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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독의 와인 ㅣ 이렌 네미롭스키 선집 7
이렌 네미롭스키 지음, 하진화 옮김 / 레모 / 2026년 6월
평점 :
어머니와 딸의 이야기다. 일전에 읽은 『제자벨』이 '어머니'의 삶을 집중적으로 서술했다면, 이 작품은 사치스럽고 방탕하며 욕정에 눈이 먼 어머니를 바라보는 '딸'을 중심에 두고 있다. 제1차 세계대전과 러시아 혁명을 배경으로 하는 소설은 당시 시대상과, 중산층의 가식과 위선을 간접적으로 잘 보여주고 있는데 이 소설 역시 작가의 자전적 요소가 꽤 많이 녹아 있다.

벨라.
일상이 권태롭다. 집안일과 육아는 지긋지긋하다. 그녀를 행복하게 하는 것은 남편이 아닌 남자와 집이 아닌 호텔방이다. 파리에서 혼자 자유롭게 밤을 보내고 싶다. 다시 만날 일이 없는 남자와 일회성 밀회는 그녀에게 더할나위 없는 자극을 선사한다. 남편이 자신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알기에 그의 한없는 애정을 무기 삼아 자신의 쾌락을 정당화하고 이별 선언을 협박처럼 사용한다.
딸을 살아 있는 짐이자 불편함이라고 여긴다. 벨라는 경제적으로 부족함 없는 딸을, 아버지가 전 재산을 탕진해 가난했던 자신의 유년시절과 비교하며 질투를 하는 것으로 읽힌다. 그래서 딸을 향한 정서적 학대와 괴롭힘, 그리고 자기합리화를 하며 이기적인 행복을 주장하면서 불행했던 어린시절에 대한 보상을 받고자 하는 듯하다.
세월이 흘러 자신의 외모가 예전같지 않음을 슬퍼하고, 결혼을 후회하고, 지나간 남자들과 비켜간 다른 삶을 아쉬워한다. 늘 자유롭고 행복한 삶을 열망하는 벨라에게 있어서 자유란, 행복이란 무엇을 가리키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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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렌.
어린 시절, 소녀의 애정은 아버지를 향해 있다. 그러나 아버지 보리스의 괸심과 애정은 온통 아내에게 쏠려 있다. 부모에게 사랑받기가 글러버렸다는 것을 이른 나이에 깨우친 엘렌은 가정교사 로즈에게 집착하고, 어머니를 '저 여자'라고 지칭하면서 죽어버리기를 바라며, '저 여자'야말로 자신이 짊어져야할 십자가라고 생각한다.
열여섯 살에 자신의 심장이 썩어버린, 이제는 평범해질 수 없는 사람이라고 단정해버린 엘렌은 낳기만하고 사랑을 한 톨만큼도 주지 않았던 어머니에게 복수를 결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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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녀의 서사를 따라가면서 안타까웠던 점은 불행과 복수의 대물림, 어린 엘렌의 양육 환경이었다. 벨라가 품고 있던 이모에 대한 복수심은 어머니를 향한 엘렌의 복수심과 닮아 있다. 의도치 않았으나 외할머니의 고독과 불안이 그대로 전이된 양육 환경으로 인해 미래에 대한 거짓과 두려움에 짓눌렸고, 알면서도 모른 체 했던 외할아버지의 방관과 아버지의 방임, 그리고 사춘기 시기에 한곳에 정착하지 못하고 부유하듯 떠돌았던 불안정한 생활은 엘렌에게 많은 영향을 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승승장구하는 사업과 도박 중독으로 늘 부재 중이었던 아버지에 대한 애정까지 식어버린 엘렌이 마음 속으로 부모를 부르는 3인칭 호칭은 그의 억눌린 분노가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케 한다.
인상적인 장면은, 십대 초반에 그로스가家를 방문한 엘렌의 모습이다. 화장을 하지 않은 채 시선을 아이들에게 주고 있는 그로스만 부인의 모습을 보면서 씁쓸해하고, 어린아이처럼 제 어머니에게 매달리는 아이들을 마음 속으로 힐난하고, 지루해하면서 가식적인 웃음을 짓고 있는 그로스만 씨의 얼굴을 보면서 안도감을 느낀다. 이 장면에는 엘렌의 복잡한 마음이 그대로 드러난다. 벨라와 그로스만 부인의 비교를 통한 부러움. 마음껏 어리광을 부리는 아이들을 향한 질투. 벨라와 겹쳐지는 그로스만 씨를 통해 어느 집이나 '그 여자'같은 사람이 한 명은 존재한다는 것에 대한 안심. 아버지로부터는 물리적으로, 어머니에게는 정서적으로 버림받았다는 수치심까지 고스란히 보여지는 장면이다.
다른 하나는 엘렌이 핀란드에 머물 때. 피난을 떠나온 곳에서조차 홀로 남겨진 엘렌을 챙겨준 이는 생면부지의 부인들이다. 젊은 여인들에게 바느질과 자수를 배우면서 어느 떄보다 편안하고 즐거움을 느끼는 엘렌은 그들의 애정으로 안정을 찾는다. 원가정의 가족들과 거리를 두자 심리적으로 평온해진 셈인데, 씁쓸한 일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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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으면서 엘렌에게 마음이 쓰였던 이유는 그가 갖는 죄책감 때문이었다. 어머니에 대한 복수를 목적으로 막스를 향해 처음 교태를 부리고나서 자기도 어머니와 바를 바 없는 인간이라는 데에 자괴감을 느낀다거나 세월이 흘러 늙어버린 어머니를 보면서 연민과 두려움과 죄의식을 갖는 모습은 20년 세월 동안 그가 얼마나 많은 무게를 안고 살았을지 안쓰러운 마음이 컸다.
서로를 '짐'으로 여겼던 모녀.
엘렌은 끝끝내 젊음과 욕망만을 탐했던 벨라와 다른 삶을 살 수 있을까.
스무 살, 가족의 굴레에서 벗어나 진정한 인생을 향해 걸어나아갈 준비가 된 엘렌의 삶이 안온하기를. 이는 엘렌뿐 아니라 지금의 모든 가정폭력 피해자를 향한 마음이다.
※ 도서지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