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도 정말 좋다. 두번 읽었다. 세번 읽어야 겠다.
이렇게 세상의 첫 막이 내리면 다른 무언가가 시작된다. 대개는 따분한 무언가다. 글을 읽게 되면서부터 우리는 자신에게 무가치한 희생만을 요구하는 것들을 사게 된다. 말하자면 교실에 앉을 자리 하나, 혹은 사무실이나 공장에서 떠맡는 직책 하나. 그러고 나면 우리는 단념한다. 우리는 꼭 읽어야 하는 것만 의무적으로 읽는다. 거기에 기쁨은 없으며 즐거움조차 누릴 수 없다. 복종이 있을 따름이다. 학업을 마칠 때까지, 사막의 입구에 다다를 때까지 중요한 건 오직 복종이다. 그다음에 우리는 아무것도 읽지 않는다. 신문조차도 우리는 집에 책이 한 권도 없는 사람들 가운데 하나가 된다. 작가들에게는 참으로 수수께끼 같은 사람들이다. 모래 속에 묻힌 집들이랄지, 마귀든 책이든 세상 무엇도 침투할 수 없는 삶들이다. 그들에게도 간혹 사전은 한 권 있다.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약삭빠른 영업사원이 팔고 간 백과사전도 있다. 하지만 읽기 위한 책은 아니다. 아이들을 위해, 미래를 위해, 궂은날을 위해 예비해 둔, 가구나 다름없는 책. 참나무로도 소나무로도 만들어지지 않은 좀 이상한 가구다. 손도 대지 않을, 월부로 구입한 스무 권짜리 작은 종이 가구. - P13
책을 읽지 않는 삶은 우리를 잠시도 놓아주지 않는 삶이다. 신문에 나오는 이야기들처럼 온갖 잡다한 것들의 축적으로 질식할 듯한 삶이다. - P16
사랑은 아무 데도 없다. 전시에 부족한 식량처럼, 죽어가는 사람의 짧은 호흡처럼, 사랑도 모자란다. 놀이에 몰두해 있는 아이에게 시간이 모자라듯 사랑도 그렇게 부족하다. 사랑을 하려면 시간이 필요한 법이다. 정말로 많은 시간이 필요해서, 우리 안에 자리한 사랑의 욕구를 채워주기엔 시간은 늘 역부족이다. 우리 안에 자리한 목소리와 피의 요구, 창공 같은 그 목소리에 흐르는 우윳빛 피의 요구를 채워주기에는 말이다. - P35
오랫동안, 오랫동안 기다리지 않으면 안된다. 그것이 사랑의 본성이다. 기다리고 기다리고, 또 기다려야 한다. 이 사실 이야말로 사랑이 갖춘 위엄이자, 사랑의 놀라운 특성 이다. 소음과 부산함으로부터 최대한 멀리 떨어져, 온갖 발작으로부터도 훌쩍 떨어져, 차분한 마음으로 기다려야 한다. 참을성 있게 기다려야 한다. 사랑은, 그리고 사랑의 가볍고 경쾌한 자각이자 더없이 겸허한 형상이며 각성한 얼굴인 시(詩)는, 심오한 기다림이고 달콤한 기다림이다. 부드럽고도 오묘하게 반짝이는 희망이다. - P36
내가 책을 읽는건, 보기 위해서예요. 삶의 반짝이는 고통을, 현실에서보다 더 잘 보기 위해서예요. 위안을 받자고 책을 읽는 게 아닙니다. 난 위로받을 길 없는 사람이니까. 무언가를 이해하려고 책을 읽는 것도 아니에요. 이해해야 할 건 하나도 없으니까. 내가 책을 읽는 건 내 삶 속에서 괴로워하는 생명을 보기 위해섭니다. 그저 보려는 겁니다. - P88
글을 쓰기 위해 필요한 것은 거의 없다. 가난한 삶만 있으면 된다. 너무 가난해 아무도 원치 않는 삶, 신 혹은 사물들을 피난처로 삼는 삶이다. 그곳에는 무가 차고 넘친다. 왁자지껄한 소음과 수많은 문들로 이루어진, 자체의 풍문들로 길을 잃은 삶과는 반대되는 삶이다. 그런 삶들을 가지고는 제대로 글을 쓸 수 없다. 그런 삶에서는 말할 거리가 하나도 없으니까. 우리는 오로지 부재 속에서만 제대로 볼 수 있고, 결핍 속에서만 제대로 말할 수 있다. 구걸하는 이 여인의 순결한 얼굴을 보려면 노트를 한 장 한 장 넘겨볼 수밖에 없다. 저녁 시간 차곡차곡 쌓이는 그 글들을 바라볼밖에. 어린아이의 잠 속에서 불어나는 엄청난 유산이다. - P91
