하게 짚어낸다. 앞서 언급했던 의사 - 제약회사 - 판매상으로 이어지는 마약 루트, 정부가 지원하는 담배 사업의 폐해가 가장 취약한 아동 노동의 착취와 위탁가정로 이어지기까지의 과정 등 이외에도 당시(사실은 현재에도) 사회적 문제와 부조리한 법 제도를 거시적 관점에서 들여다보면서 이를 주인공 데몬의 삶과 밀착해 보여주는데, 결국 이와같은 일들이 우리 삶과 동떨어져 있지 않음을 말하고 있다. 아마도 800쪽이 넘는 소설을 단박에 읽게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지 않을까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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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츠 카프카 : 알려진 혹은 비밀스러운
라데크 말리 지음, 레나타 푸치코바 그림, 김성환 옮김, 편영수 감수 / 소전서가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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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야말로 카프카에 대해 어렵지 않게, 한눈에 알 수 있는 그래픽노블이다. 이 책은 평전같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카프카 안내서 같기도 하다. 책의 마지막에는 카프카가 머물거나 들렀던 지역과 식당 들 명칭과 카프카가 그곳에서 어떻게 지냈는지 두어줄에 걸쳐 아주 간단하게 적어놓았는데 다른 책에서는 쉽게 볼 수 없는 부분이다.  


<추천의 말>을 통해 이 책이 목적하는 바가 잘 드러난다. 카프카와 그의 작품에 대한 잘못된 혹은 왜곡된 정보를 바로잡고 불충분한 정보를 보충한다고 썼는데, 카프카의 삶의 궤적과 <변신>을 비롯한 몇 개의 단편을 다루면서 문학가를 넘어 인간 카프카에 대해 삽화와 함께 이야기한다. 






프란츠 카프카가 성장했던 당시 프라하의 혼란스러웠던 사회적 배경과 만연했던 유대 민족에 대한 압력과 긴장은 카프카에게도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거기다 가정 내에서 가부장적이고 보수적이었던 아버지와의 불편한 관계는 이미 알려져 있는 사실이다. 그러나 저자는 대중이 알고 있는 것처럼 카프카가 유별난 별종이 아니었음을 짚는다. 카프카는 사람들의 고정관념과는 다르게 지극히 평범한 사람이었다. 극장에 가는 것을 좋아하고, 여행광이었으며, 항공 기술같은 새로운 기술 동향에 민감했고, 스포츠를 멀리 하지 않았고, 정원도 가꾸었다. 비흡연자였고, 건강이 나빠지기 전까지 채식주의자였다. 또한 우정과 사랑에 있어서도 인상적인 만남들이 있었다. 카프카의 마지막 연인이었던 도라가 언급한 에피소드를 읽으면 그는 참 따뜻하고 배려심이 있는 사람이었음을 알 수 있다.이렇게 몇 줄 만으로도 우리에게 익숙한 카프카와는 사뭇 다른 모습이지 않은가.


특히 그의 직장 생활은 정말 의외의 연속이다. 예전에 강의를 통해 그의 직장 생활에 대해 알게 됐을 때 꽤 놀랐던 기억이 있다. 보험 공사에서 근무했던 카프카는 수석 서기관(이 직책은 제1차 세계대전 징집 대상에서 제외되는 사유가 될 정도로 고위직이다)까지 승진할 정도로 성실하고 능력있는 직장인이었다. 심지어 그가 폐결핵 투병 때문에 사직서를 제출했을 때 그의 능력이 워낙 출중해 반려되었다. 그의 소설을 읽다보면 직업인으로서의 경험들이 작품 속에서 보여진다.   



저자가 지적하는 점 중에서 새삼 눈에 들어온 부분은 카프카의 친구인 막스 브로트가 카프카 사후 출판한 작품들이 막스 브로트의 시선으로 본 것임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고 쓴 부분이다. 카프카의 이미지와 유산을 막스 브로트의 독자적인 시선에 따라 재해석한 것으로도 볼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이 부분에 대해서는 브로트가 '아메리카'로 출판한 <실종자>가 대표적인 사례가 아닐까싶다. 제목도 그렇지만 내용의 결말도 사뭇 다른 방향으로 전환된 것으로 알고 있다).


