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실이란...


"알베르틴 양이 떠났어요!"

아무것도 아니라고 믿었던 것이 실은 나의 온 삶이었다. 우리는 얼마나 자신을 모르는 걸까. 고통을 즉시 멈춰야했다. - P15

지금까지 나는 습관이 우리 지각의 독창성과 의식마저 제거하고 무로 돌리는 힘을 가졌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제 나는 습관을 우리에게 고정된 무시무시한 신으로 간주했고, 그 무의미한 얼굴이 그토록 우리 마음속 깊숙이 박혀 있어서, 만일 우리가 거기서 떨어져 나가거나 멀어지기라도 하면 여태껏 거의 알아볼 수 없던 그 신은 어느 누구보다 무서운 고통을 야기하고, 그리하여 죽음만큼이나 잔인한 존재가 된다. - P17

나는 그녀가 나와 멀리 떨어진 곳에서 나쁜 짓을 하는 모습을 보는 일이, 내 집에서 나와 함께 권태로워하는 모습을 볼 때 느끼는 종류의 슬픔보다 어쩌면 덜 고통스러울 거라고 이미 여러 번 깨닫지 않았던가. - P19

알베르틴으로 말하자면, 그녀는 내게 오로지 이름의 형태로만 존재했고, 그 이름은 잠에서 깨어날 때의 어떤 드문 휴식시간을 제외하고는 내 머릿속에 계속 새겨지고 또 새겨졌다. - P35

우리는 이름을 말하고 또 마음속에 이름을 쓰는 듯 입 밖에 내지 않기 때문에 그 이름은 머릿속에 흔적을 남기며, 그리하여 머릿속은 마치 낙서하기를 좋아하는 누군가가 채워 놓은 벽처럼 마침내 수천 번이나 다시 써 놓은 사랑하는 이의 이름으로 온통 뒤덮이고 만다. 행복할 때면 우리는 생각 속에 내내 이름을 다시 쓰지만, 불행할 때는 더 많이 쓴다. 이미 우리가 아는 것밖에 더 이상 아무것도 주지 못하는 이름을 다시 말하다보면, 지속적으로 말하고 싶은 욕구가 다시 살아나는 것을 느끼지만, 결국은 피로해진다. - P36

자신을 사랑하는 남성을 괴롭히는 여인은, 마치 스완에게 그토록 잔인했던 오데트가 나의 작은할아버지에게는 지극히 상냥한 ‘분홍빛 드레스 여인‘이었듯이, 자신에게 관심 없는 남성에게는 언제나 착한 여자로 보일 가능성이 많다. 또는 사랑하는 남성이 마치 숨은 신의 결정을 두려워하듯 그 결정 하나하나를 두려워하며 따지는데도, 여인을 사랑하지 않는 남성의 눈에는 자신이 원하는 거라면 뭐든지 기쁘게 하는 그런 하찮은 여자로 보일 수도 있다. - P47

우리가 사랑하는 것은 지나치게 과거 속에잃어버린 시간 속에 있어서, 더 이상 우리는 그녀의 모든 것을 필요로 하지 않게 된다. - P49

우리 감각 세계의 건물을 떠받치는 것은 언제나 눈에 보이지 않는 믿음이며, 믿음이 없으면 건물은 흔들린다. 우리는 바로 이 믿음이 사람들의 가치와 무용성을 결정하며 또 그들을 만날 때면 느끼는 열광이나 권태의 감정을 결정하는 걸 보아 왔다. 마찬가지로 오래가지 않아 끝나리라고 확신하는 것 만으로도 슬픔이 하찮아 보이기 때문에, 또는 슬픔이 돌연 커져서 한 존재를 우리의 목숨만큼이나, 때로는 그보다 더 가치있는 존재로 만들기 때문에 믿음은 슬픔을 견디게 한다. 게다가 내가 처음 느꼈던 고통만큼이나 내 가슴의 통증을 격렬하게 만든 것이 있었다. - P57

한 존재와 우리의 관계는 오로지 우리 사유 속에만 존재한다. 기억이 희미해지면 그 관계는 느슨해지고, 우리는 환상에 쉽게 속아 넘어가고 싶어 하면서도, 또 사랑이나 우정, 예의나 체면, 의무감 때문에 타인을 속이면서도 결국은 홀로 존재한다. 인간은 자신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는 존재이며, 자기 안에서만 타자를 인식하며, 그렇지만 그와 반대되는 말을 하면서 거짓말하는 존재이다. - P65

소설의 여주인공에게 사랑하는 여인의 특징을 투사하지 않고는 소설을 읽을 수 없음을 나는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책의 결말이 아무리 행복하게 끝난다 해도, 우리 사랑이 한 걸음 더 나아가는 것은 아니며, 그러므로 책을 덮었을 때 우리가 사랑하는 여인, 또 소설에서 마침내 우리에게 돌아온 여인이 삶에서 우리를 더 많이 사랑하는 것도 아니다. - P68

