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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기억의 피아니시모
리사 제노바 지음, 민승남 옮김 / 세계사 / 2009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별일 아니라고 넘겼던 사소한 건망증이 알츠하이머의 시작이었다고 판정을 받게 된 앨리스.
내 눈을 사로 잡았던 저 파란색의 나비는 스타카토처럼 끊기듯, 피아니시모처럼 매우 여리게……기억이 점차 희미하게 사라지는 형상이었던 모양입니다.
남부러울 것 없었던 50대의 하버드대 교수인 그녀에게 알츠하이머 판정은 믿을 수 없고 인정할 수 없는 현실이었습니다.
앨리스는 서럽게 흐느끼기 시작했다. 숨을 쉬기가 힘들었다. 그녀는 쉰살이었고 미쳐버릴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55)
연세가 드신 분들에게 찾아오는 노병 정도로 알고 있었건만, 전혀 예측하지 못했던 병이 이렇게 자신에서 갑자기 찾아왔음을 반영해주는 여러가지 증상들.
집 주위에서 달리기 하다가 가끔 집으로 가는 길을 잃고, 머릿속으로는 분명히 알고 있는 것인데 그 사물의 이름이 생각나지 않고, 무슨 강의를 해야하는지 잊게 되고, 학회에 참석하러 가는 것을 잊고, 심지어는 집 안에서 화장실 가는 길 마저 잃고 당황하는 그녀를 그저 참으로 가엾다고 안타까워하면서 한발짝 물러서서 바라보게 놔두지 않는 책이었습니다.
가족이나 제삼자의 눈으로 바라본 것이 아니라 앨리스, 본인의 관점에서 행복한 삶을 살아오던 한 여인이 점점 자신이 알던 모든 기억을 잃어가는 여정을 애잔하고 담담하게 그려나간 소설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지난날을 잃어가고 있습니다...............저는 지난날들 중 어떤 날을 기억하고 어떤 날을 지울 것인지에 대한 선택권이 없습니다. 알츠하이머란 병에 타협이란 없습니다..........전 다가 올 내일이 두려울 때가 많습니다. 내일 잠이 깨서 남편을 몰라보면 어쩌지? 내가 어디있는지도 모르고 거울 속의 내 얼굴을 알아보지도 못하면 어쩌지? 난 언제부터 내가 아니게 될까? (324)
책을 읽으면서 두근두근 가슴을 졸이며 읽게 되는 것은 행여나 하는 우려감이 들었기 때문이지요.
습관처럼 같은 자리에 두지 않으면 늘 어디다 두었는지 여기저기를 뒤져서 찾아야 하고, 앨리스처럼 머릿속에서만 빙빙 도는 그것의 이름이 생각나지 않을 때가 있고, 가끔은 중요한 약속도 잊을 때가 있었음을 누구보다 잘 알기에.
정작 현실을 거부하고 싶은 사실에 힘든 것은 앨리스 본인이기도 하지만, 기억들이 순간순간 끊겨버리고 뭘하는지조차 모르면서 집안을 발칵 뒤집어 놓고, 과거와 현재의 기억이 뒤섞이는 등, 심해져가는그녀를 지켜보는 가족들의 안타까움과 고통, 갈등, 사랑, 두려움이 고스란히 저에게도 전해져 오는 시간이었습니다 .
사랑하는 가족들을 포함해서 자신이 안고 있던 모든 기억들이 서서히 떠나가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앨리스는 그저 울고만 있지는 않았습니다.
자신과 같은 병으로 고생하는 동료들을 찾아 모임을 만들었고 강연도 열었지요.
저의 지난날들은 사라지고 있고 다가올 날들도 불확실합니다. 그럼 전 무엇을 위해 살까요? 오늘을 위해 삽니다. 저는 현재를 살아갑니다. 어느날 저는 여러분 앞에서 이런 말을 한 사실조차 잊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어느날 그걸 잊게 된다고 해서 오늘 이순간을 살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오늘을 잊게 되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오늘이 중요하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327)
비록 앨리스의 의지로 선택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지만 자신이 앓고 있는 병에 굴복당하지 않고 당당하게 살아가는 앨리스에게 눈물어린 격려와 웃음 가득담은 찬사의 박수를 보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