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대체 여기는 뭐람?‘ 하면서 주뼛주뼛 맥주를 마시는데 한 여자가 다가와 "같이 춤춰요" 하기에 "아뇨, 저는 그런 건 좀......" 하고 몸을 사리자, 미즈마루 씨가 근엄한 얼굴로 "이봐, 무라카미 군. 이럴 땐 기분좋게 같이 추는 게 예의 거든. 여자를 창피하게 만들면 안 돼. 에헴" 하지 않겠는가. 그때는 나도 젊었고 세상 무서운 줄 몰라서 ‘그래? 그게 예의란 말이지?‘ 하고 같이 춤을 좀 췄는데, 얼마 후 아오야마 일대에 ‘무라카미가 저래봬도 여자랑 진한 블루스 추는 게 취미라더라. 모 클럽에서 아주 신이 나서 춤추더란다‘는 과장된 소문이 퍼졌다. "무라카미 씨 그런 사람이었어요? 얘기 듣고 실망했어요"라고 말하는 여자 편집자도 있었다. 나야 일상적으로 모두를 실망시키며 살고 있으니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지만, 혹시 몰라 소문의 근원지를 더듬어가보니 아니나 다를까 화백이 적극적으로 항간에 퍼뜨린 얘기였다. 또 그런 일이 생기면 좀 곤란하다. 그런데 그랬나? 블루스 같은 걸 정말로 췄던가…… - P35
그래도 즉효성을 요구하는 요즘 사회에서 그렇게 여유로운 자세로 살다보면 가끔 스스로가 바보 같아지곤 한다. 목청 높여 누군가를 통렬히 매도하는 편이 훨씬 똑똑해 보인다. 이를테면 작가보다 비평가 쪽이 똑똑해 보이는 것과 같은 이치다. 그러나 설령 어떤 창작자가 가끔 어리석어 보인다 해도(또 실제로 어리석 다 해도), 제로에서 뭔가를 만들어내는 작업이 얼마나 품이 들고 고된지 나는 너무나 잘 알기에 그걸 두고 한마디로 ‘저 녀석은 쓰레기다. 이건 똥이다‘라고 매도해버릴 수는 없다. 좋다 나쁘다의 문제가 아니라 창작자로서 지켜갈 삶의 자세의 문제이자, 나아가 존엄의 문제이기도 하다. 만일 남의 험담을 잘하는 사람이 자기 소설도 잘 쓰는 법이라면 나도 48시간쯤은 거뜬히 온갖 험담을 늘어놓을 수 있을 것이다. 내게도 그런 재능이 아주 없지는 않다. 하지만 그렇지는 않기에, 되도록 입다물고 손을 움직이려 한다. - P80
약 구 년 전 일본을 떠나며 당 분간 고양이를 못기를 사정이라 당시 고단샤 출판부장이던 도 쿠시마 씨 댁에 맡겼다. 실은 "전작 장편을 하나 써드릴 테니까 부디 이 아이 좀 부탁합니다" 하고 떠안기다시피 했더랬다. 그래도 그때 ‘고양이와 교환해서 쓴 장편이 결과적으로 내 책 중에 제일 많이 팔린 『노르웨이의 숲』이었으니, 녀석을 ‘복덩이 고양이‘라 불러도 되지 않을까. - P92
덧붙여 며칠전 영어 책을 읽다가 ‘They ended up having a three-way‘라는 문장을 맞닥뜨렸다. ‘그들은 결국 셋이서 섹스 하게 되었다‘라는 의미다(이 경우는 여자 한 명에 남자 두 명이 었다). 그러니까 세상에는 two-way라는 표현도 있을 수 있을지 모른다. 아니면 ‘투 웨이‘라는 이름은 ‘셋이 하는 건 안 돼요. 둘이 오시죠. 그럼 들여보내드릴 테니‘라는 호텔 주인의 단호한 의사 표시인지도 모른다. 만일 그렇다면 그것 역시 하나의 식견이 라는 느낌도 좀………… 들긴 하지만. - P99
