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출판사로 다시 읽는 백치는 확실히 처음보다 더 좋았다.




하인이란 대체로 주인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영리한 법이라, 이 시종의 머릿속에도 이건 다음 두 가지 경우 중 하나라는 생각이 떠올랐다. 이 공작이란 작자는 돈이 없어 구걸하러 온 게 틀림없는 일종의 건달이거나, 아니면 자존심이라곤 전혀 없는 그저 바보인 게 분명하다. 왜냐하면 똑똑하고 자존심이 있는 공작이라면 문간 방에 앉아 하인에게 자기 일을 이러쿵저러쿵 늘어놓을 리가 없잖은가. 그렇다면, 이 경우든 저 경우든 이런 자를 들여놓았다고 혹시라도 자기가 책임져야 하지는 않을까? - P37

그리고 기왕에 말씀드리자면, 제 생각에 장군님과 저는 겉보기엔 아주 다른 사람들입니다. 여러 점에서 말이죠. 따라서 저희 사이엔 공통점이 별로 없을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말이죠, 저 자신은 그렇게 믿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저 공통 점이 없는 듯 여겨질 뿐이지, 실제로는 공통점이 무척 많은 경우가 아주 흔하니까요... 그건 그저 겉보기에 따라 서로를 분류할 뿐 아무런 공통점도 찾아낼 줄 모르는 인간의 나태함 때문에 생기는 일입니다. - P50

아무것도 소중히 여기지 않고, 무엇보다 자기 자신을 소중히 여기지 않는 나스타시야 필립포브나는 (그녀가 이미 오래전부터 그녀 자신을 소중히 여기지 않게 됐다는 점을 지금 이 순간에 간파하고 그 감정이 얼마나 심각한지 깨닫기 위해서, 토츠키 같은 회의론자이자 세속적인 냉소주의자에겐 대단한 지혜와 통찰력이 필요했다) 그저 자신이 그토록 무섭게 혐오하는 인간에게 실컷 모욕만 줄 수 있다면, 시베리아로 가든, 징역을 살든, 어떤 끔찍한 짓이라도 저질러 자기 자신을 되돌이킬 수 없이 추하게 파 멸시킬 수 있는 여자였다. - P79

열정에 과도하게 빠져버린 인간은, 특히 나이가 지긋한 경우, 완전히 눈이 먼 나머지 희망이라고는 전혀 없는 곳에서도 희망을 품는 법이다. 그뿐이랴, 아무리 지혜로운 자라도 판단력을 잃고 어리석은 아이처럼 행동하게 마련이다. - P91

하지만 그의 말에 따르면, 그 순간 그에게 무엇보다 괴로웠던 것은 끊임없이 떠오르는 한 가지 생각이었습니다. ‘만일 죽지 않는다면 어떨까! 만일 삶을 되찾을 수 있다면 어떨까 그야말로 무한이리라! 그리고 그건 고스란히 내 것이 될 테지! 그렇게만 되면 나는 일분일초를 한 세기로 만들어 그 무엇도 잃어버리지 않을 것이며, 일분일초까지 정확히 계산해서 그 무엇도 헛되이 써버리지 않을 것이다!‘ 이 생각은 마침내 증오감으로까지 변해서, 차라리 한순간이라도 빨리 총살시켜줬으면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는 겁니다. - P110

"당신의 눈을 어디서 꼭 본 것 같군요...... 하지만 그럴 리는 없을 거에요. 나는 한 번도 여기 온 적이 없으니까요. 어쩌면 꿈속에서..." - P190

당신은 두렵지 않다지만, 나는 당신을 파멸시키고 나중에 당신한테 원망을 듣게 될까 두려워요! 당신은 내가 당신에게 영광을 베푸는 거라고 말하지만. - P307

"아니, 자네를 믿어, 하지만 뭐가 뭔지 도무지 이해가 안 가. 가장 확실한 건, 자네의 연민이 나의 사랑보다 훨씬 강할지도 모른다는 사실이지!"

"그런데 자네의 사랑은 증오와 다를 바 없어." 공작은 빙긋이 웃었다. "그 사랑이 사라져버린다면, 그때는 사태가 더 불행해질지도 모르지. 파르푠 형제, 자네한테 말해두고 싶은 건......"

"내가 칼부림이라도 할 거라고?" - P384

"왜 웃었느냐고? 그냥 떠오른 생각인데, 만약 자네가 이런 불행과 마주치지 않았고 이 사랑이 자네를 사로잡지 않았더라면, 자넨 아마 꼭 자네 아버지처럼 될 걸세. 그것도 아주 빠른 시간 안에 온순하고 말없는 아내와 단둘이 이 집에 들어앉아 어쩌다 한두 마디 무뚝뚝하게 던질 뿐 입을 꾹 다물고, 누구도 믿지 않을뿐더러 그럴 필요조차 전혀 못 느끼며 그저 음울한 얼굴을 한 채 잠자코 돈이나 벌어들이고 있겠지. 기껏해야 무슨 오래된 옛날 책이나 칭찬하고 구교도처럼 두 손가락으로 성호를 긋는 데 흥미를 느끼면서 말일세, 물론 이건 꽤 나이가 든 다음의 일이겠지만......" - P386

그러자 갑자기 무언가가 그의 앞에 넓게 열린 것 같았다. 불가사의 한 내면의 빛이 그의 영혼을 환히 비추었다. 이 순간은 아마도 반 초 가량 지속됐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가슴에서 저절로 터져나와 어떤 힘으로도 저지할 수 없었을 그 무서운 비명의 시작을, 그것의 맨 첫 음향을, 또렷한 의식으로 분명히 기억했다. 다음 순간 그의 의식은 순식간에 꺼지고 완전한 암흑이 들이닥쳤다. - P423

"당신이 오지 않으니까 자기도 물론 화가 나 있었죠, 다만 백치한텐 이런 식으로 쓰면 안된다 는 걸 미처 생각지 못했지, 백치는 글자 그대로 받아들이니까, 그리고 또 실제로 그렇게 됐거든. 아니, 당신은 뭘 엿들어요?" - P580

"그애한텐 당신같은 어릿광대가 필요해요, 이런 어릿광대는 오랫동안 보지 못했으니까요. 그래서 당신을 부르는 거예요! 나도 기뻐요, 기뻐, 그애가 이제 당신을 웃음거리로 만들 테니! 당신은 그런 대우를 받을 만하죠. 게다가 그애는 그렇게 할 줄 알아요, 오, 얼마나 잘하는데!" - P5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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