자신이 죽은 뒤 미출간 작품을 모두 불태워달라는 카프카의 부탁을 묵살하고 소설뿐 아니라 일기, 편지, 전기 등을 출간한 막스 브로트에 대한 이야기는 알만한 사람은 다 아는 사실이다. 어떤 의도였는지 그의 진짜 속내야 알 수 없지만, 사후 노골적으로 카프카의 유명세를 이용한 지인들도 있었다는 점에서 개인적으로 아주 순수하게만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2015년 6월, 이스라엘 대법원은 카프카의 모든 문학적 유산을 지닌 막스 브로트 비서의 딸(이 부분도 참 납득이 안 되기는 마찬가지)로 하여금, 모든 문서가 담긴 가방을 예루살렘의 국립 도서관으로 넘겨야 한다고 판결했다. 이 문서에는 미출간된 원고와 단편소설에 포함된 스케치 그리고 카프카의 알려지지 않은 드로잉들이 포함되어 있을 것으로, 저자는 짐작한다. 


체코 문화에 적응하기 어려워했음에도 일생의 대부분을 프라하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던 카프카는 자신의 인생이 프라하라는 원 안에 담겨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정작 체코 문학계에서 그의 작품이 자리를 찾아가는 길은 녹록치 않았다. 그 과정을 짧게나마 읽으면서 문득 앞서 서술한 카프카 작품의 소유권에 대한 내용이 다시 생각났다. 예전부터 이스라엘이 카프카의 모든 문학적 유산을 주장하는 데에 대해 의구심이 들었는데, 체코는 어떤 입장을 취했는지 궁금해었더랬다. 카프카의 유산이 개인의 것이 아니라면 그의 작품은 어디에 귀속되는 것이 적절할까.  



소음에 민감한 카프카가 글을 쓰기 위해 조용한 장소를 필요로해서 이사를 자주 다녔다. 많은 이사 끝에 그가 안착한 집은 <황금 골목 22>. 단편집 『시골 의사』에 수록된 거의 모든 작품을 이곳에서 완성했다. 당시에는 조용한 지역이었지만, 지금은 유명세로 수천 명의 관광객이 다녀가는 곳이다. 저자는 카프카를 찾는 관광객들 중에서 카프카의 진정한 영혼을 들여다볼 수 있는 사람이 얼마될지, 작품뿐 아니라 인간 카프카를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지 묻는다. 그 물음에 대한 답은 저자가 직접 책의 다른 지면에 써놓았다. 


"본질적으로 카프카는 이 세계와 갈등을 겪었고, 아직까지도 세계는 여전히 그와 갈등을 겪고 있다."  


 "우리는 카프카의 모든 작품을 속속들이 다 이해할 수 없다. 또한 카프카도 모두 다 이해하라고 쓰진 않았을 것이다."  



ㅡ 


대략 6,7년 전쯤에 1년 가까이 재미삼아 문학 강의를 들은 적이 있었다. 현장 강의도 있었고, 온라인 강의도 있었는데 내가 선택한 대부분 작가들은 러시아 작가들이었는데 그중 몇 안 되는 유럽 작가 중 한 사람이 카프카였다. 3회(카프카 강의 횟수가 정확하게 기억나진 않지만)에 걸친 강의가 지루한 줄 모르고 재미있었다. 이 책은 그 몇 시간짜리 강의의 요약본이라고 생각해도 될 것 같다. <변신>의 그레고르 잠자, <소송>의 요제프 K의 모습이 카프카의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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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슈비츠의 자매 - 나치에 맞서 삶을 구한 두 자매의 실화
록산 판이페런 지음, 배경린 옮김 / arte(아르테) / 202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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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로코스트에서 생존한 유대인 두 자매의 실화를 쓴 이 이야기는 제2차 세계대전 발발 직전부터 종전까지 유대인들의 삶의 궤적을 보여주는 것을 넘어서 네덜란드를 배경으로 나치당이 유럽의 국가 함락, 정부 및 유대인 공동체 장악, 시민 사회로부터 유대인 분리 고립, 파시스트 프로파간다, 인종 학살을 하기까지의 과정 및 방식, 그리고 나치당을 향한 유대인을 포함한 민간인 저항 운동이 비교적 구체적으로 쓰여있다. 온라인 서점에서는 이 책을 '에세이'로 분류했는데 개인적으로 두 여성의 전기에 가까운 책이라고 생각한다.  





 

낙천적이며 예술적 재능을 타고 난 언니 린테 브릴레스레이퍼르, 현실적이고 타고난 반골 기질과 뚝심있는 강인한 성품의 동생 야니 브릴레스레이퍼르.  


야니가 정부 방침을 강력하게 거부했다면, 린테는 순순히 따랐다. 린테가 매번 희망을 기대했다면 야니는 희망은 없다고 여겼다. 네덜란드의 16만 유대인 신분증에 J표식이 새겨졌을 때 야니는 이를 거부했고, 상황을 낙관적으로 본 린테는 정부 방침에 순응했다. 기질을 떠나서 브릴레스레이퍼르 삼남매는 저항활동에 적극적으로 투신하는데, 이후 이들의 삶을 따라가보면 하이네스트에서 체포되기 전까지 그야말로 천운이 따랐다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다. 


