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년 첫 책으로 고른 책. 다시 읽어도 재미있다.








"왜 새끼 캥거루는 어미의 배에 있는 주머니로 들어가죠?"
"함께 달아나기 위해서야. 새끼는 그렇게 빨리 달릴 수 없으니까."
"보호받고 있는 거군요?"
"응, 새끼들은 모두 보호받고 있지"라고 나는 말한다.
"얼마 동안이나 보호받아요?"
나는 동물도감에서 캥거루에 관한 모든 것을 확실히 조사해 보고 나왔어야 했다. 이렇게 될 것이라는 걸 처음부터 알고 있었으니까. - P14

4월의 어느 맑은 아침, 하라주쿠의 뒷길에서 나는 100퍼센트의 여자와 스쳐 지나간다. 그다지 예쁜 여자는 아니다. 멋진 옷을 입고 있는 것도 아니다. 머리카락 뒤쪽에는 나쁜 잠버릇이 달라붙어 있고, 나이도 모르긴 몰라도 이미 서른에 가까울 것이다. 그러나 50미터 앞에서부터 나는 확실히 알고 있었다. 그녀는 내게 있어서 100퍼센트의 여자인 것이다. 그녀의 모습을 본 순간부터 내 가슴은 불규칙하게 떨리고, 입안은 사막처럼 바싹바싹 타들어간다. - P21

다만 삼십 분이라도 좋으니까 그녀와 이야기를 하고 싶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녀의 신상에 관해 듣고 싶기도 하고, 나의 신상 이야기를 털어놓고 싶기도 하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1981년 4월의 어느 해맑은 아침에, 우리가 하라주쿠의 뒷길에서 스쳐 지나가게 된 운명의 경위 같은 것을 해명해보고 싶다고 생각한다. 거기에는 틀림없이 평화로운 시대의 낡은 기계처럼 따스한 비밀이 가득할 것이다. - P23

"놀랐잖아, 난 줄곧 너를 찾아다녔단 말이야. 네가 믿지 않을지는 몰라도, 넌 내게 있어서 100퍼센트의 여자아이란 말이야"라고 소년은 소녀에게 말한다.

"너야말로 내게 있어서 100퍼센트의 남자아이인걸. 모든 것이 모두 내가 상상하고 있던 그대로야. 마치 꿈만 같아"라고 소녀는 소년에게 말한다. - P26

"흡혈귀라는 개념에 얽매이고 싶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망토를 쓰거나 마차에 올라타거나, 성에서 산다고 하는 그런 건 싫거든요. 저는 세금도 제대로 내고 있고, 인감 등록도 돼 있어요. 디스코텍 같은 데 가기도 하고, 파친코도 합니다. 이상합니까?" - P49

가끔 지하철 전차 안에서 그녀와 마주칠 때가 있다. 그때마다 그녀는 "그때 맥주를 주셔서 정말 고마웠어요" 라고 말하는 듯한 미소를 내게 보내온다. 그 이후로 우리는 더 이상 말을 주고받지는 않지만, 그래도 마음은 어딘가에서 이어져 있다는 느낌이 든다. 어디서 이어져 있는지 나는 알 수 없다. 틀림없이 어딘가 먼 세계에 있는 기묘한 장소에 그 매듭이 있을 것이다. - P95

그런 식으로 생각하자 여러 가지 사건이, 여러 가지 일들이 조금씩 그리워진다. 분명히 어딘가 나와 먼 세계에 있는 기묘한 장소에서나 자신과 만나게 될 것이라는 느낌이 든다. 그리고 그곳이 될 수 있으면 따스한 장소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만일 거기에 차가운 맥주가 몇병 있으면 더 바랄 게 없을 것이다. 그곳에서는 나는 나 자신이고, 나 자신은 나다. 그 둘 사이에는 어떠한 틈도 없다. 그러한 기묘한 장소가 분명히 어딘가에 있을 것이다. - P95

그 당시 나로서는 알 수 없었지만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그녀들은 모두 쓸쓸했던 것이 틀림없다. 단지 누군가에게 무엇인가를 써 보내고 싶었던 것뿐이다. 그래서 틀림없이 서로가 서로의 소통을 바라고 있었을 것이다. - P103

나이를 먹어도 알 수 없는 것은 얼마든지 있다.

내가 이 글의 제목을 ‘몰락한 왕국‘ 이라고 한 것은, 그날 석간신문에서 우연히 아프리카의 어느 몰락한 왕국의 이야기를 읽었기 때문이다. "위대한 왕국이 퇴색해가는 은…" 하고 그 기사는 말하고 있었다. "후진 공화국이 붕괴되는 것보다 훨씬 더 서글프다." - P133

옆자리에 앉는 상대만이 가끔씩 바뀐다. 그때 내 옆에 앉아 있던 사람은 열여덟 살의 여자아이였다. 나는 창가에, 그녀는 통로 쪽에 앉아 있었다. "자리를 바꿔줄까?" 하고 내가 묻는다.
"고마워요. 친절하시네요" 하고 그녀가 말한다.친절한 게 아니란다, 하고 나는 쓴웃음을 짓는다. 너보다는 훨씬 더 따분함에 익숙해져 있는 것뿐이란다. 전신주 숫자를 세기에도 지쳤다.
서른두 살의데이 트리퍼. - P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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