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좋았다. 위로와 공감이 되는 책읽기였다.


















나는 생애 전반에 걸쳐 그런 사람들을 부러워하며 원망했다. 내가 가지지 못한 성향을 가진, 내향 인간들을 항상 좋아하면서도 서운했다. 나는 매번 제안하는 쪽이었기 때문에, 사람을 천천히 알아가고 조심스럽게 가까워지고 싶다는 사람들의 팔을 붙들고 같이 시간을 보내자고 흔드는 쪽은 백이면 백 나였다. 그런 나도 좀 병적인가. 어느 모임에서나 그런 유의 사람들을 좋아해. 서촌으로 커피 마시러 갈래요? 광화문으로 생선구이 먹으러 갈래요? 하고 물으면 그들은 언제나 사려 깊은 표정으로 아, 네, 좋아요. 언제든 단이씨 편하신 시간에…… 라고 대답해왔다. 거절이 아닌 것만으로 마음이 놓였지만 한편으로는 늘 속이 꼬였다. 너희들은 좋겠다. 우아하게 컨펌할 수 있어서 좋겠어. 누군가가 물어보면 음 하고 고민하고 마침내 네. 라고 대답할 수 있어서 좋겠다. 나도 그런 역할 좀 맡아보고 싶네. - P63

나는 규희가 그렇게 말할 때마다 상처받았다. 너는 너만 그렇게 현명하고, 그래서 남이 들어오고 들어오지 말아야 할 선을 분명히도 알고 있고, 그걸 나만 모른다고 생각하지. 나만 너에게 더 가까이 가고 싶고, 네가 아무리 가까이 와도 전혀 상관이 없고, 오히려 더 깊이 너를 맞을 준비가 되어 있지. 사이란 건 그 선을 조정해가며 우리 둘이 만들어가는 걸 텐데 너는 이미 선이 있고 항상 단호하고 나는 선이 있던 적이 없으니까. 늘 한쪽만 맡는 일이란 전혀 유쾌하지 않았다. - P64

나는 머쓱하다는 표정을 지어내며 너의 말을 듣는다. 기분은 좋 았지만 한편으론 무슨 소린가 싶기도 하다. 나도 너처럼 우아하게 가만히 있어도 괜찮고 싶거든. 괜히 아무도 부추기지 않았는데 혼자 침묵에 불안해져 까불지 않고, 나도 누가 웃겨주면 웃고만 있고 싶다고. - P65

다음으로 많이 꾸는 꿈은 도착하지 못하는 꿈이었다. 누군가와 의 약속에 중요한 만남에 초대받은 파티나 가기로 한 자리에 가 려고 이리저리 애쓰지만 이상하게 수언이 아는 것보다 시간이 더 걸리고 중간에 무슨 일이 생기고 그것도 아니면 갑자기 딴생각 에 빠져 있느라 목적지를 잊어 도착하지 못한다. 그것은 손에 땀을 쥐게 했고 늘 초조한 마음이 들게 했다. 미안한 마음도 들었다. 가기로 했는데, 가기로 했는데 중얼거리게 되었다. 수언은 약속을 지키지 않는 사람이 싫었다. 오겠다고 해놓고 오지 않는 사람 만 나자고 해놓고 만나지 못하겠다고 말하는 사람. 그런데 꿈속에서 는 언제나 수언이 그런 사람이었다. - P82

수언은 늘 솔지의 목소리가 복잡하다고 느꼈다. 고민을 털어놓 고 이런저런 의견이나 감상을 말할 때의 목소리에 레이어가 있다고, 곁이 있었다. 수언이 생각하기에 그것은 솔지를 풍부해 보이 도록 하는 매력적인 곁이 아니라 쓸데없는 겁이었다. 굳이 분류하 자면 스스로 처세를 잘한다고 믿는 사람에게서 느껴지는, 다른 사람이 자신을 어떻게 볼지를 부자연스러울 정도로 의식하는 (그렇 지만 자신은 매우 자연스럽다고 믿는) 자의식이 도드라지는 사람의 겹이었다. - P95