우리 안엔 아무것도 없다. 아무도 없다. 색깔도 형태도 없는 기다림이 있을 뿐. 무언가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다. 이 기다림은 공기와 공기가 섞이듯 우리 안에 존재한다. 그 무엇과도 닮지 않은, 지루함의 절정이라고나 할 수 있는 기다림. 이 기다림이 그곳에 항시 존재 했던 건 아니다. 우리가 항시 무였던 것도, 그 누구도 아닌 사람이었던 것도 아니다. 유년기의 우리는 전부였고, 신은 우리 영역의 미미한 일부에 불과했었 다. 풀밭 속의 풀잎 같은 존재라고나 할까. - P119
유년기가 끝나면서 기다림이 시작되었다. 우리 자신이 죽은 이후로 우리는 기다리기 시작했다. - P119
내 고독의 물방앗간에 당신은 새벽처럼 들어와 불길처럼 나아갔다. 당신은 내 영혼 속에 범람하는 강물처럼 들어왔고, 당신의 웃음이 내 영토를 흠뻑 적셨다. 내 안으로 돌아오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암흑천지에 큰 태양 하나가 돌고 있었다. 만물이 죽은 땅에 옹달샘 하나가 춤추고 있었다. 그토록 가녀린 여자가 그렇게나 큰 자리를 차지하다니, 놀라운 일이었다. - P121
사랑 밖에서는 아무것도 알 수 없다. 사랑 안에는 알 수 없는 것들뿐이다. - P121
시간이 흘렀다. 세월이 불타버린 문턱에 재 한 줌 남지 않았다. 우린 태초의 해맑은 나뭇잎들 곁에 그대로 남아있다. 당신은 그 작은 파티 드레스를 한 번도 벗지 않았다는 듯이, 나는 거기서 만물의 순진성을, 이 땅 위에 실현된 어느 성탄의 기적을 끊임없이 예감했 다는 듯이. 사랑은 언제나 우리의 얼굴에서 어둠을 걷어내고 순결한 아이의 얼굴을 되돌려준다. 시간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이. 사랑이 전부라는 듯이. - P122
그런 다음 당신은 떠나버렸다. 배신을 한 건 아니었다. 당신 안에 나 있는, 굴곡이 단순한 같은 길을 따라간 것일 뿐. 당신은 눈처럼 하얀 작은 드레스도 가지고 가버렸다. 이 드레스는 더 이상 내 삶에서 춤추지 않았고 내 꿈속에서 맴돌지도 않았다. 내가 잠을 청하며 눈을 감은 순간 눈꺼풀 밑에서 펄럭였을 뿐. 눈과 세상 사이, 바로 그곳에서. 세월의 바람을 맞으며 열에 들떠 펄럭였다. 비애의 뇌우가 그것을 가슴 위로 내리쳤다. 금 간 유리창 위로 내려지는 덧문처럼. - P122
부재를 경험하지 않은 사람은 사랑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 부재를 경험한 사람은 자신이 무(無)임을 자각한다. 임박한 죽음 앞에서 몸을 떠는 짐승의 막연한 자각이다. - P123
당신이 내 고독의 원인은 아니다. 고독은 당신보다 훨씬 앞서 내 안에서 잠자고 있었다. 당신은, 그것을 깨어나게 한 당신은 그 고독을 가장 닮은 여자일 뿐. - P124
사랑이 끝나는 순간 세 동방박사가 모습을 드러낸다. 우수와 침묵과 기쁨. 그들이 푸른 대기 속을 천천히 나아간다. 어둠의 왕관과 황금눈물을 가지고서. 유년기에서 걸어 나온 이들이다. 그들은 영혼 속으로 침투해 들어간다. 천천히. 날마다 조금씩. 우수와 침묵과 기쁨. 언제나 같은 순서다. 침묵이 한복판에, 중심에 있다. 침묵의 희고 작은 드레스. - P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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