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독. 역시 도스토예프스키. 가난이 무서운가, 정신적 빈곤이 무서운가.

아아, 앞으로 저는 어떻게 될까요, 제 운명은 대체 어떻게 전개될까요? 불확실한 내일과 보장 없는 미래 그리고 앞으로 제게 어떤 일이 일어날지 짐작도 할 수 없는 현실만 생각하면 전 괴롭기만 합니다. 과거는 돌이켜 보는 것조차 무서워요. 잠깐만 회상을 해도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으니까요. 저를 파멸의 구렁텅이로 몰아넣은 사악한 사람들 때문에 저는 앞으로도 수많은 세월을 울고 울고 또 울어야겠지요. - P19
하지만 나는 그때 그와 무슨 얘기들을 나누었는지 생각이 잘 나지 않는다..! 다만 그때그때 머릿속에 떠오르는 얘기, 가슴속에서 솟아나오는 애기, 털어놓을 수밖에 없던 애기들 등 할 수 있는 모든 얘기를 다 했었다는 것밖에는. 우리는 행복에 가까운 감정을 느꼈다... 아아, 그것은 정녕 슬픔과 기쁨이 공존하는 시간이었다. 그 일을 돌이켜 보는 지금도 나는 슬픔과 기쁨을 동시에 느끼고 있으니..... 추억은 기쁜 것이든 슬픈 것이든 항상 괴로운 것이다. 최소한 나한테는 그렇다. 그러나 그 괴로움은 또 달착지근한 것이다. - P75
처음 나는 잠이 들지 않기 위해서 책을 읽었고, 시간이 좀 지나자 진지하게, 그리고 나중엔 책속으로 몰입하게 되었다. 그때까지 알지 못했던 낯설고 새로운 것들이 갑자기 한꺼번에 내 눈앞에 펼쳐졌던 것이다. 새로운 사상과 새로운 느낌들이 거센 물결처럼 한꺼번에 가슴속으로 밀려 들어왔다. 그런 흥분이 거세어질수록, 새로운 느낌을 받아들이는 것이 당황스럽고 벅찰수록, 나는 점점 더 깊이 그 낯선 느김에 빠져 들었고, 그 느낌은 점점 더 달콤하게 내 영혼을 뒤흔들어 놓았다. 새로운 느낌들은 한꺼번에내 가슴속에 들어와 북적거렸고 잠시도 쉴 틈을 주지 않았다. 기이한 혼돈 상태가 나의 존재를 뒤흔들었다. 하지만 그런 정신적인 충격도 나라는 사람을 완전히 뒤바꿀 만큼 혼란을 야기하지는 못했다. 나는 공상 속에 사는 사람이었고, 그것이 나를 지켜 주었던 것이다. - P76
하지만 지금부터는 모두 슬프고 괴로운 추억뿐이다. 내 인생에서 어두웠던 순간의 이야기가 시작되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손에 취고 있는 펜도 더 이상 써 내려가기 싫다는 듯 천천히 움직이고 있다. 여태껏 나는 이 애기를 조금이라도 늦게 하려고 행복했던 나날들의 아주 소소하고 상세한 일상까지 기억 속에서 끄집어내어 각별한 애정을 가지고 몰입하며 써 내려왔던 모양이다. 하지만 행복은 너무도 짧았다. 그 자리는 슬픔, 암울한 슬픔이 곧 대신했으니까. 불행이 언제 끝날지는 오직 신만이 아는 일이었다. - P87
당신이 저를 사랑하신다는 거, 저 잘 알고 있어요. 굳게 믿고 있어요. 그러니 선물로 그것을 상기시키는 일 따위는 정말 불필요한 일입니다. 당신이 선물을 주실 때마다 제가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아세요. 선물을 장만하시느라 당신이 어떤 희생을 치르시는지 잘 알고 있거든요. - P103
어떻게 하면 당신에게 아주 작은 도움이라도 되드릴 수 있을까요? 제가 무엇 때문에 그렇게도 당신께 필요하다는 겁니까? 제가 당신에게 뭐 좋은 일을 해드린 게 있어요! 영혼으로 당신과 하나가 되어 당신을 깊이, 진심으로 사랑하고 있다는 것밖에는 없잖습니까! 하지만 ㅡ 아, 슬픈 내 운명이여! ㅡ 제가 할 수 있는 것은 사랑뿐, 다른 좋은 일을 해드릴 수도 없고 당신의 은혜에 보답을 해드릴 수도 없잖아요. 더 이상 저를 붙잡지 마세요. 잘 생각해 보시고 당신 결정을 말씀해 주세요. 기다리겠습니다. - P129
