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연수작가님의 장편은 어렵지만 재미있고 인상적이다.


"그렇다면 나도 사랑이라는 걸 한번 해보죠."
그 말에 나카지마가 한쪽 눈을 치켜떴다가 다시 감았다.
"그건 네 인생을 완전히 바꿔놓을 거야." - P28

"6월이 되면, 아마도"
그녀가 다시 내 말을 따라 했다 그리고 내 얼굴을 빤히 들여다 보면서 덧붙였다.

"그렇게 오랫동안? 그럼 그때까지 전 일요일마다 누구의 눈을 바라보면서 시간을 읽나요?" - P36

그 아름다운 암고양이가 곁에서 사라지자, 나는 다른 아름다운 것들을 찾아 혜매게 됐다. 사랑에 빠지면 자연의 아름다움이 전에 없이 더 또렸해진다는 건 바로 그때 알았다. 세상의 모든 아름다움이란 한 사람의 아름다움을 대체하는 것들이었다. 그러나 결국 깨닫게 되는 것은 그 어떤 아름다움도 그리운 단 하나의 얼굴에는 비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 P37

먼저 사랑이 오고, 행복이 오고. 질투심과 분노가 오고, 그리고 뒤늦게 부끄러움은 찾아온다. - P51

다만 나는 그 만년필이 정희가 사랑한다고, 내가 그랬듯이 사랑한다고 써서 내게 보내주리라는 기대에 부풀어 내가 산 만년필이라는 사실만 알고 있었다. 죽기 전에 그 만년필로 내게 ‘지금 어디에 있나요? 제 말은 들리나요? 어쩌면 이건 나의 처음이자. 마지막 편지겠어요‘라고 시작하는 편지를 쓰리라는 사실은 미처 짐작도 못한 채로 내가 산 만년필이라는 것만 알고 있었다. 그런 만년필이 총영사관 경찰 보조원의 손에 넘어가리라고는 상상조차 한 일이 없었다. 그런 사실들 앞에 나는 무기력했다. 내 손이 최도식의 손만큼 야비하기라도 했다면, 내 입이 사토처럼 비열하기라도 했다면. - P63

그걸 알겠어요. 이미 너무 늦었지만. 그러기에 말했잖아요. 지금까지 내게는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고. 지금까지. 그러니까 당신과 그렇게 앉아서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까지. 그때, 이 세상은 막 태어났고, 송어들처럼 힘이 넘치는 평안 속으로 나는 막 들어가고 있다고. 사랑이라는 게 우리가 함께 봄의 언덕에 나란히 앉아 있을 수 있는 것이라면, 죽음이라는 건 이제 더이상 그렇게 할 수 없다는 뜻이겠네요. 그런 뜻일 뿐이겠네요. - P3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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