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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 - 책과 혁명에 관한 다섯 밤의 기록, 개정판
사사키 아타루 지음, 송태욱 옮김 / 자음과모음 / 2024년 4월
평점 :
우리나라에서 첫 출간됐을 당시 나는 사사키 아타루에 대해 몰랐다. 서점을 서성거리다 다소 자극적인 제목이 눈에 들어와 처음 몇 장을 읽어보고 산 책이었다. 한 번 읽고 얼마 안 있어 빌려간 친구가 책을 잊어버려 재독의 다짐도 덩달아 어영부영 잊혀졌는데 개정판 출간 덕분에 다시 읽는다.

이 책의 핵심은 '책을 읽는 것'이다. '읽는 것'이야말로 혁명이라고 말한다. 이 혁명은 정치, 법, 종교, 문학, 예술, 교육, 과학에 이르기까지 인류사 대부분에 영향을 미친다. 그리고 폭력인 아닌 문학으로 이뤄낸 혁명은 아이, 여성 등 약자들을 수호한다.
'요즘의 독서는 과연 읽는 것인가?'라는 질문에서부터 시작하는 저자는 정보를 모은다는 것은 명령을 모으는 일이며 미디어의 익명성 아래에 감추어진 누군가의 부하로서 영락해가는 것이고, 정보에 매물되면 스스로를 가두게 된다고 일갈한다. 그리고 이에 대한 연장선으로 비평가와 전문가를 예로 드는데 '모든 것에 대해 모든 것을' 말하려는 비평가, '하나에 대해 모든 것을' 말하려는 전문가는 그들 모두 자신을 '완벽한 전체성'을 가진 만능인으로 내세우려고 한다면서 이것은 전체주의적 환상과 다르지 않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책을 읽는다는 것, 글을 쓴다는 것은 어떤 일인가.
텍스트란 마주 보는 것, 마주 볼 수밖에 없는 것이며 무의식으로 접속한다는 것이라고 고, 또한 책은 되풀이해서 읽어야하고 어떠한 목적 없이 그 자체가 즐거워서 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독서라고 썼다.
이 책의 초반에 눈에 들어오는 부분은 '읽고 쓰는 모든 것'을 문학이라고 할 수 있다고 주장한 지점이다. 언어예술, 즉 미적인 것에만 관련지으면 문학은 역사적, 지리적으로 굉장히 좁게 한정된 용법이라는 점이다. 또한 읽고 쓰고 번역하고 편찬하는 것까지 포함했던 오래 전 과거를 떠올려볼 때 오늘날 우리가 문학이라고 부르는 것이 예전에는 광대한 영역을 차지했던 것에 비하면 오늘날에는 상당히 좁아졌음을 지적한 부분이다. 저자는 반反 정보로서의 문학, 회태로서의 문학, 세계를 변혁하는 것으로서 문학의 의미 범위를 더 넓혀야 한다고 강조라는데 책 전반에 걸쳐 이에 대해 서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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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는 시종일관 문학은 혁명의 근원이라고 반복하며 강조한다. 혁명의 본질은 폭력이 아니라 텍스트를 다시 쓰는 것이고, 반복적으로 책을 읽는 것이야말로 혁명이라고 끊임없이 이야기한다. 문학은 혁명의 힘이고, 혁명은 문학으로부터만 일어난다. 이후의 내용은 니체, 라캉, 푸코, 들뢰즈 등을 통한 철학적 사유와 제임스 조이스, 사무엘 베케트를 인용한 삶의 연속성과 공생이 문학이 갖는 저항의 증명이라고 이해했다.
인문학이 위기를 맞고 과학의 시대가 도래했다는 의견을 거부하는 저자는 특히 문학자이면서 문학과 철학에 종말을 고하는 자들을 강하게 비판한다. 읽을 수 있으면서 읽을 수 없게 된, 혹은 읽으려 하지 않는 자들과 문맹이지만 처절하게 읽기 위해 고투하는 자들을 대비시킨다. 전자는 아무리 말을 해도 소용이 없다면 후자야말로 혁명가다.
문맹률이 90퍼센트인 시대에도 수많은 학자와 사상가와 작가들은 글을 쓰고 출판했음을 상기하면서 현재에 문학이 위기라거나 끝났다는 말은 어처구니 없는 일이라고 말한다. 문학과 예술과 혁명이 살아남아야만 인류가 살아남는다.
또한 앞서 언급했던 루터, 무함마드, 도스토옙스키, 베케트, 버지니아 울프 같은 사람들은 계속 등장할테니, 들뢰즈의 말을 빌어 부흥기와 침체기가 있을 뿐 문학(아마도 여기서 말하는 문학은 '미적 문학(저자의 표현)'의 범위를 넘어선)은 사라지지 않음을 말한다. 무엇보다 모든 사람들이 읽고 쓰는 것을 멈추지 않는 한 그들 각각의 인생은 무의미하지 않으며 그러한 삶 자체가 의미인 것임을 전한다. 결국 매일 읽고 쓰는 것을 놓지 않을 때에 우리 일상의 소소한 삶이 곧 혁명이라는 것일테다.
책의 제목은 저자 본인이 밝혔듯 파울 첼란의 시에서 가져온 것인데, 아마도 기도만 하지 말고 그 손으로 읽고 쓰라는 게 아닐까싶다.
※ 도서지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