저는 당신에게 익숙해졌습니다. 당신이 자꾸 이러시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아십니까? 저는 네바 강으로 갈 수밖에 없고 일은 거기서 끝나는 겁니다. 정말이에요, 바렌까, 그렇게 될 거예요. 당신이 없는 곳에서 저 혼자 남아 할 일이 뭐가 있겠습니까? - P131
아무 도움도 안 된다는 것인지, 한 번 더 생각해 보서요. 당신은 저에게 큰 도움을 주고 계십니다, 바렌까 당신이 얼마나 좋은 영향을 끼치고 계신데요. 지금 이렇게 당신에 대해 생각만 해도 저는 즐거워지는 걸요.... 가끔 당신께 편지를 쓰고 제 모든 감정을 거기에 토로하고 거기에 대한 자세한 답장도 받는걸요. - P131
가난한 사람은 까다로워요. 가난한 사람은 보통 사람과 다른 눈으로 세상을 쳐다보고 길거리를 지나는 사람들을 곁눈질로 쳐다봅니다. 주변을 항상 잔뜩 주눅이 든 눈으로 살피면서 주위 사람들의 한 마디 한 마디에 신경을 씁니다. - P158
이제는 제가 살아 있으므로 당신이 살아 있고, 당신은 저의 기쁨, 슬픔, 감정만 바라보며 살고 계십니다! 그런 당신을 바라보는 저는 어떨지 한번 생각해 보세요. 남의 일 때문에 항상 그렇게 마음을 쓰시고 깊이 동정하시다가는, 당신은 정말 이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사람이 되실 거예요. - P180
옛 추억에 홈뻑 젖어 저는 어린아이처럼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습니다. 모든 게 너무도 생생합니다. 손에 잡힐 듯 생생합니다. 지나간 날들은 눈앞에서 선명한데 현재의 삶은 흐리멍덩하고 어둠 속에 가려져 있습니다....! 어떻게 끝이 날까요, 대체 어떻게 이 모든 일이 끝나게 될까요? - P206
마침내 결론을 내렸습니다. 저는 그에게 시집을 가렵니다. 저는 그의 청혼에 승낙을 해야만 합니다. 그는 제게 치욕스러웠던 과거를 벗겨 주고, 저의 명예로운 이름을 되돌려 주고, 앞으로 닥쳐올 고난과 가난과 불행에서 저를 구해 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입니다. 지금 생활에서는 제가 무엇을 기대할 수 있겠습니까. - P252
우리가 함께한 시간은 이것으로 끝입니다! 즐거웠던 추억 중에서 새 생활로 가져가는 것은 거의 없습니다. 그래야 당신에 대한 회상이 더 값질 테니까요, 그렇게 해야 당신이 저의 가습속에서 더 소중하게 남으실 테니까요. 당신은 이 세상 단 하나뿐인 저의 친구입니다. 여기서 절 사랑해 준 사람은 오로지 당신 한 사람뿐이었습니다. 당신이 얼마나 절 사랑하셨는지 저는 다 알고 있습니다! 저의 미소 하나로, 제가 쓴 한 줄의 편지로 당신은 행복을 느끼셨지요. 당신은 이제 저를 떨어 내셔야 합니다! 당신 혼자 어떻게 여기 남으시죠! 착하고 더없이 소중한, 단 하나뿐인 나의 친구여, 당신은 이제 누구를 보고 사시죠! 제 책과 재봉대와 쓰다 만 편지는 당신께 드리고 갑니다 처음 몇 줄만 씌어진 편지를 보시거든, 제게서 듣고 싶으신 이야기를 마음속으로 그리며 읽어 주세요. - P2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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