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노센트 밀리언셀러 클럽 121
스콧 터로 지음, 신예경 옮김 / 황금가지 / 2011년 10월
평점 :
절판


"침대위에 한 남자가 걸터앉아 있었다. 아버지였다. 

침대보 밑으로는 여자의 윤곽이 드러났다. 어머니의 형체가."

 

....라는 문장으로 시작하는 <이노센트>는 '스콧 터로'의 87년작 <무죄추정>의 20여년 뒤의 이야기를 그린 후속작이다. 걸작이라는 무죄추정은 읽어보지 못했지만, 이 작가가 대단한 이야기꾼이라는 사실만큼은 이제 확실하게 안다.

살인혐의로 법정에 서게 된 한 판사의 재판을 통해 현 사법제도의 맹점, 허망함을 이야기한다. 무엇이 우리로 하여금 진실을 판단할 수 있게 하는가? 신념이 있으면 그것이 곧 진실이 되는가? 보여지는 것이 아닌, 그 진짜 이면에 대한 얘기다.

 

현직 판사인 러스티 사비치가 아내를 살해한 혐의를 받는다. 아내의 사인은 심장마비로 인한 자연사였지만, 이상한 것은 러스티가 사후 24시간 동안 시체를 방치한 채 신고를 하지 않았던 점. 러스티 판사에게 무슨일이 있었던 것일까? 정말 판사는 살인자인가?

그것을 판단하기 위한 단서로서 사건 전후의 러스티와 주변인물들의 행적과, 검사대리 토미가 러스티를 추적하는 일련의 과정이 보여진다. 판사의 인간성, 그리고 그 심성과는 모순되는 불륜, 위법행위, 뒷거래 등이 낱낱이 드러난다. 변호사 출신다운, 타인에 대한 관심과 섬세한 관찰력이 돋보이는 능수능란한 문장은 이 인간 드라마 안에서 벌어지는 일들이 의미하는 것들을 남김없이 읽어낼 수 있게 한다. 독자로 하여금 사건의 전말에 대한 하나의 '견해'를 만들어가게 한다. 

 

드러난 정황들에 대한 해석과 견해가 수시로 뒤바뀌는 이 책의 법정파트는 이것만 뚝 떼어내도 책 한권을 만들어 낼 수 있을 것 같은 이 소설의 클라이막스다. 검사대리 토미와 노련한 변호사 샌디의 치열한 법정공방은  촌철살인의 대사 뿐만 아니라 연극조의 임기응변이나 배심원들과 교묘하게 의사소통하는 법정기술이 난무하는, 그야말로 압권이다. 돌이킬수 없는 증거까지도 무효로 만들어 버리고, 상대를 논리의 틀안에 가둬 이도저도 못하게 만드는 묘수들은 법정 안에서 진실이 어떻게 만들어져 가는지를 똑똑히 보여준다.

 

치열했던 재판은 결국 끝이 나지만, 대단원의 막이 내려져야할 대목에는 짓궂게도 저자의 신랄한 물음이 기다리고 있다. 재판에서의 승리가 진실이 밝혀지는 것을 의미하는가? 그저 제일 마음에 드는 답을 선택한 것에 지나지 않는가 하고 말이다.

 

"흐리멍덩한 진실이야 항상 지천에 널려 있을 것이다."

 

정말로 법의 판결이란 그저 하나의 견해에 불과한 지도 모른다. 배심원들이 하는 일이야말로 바로 그들의 견해를 제시하는 것이지 않나? 진실의 추는 어떤 사실을 입증하기 위해 얼마나 노력을 기울이느냐에 의해 어느쪽으로도 옮겨 갈 수 있다.

이 책의 분량이 620페이지다. 그 대부분을 할애해 차곡차곡 쌓아온 논리의 탑을 한순간에, 법의 부질없는 노력이 빚어내는 한낱 광대놀음으로 만들어 버리는 그 치밀함은 감탄스럽다 못해 아름답기까지 하다.

마지막 챕터의, 오랜세월 법조계에 몸담아 오면서 느꼈을 회의감같은 것이 진하게 묻어있는 러스티의 독백은 의미심장하다. 

 

'다른사람의 마음이나 머릿속에 있는 생각을 어떻게 알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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