ㅡ 


이 책의 인상적인 부분은 아무래도 <2부 하이네스트>이다. 2부에서는 전쟁 중에도 마치 별천지 같았던 하이네스트와 유대인 수용소를 대비시킨다.  


아무리 외딴 지역에 요새같은 여름별장이라고 하더라도 친 나치 지역 한가운데에서 꽤 오랜 시간을 브릴레스레이퍼르 가家의 대가족뿐만 아니라 도망자들의 은신처였고, 거기다 저항운동 거점 역할을 했다는 사실은 놀라운 일이다. 그들은 그곳에서 가족, 친구와 동지, 도망자들과 함께 노래와 춤을 즐기고, 피아노를 연주하고, 숲이 주는 계절의 아름다움을 누렸다. 그들은 작은 이벤트를 마련했고, 서로를 격려하고 의지했다.  
나치가 유대인을 가득 실은 기차를 수용소로 보내던 1943년, 하이네스트에서는 이디시 문화와 더불어 다양한 예술이 꽃피기 시작했다. 춤, 연주, 노래, 낭독회가 끊이지 않았다. 이렇게 소란스러웠음에도 나치와 독일군, 부역자 이웃들까지, 어느 누구도 이 많은 사람이 하이네스트에 오간다는 사실을 꿈에도 알지 못했다. 하이네스트의 배반자가 나타나기 전까지는.  




3부에서는 하이네스트에 은신해 있던 모든 사람들이 가택 수색으로 체포된 후 수용소 생활을 본격적으로 서술하고 있다.  


베스테르보르크 - 아우슈비츠 - 베르겐-벨젠으로 이어지는 수용소 생활에 대한 처참한 실상은 다른 문헌에서 익히 알고 있는대로 참혹하기 그지없다. 공장식 학살 시설이었던 아우슈비츠만이 지옥이었을까. 베르겐-벨젠에는 '화덕'은 없었지만, '방치'가 있었다. 온갖 역병이 돌고, 산 사람과 죽은 사람과, 쥐가 뒤섞여 있는 그곳은 인간 존엄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그야말로 생매장 당하는 무덤이었다.  


베르겐-벨젠에서 브릴레스레이퍼르 자매와 프랑크 자매를 비롯한 아홉 명의 여자들은 서로를 돌봤다. 물리적인 것뿐 아니라 정서적인 측면에서도 위로를 하며 정신적으로 버팀목이 되어 주었다. 자매는 지옥같은 상황에서 동맹을 맺고 연대할 수 있는 이들을 찾아나선다. 위에서 '천운'이라고 썼지만 그 천운은 자매 스스로 만들어낸 결과일지도 모른다.  


린테에게 죽음이 다가오면 야니가 그 앞을 막아섰고, 야니가 죽음의 덫에 걸려들라치면 린테가 잡아끌었다. 그들이 살 수 있었던 것은 서로가 있었고, 남편과 아이가 살아있을 것이라는 희망때문이었다. 그들, 자매를 비롯한 생존자와 저항자 들의 삶 자체가 기적이다. 



우리가 그동안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점이 유대인 저항운동가에 대한 부분임을, 이 책을 통해서 깨달았다. 유대인 표식을 거부하고, 본인조차 한 치 앞의 나락을 알 수 없는 상황에서 독일군 점령지 한가운데를 들락거리며 위조 신분증을 만들어 다른 유대인의 은신과 탈주를 도모한 유대인들. 신념과 소신에 따라 제국주의 전쟁을 거부하고 탈영해 도망자가 되어 정치범으로 낙인 찍힌 사람들. 그안에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많은 예술가와 문학가들도 있다.  



이 책을 읽으면서 가슴을 눌러내린 답답함이 있었다. 현재 여기저기에서 벌어지는 전쟁과 그에 따른 수많은 난민들이 동시다발적으로 떠올려졌기 때문일 것이다. 발가벗겨져 가스실에 밀어넣어지고 정원에 몇 십 배에 달하는 막사에 짐승처럼 구겨져 들어가 죽음을 기다리는 그들의 모습. 어린이 병원과 난민촌에 폭격을 가해 무너진 콘크리트 더미가 가스실과 다르다고할 수 있을까.  