"가엾은 친구에게, 우리의 사랑하는 알베르틴은 이제 세상에 없답니다. 그토록 그 애를 사랑했던 당신에게 이 끔찍한 소식을 전하는 나를 용서하세요. 그 애는 산책하던 중 낙마하여 나무에 부딪쳤답니다. 온갖 노력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 애를 살릴 수 없었습니다. 그 애를 대신해서 왜 내가 죽지 못했을까요!" - P107

한 존재가 우리 마음속으로 들어오기 위해서는 형태를 갖추고 시간이란 틀에 복종해야 한다. 연속적인 순간을 통해서만 나타나는 존재는 한 번에 한 모습밖에 보여 주지 않으며, 그 모습에 대해서도 단 하나의 사진밖에 생산하지 않는다. 오로지 순간들의 집합으로만 이루어진 존재에게 그것은 큰 약점이지만, 또한 큰 힘이기도 하다. 존재는 기억의 영역에 속하며, 또 어느 한순간의 기억은 그 후 일어난 일을 전혀 인지하지 못한다. 그러나 그때 그 기억이 기록한 순간은, 그리고 그 순간과 더불어 드러난 존재는 여전히 살아 있으며 여전히 지속된다. 그리고 그런 파편화는 다만 죽은 이를 살아나게 할 뿐만 아니라 죽은 이를 무한대로 증식한다. 내 마음을 달래기 위해 망각해야 했던 것은 한 명의 알베르틴이 아니라 무한한 알베르틴이었다. 알베르틴을 잃은 슬픔이 견딜 만한 상태에 이르자, 나는 다른 알베르틴, 다른 수백 명의 알베르틴과 더불어 같은 일을 다시 시작해야 했다. - P110

우리는 오로지 자신이 소유한 것에 의해서만 존재하며, 실제로 우리 옆에 있는 것만을 소유한다. 얼마나 많은 추억과 기분과 관념이 우리 자신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곳으로 여행을 떠나 우리의 시계로부터 멀어지는가! 그때 우리는 그것들을 더 이상 우리 존재를 이루는 전체 속에 포함할 수 없다. 그러나 그것들은 우리 마음속에 들어오는 비밀통로를 가지고 있다. - P125

예전에 나는 끊임없이 우리 앞에 펼쳐진 불확실한 미래를 생각했고, 또 그 미래를 읽어 보려고 시도했다. 그런데 지금 마치 미래의 분신처럼 내 앞에 놓인 것은 ― 불확실하고 판독하기 어렵고 신비롭기 때문에 걱정스럽고, 내가 미래에 대해서처럼 영향을 미칠 가능성이나 환상을 품을 수 없기 때문에 잔인하고, 또 내 삶 자체만큼이나 멀리 펼쳐질 테지만 거기에는 미래가 야기할 고뇌를 위로해 줄 동반자가 없기 때문에 더욱 잔인한 더 이상 알베르틴의 ‘미래‘가 아니라, 그녀의 ‘과거‘였다. 그녀의 ‘과거‘라니? 틀린 말이다. 왜냐하면 질투에는 과거도 미래도 없으며, 또 질투가 상상하는 것은 항상 ‘현재‘이기 때문이다. - P129

우리 사랑의 톱니바퀴가 얼마나 팽팽하게조였으며 우리 사랑이 얼마나 빠르게 진행되었던지, 그것은 발자크의 중편 소설이나 슈만의 몇몇 발라드에서처럼 처음에는 지체하고 중단되고 주저하면서 전개되다가 빠른 결말로 끝났다. - P144

우리가 ‘유일하다‘고 생각하는 여인은 무한한 존재이다. 그렇지만 그녀를 사랑하는 우리 눈에 그녀는 농밀하고 파괴할 수 없으며 오랫동안 다른 여인으로 대체할 수 없는 존재이다. 그 이유는 여인이 우리 마음속에 파편화된 상태로 존재하는 수많은 다정한 조각들을 일종의 마술적인 부름으로 솟아오르게 하고, 그 사이에 있는 모든 균열을 지우고, 그 조각들을 한데 모으고 결합하지만, 이런 그녀에게 윤곽을 부여하고 사랑하는 사람으로서의 온갖 단단한 질료를 제공하는 것은 바로 우리 자신이기 때문이다. 비록 우리가 그녀에게 1000명의 인간 가운데 하나에 지나지 않고, 또 어쩌면 그들 중에서도 가장 최하의 인간이라 해도, 우리에게 그녀는 우리의 온 삶이 지향하는 유일한 존재라는 사실이 바로 여기에 있다. - P149

우리가 사랑한다는 걸 깨닫기 위해서는 어쩌면 사랑하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라도, 이별의 날은 와야하기 때문이다. - P154

내가 느낀 감정이 얼마나 강렬했던지, 행복이나 불행을 느끼지 못한 사람들의 표현은 거짓이나 흐릿한 것으로 보이게 했고, 반대로 지극히 시시한 몇 줄의 글은아무리 멀리 있어도 노르망디나 니스," 물 치료 시설, 라 베르마나 게르망트 공작 부인, 또는 사랑이나 부재, 배신과 관련되기만 하면 얼굴을 돌릴 름도 없이 돌연 알베르틴의 이미지를 떠오르게 했고, 그러면 나는 다시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 P180

