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시 믿고 읽는 한강 작가의 작품.

나는 당신에게 왜 그토록 어리석은 연인이었을까요. 당신에 대한 사랑은 어리석지 않았으나 내가 어리석었으므로, 그 어리석음이 사랑까지 어리석은 것으로 만든 걸까요. 나는 그만큼 어리석지는 않았지만, 사랑의 어리석은 속성이 내 어리석음을 일깨워 마침내 모든 것을 부숴버린 걸까요. - P44

그녀는 숨을 참았다가 천천히 뱉는다. 자신의 어머니의 마지막 얼굴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마지막 열세 시간 동안 어머니는 눈과 입을 반쯤 벌린 채 느린 숨을 쉬었다. 십여 년 전 아르헨티나로 이민을 떠난 오빠 부부는 로스앤젤레스를 경유해 태평양을 건너오는 중이었다. 쉬지 않고 그녀는 어머니의 귀에 속삭였다. 의식을 잃은 것 같아도 청각만은 살아 있으니 뭐든 이야기를 들려주라는 호스피스의 충고 때문이었다. - P145

가끔 이상하게 느껴지지 않나요.
우리 몸에 눈꺼풀 입술이 있다는 건.
그것들이 때로 밖에서 닫히거나,
안에서부터 단단히 걸어잠길 수 있다는 건. - P161

나는 두 손을 가슴 앞에 모은다. 혀끝으로 아랫입술을 축인다.
가슴 앞에 모은 두 손이 조용히, 빠르게 뒤치럭거린다.
두 눈꺼풀이 떨린다, 곤충들이 세차게 비비는 겹날개처럼.
금세 다시 말라버린 입술을 연다.
끈질기게, 더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내쉰다.
마침내 첫 음절을 발음하는 순간, 힘주어 눈을 감았다 뜬다.
눈을 뜨면 모든 것이 사라져 있을 것을 각오하듯이. - P1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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