다소 차이가 있을지언정 나이를 먹으며 점점 떨어지는 부분이 성적인 잠재력만은 아니다. 정신적으로 ‘상처받는 능력도 떨어진다. 확실히 그렇다. 나만 해도 젊어서는 꽤 빈번히 마음의 상 처를 받았다. 사소한 일로 좌절해 눈앞이 캄캄해지거나, 누군가의 말 한마디가 가슴을 찔러 발밑이 우르르 무너지는 심정이 된 적도 있었다. 돌이켜보면 나름대로 고달픈 나날이었다. 이 글을 읽는 젊은이 중 누군가는 지금 그런 괴로움을 겪고 있을지도 모른다. 이런 상태로 앞으로 인생을 헤쳐나갈 수 있을까 고민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괜찮다, 크게 고민할 필요는 없다. 일반적으로 사람은 나이가 들면 그렇게 처참할 정도로는 상 처받지 않게 된다. - P123
결국은 ‘별수없잖아 다 그런 거지‘라고 생각할 수 있느냐 없느나의 차이일 것이다. 즉 비슷한 일을 몇 번이나 겪어본 결과, 무슨 일이 생겼을 때 ‘뭐야, 지난번이랑 똑같잖아‘라는 생각이고, 매번 심각하게 고민하는 것이 바보처럼 느껴졌는지도 모른 다. 좋게 말하면 터프해졌고, 나쁘게 말하면 내 안의 나이브한 감수성이 마모됐다는 뜻이다. 다시 말해 뻔뻔해진 셈이다. - P124
전에도 어디에 쓴 이야기인데, 내가 불현듯 소설을 써야겠다 고 생각한 ‘어느 하루‘가 있다. 스물아홉살 4월의 오후였다. 나는 그때를 선명히 기억한다. 햇빛과 바람의 강약, 주위에서 무슨 소리가 어떻게 들렸는지도 어제 일처럼 떠올릴 수 있다. 내 머릿속에서 문득 무언가가 작게 반짝였고, 그래서 ‘그래, 지금부터 소설을 써야지‘ 하고 생각했다. 아니, ‘나는 소설을 쓸 수 있다"고 인식했다. 구체적인 계기나 근거 같은 건 전혀 없다. 그저 혼자서 인식했을 뿐이다. - P210
여행에 무슨 책을 가져갈 것인가는 동서고금 누구나 고민해본 고전적 딜레마일 것이다. 물론 사람마다 독서 성향이 다르고, 여행 목적과 기간, 장소에 따라서도 선택의 기준이 달라진다. 그러므로 일반적인 결론을 내기는 힘들다. 하지만 만약 당신에게 ‘이 거라면 언제 어떤 여행이든 오케이‘라고 생각하는 만능책이 한 권 있다면 인생이 편해질 확률이 상당히 높다. - P238
내게는 주오코론샤에서 나온 『체호프 전집』이 그런 책이다. 왜『체호프 전집』이 여행에 최적인지, 적어도 내게는 꽤 명확한 이유가 있다.
(1) 단편소설 중심이라 끊어 읽기 쉽다. (2) 어느 작품이나 완성도가 높아서 실망하는 일이 거의 없다 (3) 문장이 읽기 쉽고 담박하면서 (4) 내용이 풍부하고 문학적 향취가 충만하다. (5)사이즈가 적당하고 무겁지 않으며, 표지가 딱딱해서 구겨 지는 일이 없다. (6) 혹 누가 제목을 보더라도 ‘체호프를 읽는다면 그렇게 이상한 사람은 아니겠군‘이라고 생각해준다. 이건 어디까지나 덤이지만. (7) 이게 상당히 중요한 점인데, 몇 번씩 읽어도 질리지 않고 매번 새롭게 작은 발견을 한다. - P2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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