다른사람과의 관계에서 오해가 생기는 두 가지 주요 원인은 우리 자신이 착한 마음을 가졌거나 아니면 그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이다. 한 번의 미소나 시선, 어깨만으로도 우리는 사랑에 빠진다. 그것으로 충분하다. 그래서 희망과 슬픔의 긴 시간 동안 우리는 한 사람을 만들어 내고 한 성격을 구성한다. 그리고 훗날 사랑하는 사람을 더 잘 알게 될 때면, 우리가 어떤 잔인한 현실과 마주쳐도 이런저런 시선이나 어깨를 가진 존재에게서 우리를 사랑하는 여인의 착한 성격이나 본성을 제거하지 못한다. 젊었을 때부터 알아 온 사람이 아무리 나이를 먹어도, 그 사람에게서 그가 가졌던 젊음을 떼어 낼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 P195

스카프를 목 앞이 아닌 목 뒤로 매면서, 나는 한 번도 다시 생각해 보지 못했던 산책을 떠올렸는데, 그때 알베르틴은 차가운 공기가 내 목에 닿지 않도록 나에게 키스한 후 스카프를 그런 식으로 매 주었다. 그토록 사소한 몸짓을 통해 기억 속에 되살아난 이 단순한 산책이 마치 우리가 사랑했던 죽은 여인에게 속하는 내밀한 물건, 우리에게 그토록 가치 있는 물건을 여인의 늙은 하녀가 가져다줄 때 느끼는 것과 같은 기쁨을 주었다. 나의 슬픔은 그로 인해 풍요로워졌으며, 더욱이 스카프 생각은 그 후로 한 번도 해 보지 못했으므로 더욱 그러했다. - P196

나는 커다란 사랑을 할 수 있기를 바랐고, 내 곁에서 함께 살 사람을 찾고 싶었으며, 그것이 내게는 더 이상 알베르틴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표시로보였지만, 실은 여전히 그녀를 사랑한다는 표시였다. 왜냐하면 커다란 사랑을 하고 싶은 이 욕망은 알베르틴의 통통한 뺨에 입을 맞추고 싶은 욕망과 마찬가지로, 그녀에 대한 내 그리움의 일부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만일 내가 그녀를 망각했다면, 사랑 없이 사는 삶이 보다 현명하고 보다 행복하다고 느꼈을 테니까. - P197

사랑하는 사람이 우리와 다른 존재와 쾌락을 느끼고, 또 그 존재가 우리가 줄 수 없는 감각을 그녀에게 주고, 또는 적어도 그 외모와 이미지와 태도에 의해 우리와는 전혀 다른 것을 그녀에게 보여 준다고 생각할 때 느끼는 고통보다 더 큰 어려움이 어디 있겠는가! 아! 왜 알베르틴은 생루를 사랑하지 않았을까! 그랬다면 훨씬 고통을 덜 느꼈을 텐데! - P219

이는 내가 이제 알베르틴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말이 아니라, 최근에 사랑했던 방식으로는 더 이상 사랑하지 않는다는, 아니, 그녀와 관련된 것이라면 장소든 사람이든 모든 것이 나의 호기심을 끌었고 고통보다는 더 많은 매혹이 서려 있었던 예전의 보다 오래된 시기와 같은 방식으로 사랑한다는 말이다. 그리고 사실 지금 그녀를 완전히 망각하기 전에, 처음의 무관심한 상태에 도달하기 전에 똑같은 길로 자신이 떠난 지점에 돌아가 보는 나그네처럼, 나의 커다란 사랑에 이르기 전에 통과했던 모든 감정들을 반대 방향에서 횡단해야 한다고 느꼈다. - P240

다시는 결코 돌아가지 않을 고장에서, 그곳에 갈 때 이미 통과했던 역의 이름과 모습을 모두 알아보게 하는 같은 노선의 기차를 타고 귀갓길에 오를 때면, 그래서 한순간 기차가 그런 역 중 하나에 멈출 때면, 우리가 방금 떠난 장소를 향해 처음에 그랬던 것처럼 기차가 다시 출발하는 환상에 사로잡힌다. 이런 환상은 이내 사라지지만, 그러나 한순간 우리는 떠난 장소를 향해 다시 실려 간다고 느꼈으며, 바로 이것이 추억의 잔인함이다. - P241

왜 나는 그녀의 말을 믿었을까? 거짓말은 인류에게 본질적인 것이다. 거짓말은 어쩌면 쾌락의 탐색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하며, 게다가 실제로 이런 탐색의 지배를 받는다. 우리는 쾌락을 보호하기 위해, 또는 쾌락의 폭로가 명예에 어긋날 때면 그 명예를 보호하기 위해서라도 거짓말을 한다. 우리는 살아가는 동안 내내 거짓말을 하며, 특히 어쩌면 우리를 사랑하는 사람에게만 거짓말을 하는지도 모른다. 사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쾌락을 위해 그들을 두려워하고 그들의 존경을 욕망한다. - P328

진실이나 삶은 어려운 문제이며, 결국 그것에 대해 알지 못한 채로, 어쩌면 내게는 피로가 슬픔을 좌우한다는 인상만이 남아 있었는지 모른다. - P3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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