잠깐이나마 낭만적이라고 느껴졌던 '하이네스트'.
나날이 발전하는 살상무기 때문에 이제는 어디에서도 '하이네스트'는 존재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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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간을 걷다 현대문학 핀 시리즈 소설선 51
김솔 지음 / 현대문학 / 202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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뇌졸중 이후 자신이 왼쪽과 오른쪽, 절반으로 나뉘었다고 말하는 화자는 사라진 자신의 오른쪽 절반을 '그'라는 3인칭으로 혹은 '너'라는 2인칭으로 지칭한다. 그러다 시간이 지나면서 '쉥거'라는 이름을 붙여준다. 







소설은 '금고'와 '하천'을 중심축으로 이야기를 구성한다. 서른 살 차이나는 젊은 아내를 대상로 한 유언장과 이혼 서류가 들어있는 금고는 누구도 쉽게 열 수 없는 폐쇄된 공간이며, 하천은 수십 년의 세월을 이어온 그야말로 역사의 현장으로서 열린 공간이다. 특히 해방 무렵을 시작으로 우리나라의 현대사를 빗대어 정리한 십여쪽의 내용은 더할나위 없이 깔끔하다. 



'금고'는 불의, 부정, 황금, 욕망, 부끄러움 등 치부를 숨기는 장소라면, '하천'은 공개적으로 치부가 드러나는 곳이다. 결국 '금고'와 '하천'은 보기에는 다르지만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음을 얘기하고 있는 건 아닐까. 어쩌면 두 공간은 곧  화자 '나'와 또다른 자아 '쉥거'이기도 한데, 이러한 이중성이 존재하는 곳이 바로 우리가 사는 세상이다. 


하천을 중심으로 펼쳐진 인간군상과 세상사를 마치 스냅사진처럼 찍어놓는다. 도시 난개발, 권력자의 부정부패, 본질을 상실한 일회성 제도 남발, 환경 문제, 젠트리피케이션, 외국인 이주 노동자 차별, 노인과 장애인 혐오, 근친 살해, 안전 부재 등 현대 사회의 문제점들을 관통하면서 소설은 세월의 흐름에 따라 사진을 꽂아놓은 앨범처럼 읽힌다. 우리를 늘 딜레마로 빠뜨리는 시대의 양면성을 보여주는 소설 속 '하천(변)'은 화자의 죽어버린 한쪽과 아직은 살아있는 다른 한쪽이 때로는 대립하고 때로는 의기투합하는 것처럼 인간의 모순과 양면성을 대변하고 있다. 뇌졸중에 걸려 죽음을 목전에 둔 화자의 자아가 둘로 쪼개진 이유는 자신의 죄악을 각성함과 동시에 지난 과오를 인정하고 회개하는 자아와 그렇지 않은 자아의 갈등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천을 중심으로 무수한 이슈들이 생겨났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하고 끊임없이 사고가 이어진다. 자본주의 체제에서 대체자들은 계속해서 바뀌어가고, 욕망만이 소비될 뿐이다. 이기주의와 개인주의, 이상과 현실, 선의와 위선, 폭력과 저항, 실리와 명분, 속죄와 용서, 모순과 이중성, 빛과 어둠. 근본적인 문제는 회피한 채 문제 해결을 위한 노력보다는 임기응변으로 상황을 무마하려는 세태와 신뢰와 사랑은 사라지고 이기적인 욕망만 남은 모습은 화자가 금고에 부착한 기폭 장치와 같다.  


사람마다 손에 새겨진 지문이 제각각 다르듯 비슷하게 보이지만 저마다 삶의 지문 역시 다를 수밖에 없다. 역사의 궤도에서 모든 사람이 생의 흔적을 남길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해서 존재 사실마저 부정할 순 없다. 그것이 아름답든 추악하든. 읽으면서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다. 제목에서 보여지듯 독자는 소설에서 보이는 내용보다는 그 이면에 있는 화자와 쉥거에 대해, 소설에서 드러나지 않은 숨은 얘기에 대해, 더 생각해야할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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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 - 책과 혁명에 관한 다섯 밤의 기록, 개정판
사사키 아타루 지음, 송태욱 옮김 / 자음과모음 / 202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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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에서 첫 출간됐을 당시 나는 사사키 아타루에 대해 몰랐다. 서점을 서성거리다 다소 자극적인 제목이 눈에 들어와 처음 몇 장을 읽어보고 산 책이었다. 한 번 읽고 얼마 안 있어 빌려간 친구가 책을 잊어버려 재독의 다짐도 덩달아 어영부영 잊혀졌는데 개정판 출간 덕분에 다시 읽는다. 