수언은 자신이 사랑하는 영화에 대한 글을 쓰고 싶었고, 그런 일을 하는 사람이 영화평론가라는 걸 알게 된 이후부터 그 직업이 갖고 싶었다. 다만 핑계 대지 말자고 생각했다. 수언은 자신이 특 별하다고 여기지는 않았다. 되고 싶다고 해서 반드시 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고 그런 일은 아무에게도 없으며 자신 역시 똑같다고. 잘하면 되겠지만 잘해도 안될수도 있는 거라고. 될 때까지 하겠지만 결국 안 되었을때 누구의 탓도 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누군가는 그렇게까지 비장한 게 우습다고 할지 몰라도 그래야 했다. 자신을 싫어하지 않기 위해 열심히 한 것까지만 후회하지 말자고 생각했다. 그 이후는 생각하지 말자. 미래는 잘 모르니까 안 되어도 누구를 탓하며, 그걸 가지고 핑계를 대거나 알리바이를 궁리하며 꿈 을 포기했네 어쩌네 하고 연극적으로 과장되게 굴기는 싫었다. - P97

헤어지자는 말을 하며 재인은 그렇게 말했고 남자친구는 가슴 을 부여잡으며 조금 과하게 울었다. 제발 자기를 짠하게 여겨달라 는 것처럼 보여서 재인은 살짝 인상을 쓸 뻔했다. 한 명이 더 힘을 줘 끌고 가는 관계는 언제까지나 반대편이 일 프로 정도는 함께 힘을 실어줄 때 가능한 일이었다. 이별을 이야기하기 오래전부터 재인은 싣던 힘을 모조리 뺀 상태였다. 나한테도 기회를 줘야지, 남자친구가 긴 훌쩍임 끝에 그렇게 말했을 때 재인은 납작해지는 기분이었다. 상대에게 쏟는 기운을 영 프로로 만들고도 내려갈 곳 이 더 남아서 진공포장 상태처럼 납작해진 기분으로, 가까스레 말 했다.

그게 안 돼서 헤어지자고 하는 거야 - P123

재인은 종종 이별 의 이유를 잊었다. 그 사람은 다정했고 우리는 아무런 문제가 없 었는데 왜 헤어졌지‥.….… 한참 만에 생각해낸 이유는 별게 아니었 다. 마음이 사라져서였지. 아무리 생각해봐도 그뿐이었다. 그 사 람이 천천히 싫어졌던 이유와 헤어진 이유는 얼마간은 같고 얼마 간은 다를 것이었다. - P137

예은씨, 혹시 많이 힘든가요. 그 말을 하려다가 하지 못했다. 사실을 되물어봤자 사실일 뿐이라는 생각에 손가락이 자꾸만 멈췄다. 힘들면 그만두라는 말도 말뿐이고, 넌 잘할 거야 원래 잘 견뎠잖아 하는 말은 욕보다 나쁘고, 퇴직한 이 후 말을 고르는 일에 신경을 덜 쓸 수 있어서 좋았는데 아주 오랜 만에 그런 자신이 싫었다. 예은에게 건넬 수 있는 말을 아무리 골라봐도 마땅한 것이 없었다. 텅 빈 것 같았다. 오늘 많이 바빠요? 일 아직 안 끝났어요? 끝없는 물음표를 찍고 싶었지만 곧 모조리 지워버렸다. 은영은 속에 담긴 말을 고르다가 결국 가장 건져올리기 싫었던 문장에 머무르게 되었다. 바쁜 게 아닐지도 몰라. 힘든 게 아니라 힘들어도 이제 나랑 얘기할 필요가 없는 거겠지. - P141

저 준비하던 거 그만뒀어요. 못하겠어요. 사실 진작 못하겠다고 생각했는데 이제야 그만뒀어요. 잘 모르겠어요. 이젠 아무것도 못 하겠어요. 계획하고 준비하는 거. 미래가 좋을 거야 하고 나한테 내가 최면거는 거. - P166

저는 아무도 상처주지 않아도 알아서 상처를 받는 능력이 있어요. 그리고 그 상처를 무시하거나 덮어놓지 않고 내내 뚫어져라 바라보는 습관도 있고요. 아주 최악이죠. - P1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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