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렵게 완독했지만 그만큼 좋았던 책. 인생이라는걸 다시 한번 돌아볼 수 있었다.

결혼 전 2년 동안은 무아지경이었다. 둘은 단어와 현재와 상대 방에 대한 새로운 발견으로 늘 취해 있었다. 둘은 언어를 바꾸면 지금 함께하는 순간의 음색과 온도도 변한다는 사실을 놀랍게 깨달았다. 설명하기 어려웠지만, 머리카락을 훑는 느낌도 달랐다. 언어가 달라지면 감정도 달라지는 듯했다. 이런 일이 어떻게 가능할까? - P153
예전에 살던 장소로 돌아가서 뭘 기대하는 걸까? 그가 자문했 다. 추억, 그건 당연하다. 특히 과거의 목소리들과 섞인, 생생하고 장면이 풍부한 추억. 물론이다. 하지만 이 추억에서 뭘 기대하지? 그걸로 뭘 할까? 우리는 마음속으로 과거 먼 곳으로 뻗어 들어가고 넓어지는 것을, 우리 내면의 확장을 느낀다. 이런 건가? 이게 우리가 마음속에서 미래로 멀리 뻗어나가려 할 때 도움이 될까? - P160
다른 점 가운데 한 가지는 글로 쓴 생각은 다른 방식으로 존재하기 시작한다는 점이지. 나는 이제 그 생각들을 그냥 실행에 옮기는 게 아니라 꼼꼼하게 숙고하며 거리를 두고 마주할 수 있어. 생각들은 금방 사라지지 않고 지속되고, 나는 언제나 그 생각으로 돌아올 수 있지, 글씨로 표현됨으로써 생각은 예전에 조용하고 일시적인 정신의 일화일 때는 갖지 못했던 확실성을 얻게돼. 이 확실성을 통해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이 생각 속에서 나는 과연 누구인지 제대로 알게 되고 배우지. - P162
우리가 지어내는 이야기가 우리 자신에 대해 가장 많은 것을 알려줘 난 그때까지만 해도 쿠츠민의 삶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지만, 카를 압트에 대해 이야기하는 그를 보며 그가 어떤 사람인지 알 것 같은 느낌이었어. - P197
"그럴 마음도 없습니다. 불현듯 다시 미래가 생겼어요. 미래가 어떤 모습일지는 아직 모릅니다. 하지만 어쨌든 달라질 테지요. 당신의 미래가 달라지리라는 거야 말할 나위도 없고 말입니다." - P230
"인생은 아름답다. 삶이란 언제나, 매순간 시작되 니까." - P235
추억되는 것의 시간이 기니까 추억하는 시간이 길 수도 있지. 또는 지나간 사건의 짧은 순간이 반복하여 다시 나에게 감동을 주고, 한 순간의 감동이 다른 순간의 감동을 부채질해서 추억하는 시간이 오래 걸리기도 해. - P241
관이 땅속으로 내려갈 때, 온갖 노력에도 불구하고 모든게 허사라는 허망함이 나를 엄습했어. 런던으로 오다가 굴뚝이 두 개씩인 집들을 지나면서 이 허망함, ‘futility‘-이 영어 단어는 내가 아는 다른 모든 언어보다 더 파괴적으로 느껴졌어-의 반대는 뭘까 생각했지. 대답을 찾지 못했어. 삶이 허 망하지 않은‘ 때는 언제일까? 나는 차를 타고 오면서 또 다른 의문에 휩싸였어. 왜 당신처럼 생의 한가운데에서 갑자기 뜯겨버린 경우가 아니라, 나이 들어서 끝난 아버지의 삶에서 이런 허망함을 느낀 걸까. 반대여야 하지 않나? - P253
번역은 다른 그 무엇보다도 강한 친밀함, 연인 사이의 육체적 친밀함보다 더 가까운 관계를 만들어주네 번역자는 시간이 좀 흐른 후에는 작가에게서 발견할 수 있는 가장 은밀한 것, 그의 상상력에 숨어 있는 알파 벳을 알게 되니까. 그 알파벳이 번역자에게는 지극히 낯설 수도 있네. 그럴때 번역자가 느끼는 낯섦은 평범한 만남에서 느끼는 그 어떤 것보다 싸늘하고 위협적이지. 번역은……… 낯선 내면세계 로 향하는 엄청난 침입일세. 위험하지 번역자는 작가를 그 누구 보다도 잘 알기 때문에 또한 그 누구보다도 더 심한 상처를 줄 수 있다네. - P301
하지만 이제 몇 주, 어쩌면 며칠만 지나면 다 ‘지나간다‘는 삶이 ‘끝‘이라는 느낌에 담긴 외로움은 누구도 덜어주지 못했지. 미친 소리처럼 들리겠지만, 격렬하고 필사적이며 혼란한 소원이 있었다. 누군가 와서 나를 이 외 로움에서 건져주기를, 나를 받아들이고 자기 안에 품어서 흘러가는 마지막 시간을 나홀로 겪지 않아도 되게 해주기를 바랐지. 누 군가 ‘옆에‘ 있다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다. 그래, 달라야 했지. 누군가 이 마지막 길을 ‘덜어주길 바랐어. 말하자면 내 안에 파고들어와, 나 홀로 무방비상태로 종말에 대면하지 않게 마법처럼 도와주기를. - P318
그런데 난 왜 이 원고를 당신에게 보내는 걸까요? 단 한 사람이 읽는다면 당신이 되어야 한다고 늘 생각하면서도, 당신에게 보내는 것조차 오랫동안 망설였어요. 그래서 얼마 전 밀라노 갤러리에서 식사를 할 때 아무 말도 하지 않았어요. 하지만 역에서 작별한 뒤에, 당신이 나를 이렇게 알기를 바란다는 생각을 점점 더 자주 하게 됐어요. 가까운 시일 내에 런던으로 가신다고, 얼마나 머물지 모른다고 하셨지요. 당신에게 전화를 걸어서 소포를 어디로 보내는 게 좋겠냐고 묻고 싶었어요. 그러다가 묻는 게 어리석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게 언제든 당신이 다시 트리에스테에, 이탈리아에 돌아왔을 때 보면 된다고 생각했어요. 나도 시간을 오래 들였으니까요. 이제 당신은 원고를 손에 들고 있어요. 그게 언제든. - P346
질병이 삶이 언제 끝나는지 결정하는 것을 왜 우리가 견디며 받아들여야 할까? 그걸 스스로 결정하는 게 누구나 누릴 당연한 권리라고 왜 생각하지 않을까? 누군가 ‘이제 그냥 충분하니까‘라고 말하는 게 왜 훌륭하고 정당한 사유로 간주되지 않을까? 우리가 이 문제에 대해 직접 이야기한 적은 없지만, 당신이 나를 이해하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어. 우리가 함께 듣던 음악을 이곳으로 가지고 왔어. 오늘 저녁에 들으면서 내 생각은 당신에게 가 있겠지. 내가 파리로 돌아 가자마자 가장 먼저 찾아가는 사람도 당신이 될 테고. - P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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