이 책의 핵심은 '책을 읽는 것'이다. '읽는 것'이야말로 혁명이라고 말한다. 이 혁명은 정치, 법, 종교, 문학, 예술, 교육, 과학에 이르기까지 인류사 대부분에 영향을 미친다. 그리고 폭력인 아닌 문학으로 이뤄낸 혁명은 아이, 여성 등 약자들을 수호한다.  


'요즘의 독서는 과연 읽는 것인가?'라는 질문에서부터 시작하는 저자는 정보를 모은다는 것은 명령을 모으는 일이며 미디어의 익명성 아래에 감추어진 누군가의 부하로서 영락해가는 것이고, 정보에 매물되면 스스로를 가두게 된다고 일갈한다. 그리고 이에 대한 연장선으로 비평가와 전문가를 예로 드는데 '모든 것에 대해 모든 것을' 말하려는 비평가, '하나에 대해 모든 것을' 말하려는 전문가는 그들 모두 자신을 '완벽한 전체성'을 가진 만능인으로 내세우려고 한다면서 이것은 전체주의적 환상과 다르지 않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책을 읽는다는 것, 글을 쓴다는 것은 어떤 일인가. 
텍스트란 마주 보는 것, 마주 볼 수밖에 없는 것이며 무의식으로 접속한다는 것이라고 고, 또한 책은 되풀이해서 읽어야하고 어떠한 목적 없이 그 자체가 즐거워서 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독서라고 썼다.  


이 책의 초반에 눈에 들어오는 부분은 '읽고 쓰는 모든 것'을 문학이라고 할 수 있다고 주장한 지점이다. 언어예술, 즉 미적인 것에만 관련지으면 문학은 역사적, 지리적으로 굉장히 좁게 한정된 용법이라는 점이다. 또한 읽고 쓰고 번역하고 편찬하는 것까지 포함했던 오래 전 과거를 떠올려볼 때 오늘날 우리가 문학이라고 부르는 것이 예전에는 광대한 영역을 차지했던 것에 비하면 오늘날에는 상당히 좁아졌음을 지적한 부분이다. 저자는 반反 정보로서의 문학, 회태로서의 문학, 세계를 변혁하는 것으로서 문학의 의미 범위를 더 넓혀야 한다고 강조라는데 책 전반에 걸쳐 이에 대해 서술한다.  


ㅡ 


저자는 시종일관 문학은 혁명의 근원이라고 반복하며 강조한다. 혁명의 본질은 폭력이 아니라 텍스트를 다시 쓰는 것이고, 반복적으로 책을 읽는 것이야말로 혁명이라고 끊임없이 이야기한다. 문학은 혁명의 힘이고, 혁명은 문학으로부터만 일어난다. 이후의 내용은 니체, 라캉, 푸코, 들뢰즈 등을 통한 철학적 사유와 제임스 조이스, 사무엘 베케트를 인용한 삶의 연속성과 공생이 문학이 갖는 저항의 증명이라고 이해했다. 


인문학이 위기를 맞고 과학의 시대가 도래했다는 의견을 거부하는 저자는 특히 문학자이면서 문학과 철학에 종말을 고하는 자들을 강하게 비판한다. 읽을 수 있으면서 읽을 수 없게 된, 혹은 읽으려 하지 않는 자들과 문맹이지만 처절하게 읽기 위해 고투하는 자들을 대비시킨다. 전자는 아무리 말을 해도 소용이 없다면 후자야말로 혁명가다.   
문맹률이 90퍼센트인 시대에도 수많은 학자와 사상가와 작가들은 글을 쓰고 출판했음을 상기하면서 현재에 문학이 위기라거나 끝났다는 말은 어처구니 없는 일이라고 말한다. 문학과 예술과 혁명이 살아남아야만 인류가 살아남는다.


또한 앞서 언급했던 루터, 무함마드, 도스토옙스키, 베케트, 버지니아 울프 같은 사람들은 계속 등장할테니, 들뢰즈의 말을 빌어 부흥기와 침체기가 있을 뿐 문학(아마도 여기서 말하는 문학은 '미적 문학(저자의 표현)'의 범위를 넘어선)은 사라지지 않음을 말한다. 무엇보다 모든 사람들이 읽고 쓰는 것을 멈추지 않는 한 그들 각각의 인생은 무의미하지 않으며 그러한 삶 자체가 의미인 것임을 전한다. 결국 매일 읽고 쓰는 것을 놓지 않을 때에 우리 일상의 소소한 삶이 곧 혁명이라는 것일테다. 


책의 제목은 저자 본인이 밝혔듯 파울 첼란의 시에서 가져온 것인데, 아마도 기도만 하지 말고 그 손으로 읽고 쓰라는 게 아닐까싶다.




※ 도서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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