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욕은 되돌릴 수 없지만 친절은 되풀이할 수 있는 법이라, 한 번 모욕하는 것보다는 친절을 맘껏 베푸는 게 더 낫단 얘기죠. 그래서 난 아직 화를 내지 않고 있는 겁니다. 화를 내지 않을 시간도, 화를 낼 시간도 있으니까요. 하지만 그 시간이 다 지나고 나면, 나도 어쩌면 화를 낼지도 모르겠습니다. - P54
서로 마주친 두 남자에겐 원수처럼 폭력을 휘두르건, 부드럽게 우정을 표현하건 서로 치고받는 것 외엔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이 시간의 황량한 사막에서 과거로부터건, 꿈으로부터건, 결핍으로 부터건 결국 여기 존재하지 않는 걸 들먹이기로 했다면, 그건 낯설음이 너무 커서 직접마주치려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런 신비로움이 자기 스스로 모습을 드러내도록 하려면, 이쪽에서도 모든 걸 열어젖히고 드러내야 하는 법입니다 - P62
추억이란 사람이 발가벗겨졌을 때조차도 꼭 지니고 있는 비밀 무기랍니다. 상대방 또한 어쩔 수 없이 솔직해지게 만드는 최후의 솔직함이죠. 정말 마지막 하나까지 다 벌거벗은 상태라고나 할까요. - P63
난 말이죠, 당신을 모욕할 생각도, 기쁘게 할 생각도 없습니다. 친절하게 굴거나, 못되게 굴거나, 때리거나, 얻어맞거나, 유혹하거나, 당신에게 유혹당하고 싶은 생각도 없습니다. 난 그저 제로이고 싶습니다. - P68
정의할 수 없는 시공간인 이 시간과 이 장소의 끝없는 고독 속에서 우린 혼잡니다. 내가 여기서 당신을 만날 이유도, 당신이 나와 마주칠 이유도, 온정을 나누어야 할 이유도, 우리가 내세울 만한, 그리고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부여해 줄 만한 적당한 수치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단순하고, 외롭고, 오만한 제로가 됩시다 - P69
도대체 당신이 뭘 잃고, 내가 뭘 얻지 못했단 말인가요? 아무리 내 기억 속을 뒤져봐도, 난 아무것도 얻은 게 없습니다. 나도 기꺼이 물건 값을 지불하고 싶지만, 바람과 어둠, 우리 사이의 아무것도 아닌 것에 대해 돈을 낼 수는 없는 일이죠. 만약 당신이 뭔가를 잃었다면, 그래서 당신의 재산이 나를 만나기 전보다 줄어들었다면, 우리 둘 모두에게서 사라진 그건 도대체 어디로 갔단 말인가요? 어디 좀 보여주시죠. 아니, 난 아무것도 누린 게 없으니 아무것도 지불하지 않을 겁니다. - P71
손님을 조심하세요. 그는 뭔가를 찾는 듯이 보이지만 사실은 다른 걸 원하고 있답니다. 장사꾼이 짐작도 못하는 그것을 그는 결국엔 얻어내고 말지요. - P77
사랑이란 없습니다. 사랑은 없어요. 아니, 당신은 이미 존재하는 건 아무것도 손에 넣을 수 없을겁니다. 인간은 죽은 다음에야 자신의 죽음을 찾아 헤매고, 하나의 빛으로부터 또 다른빛을 향해 이동하는 위험한 여정 중에 마침내 우연히 죽음을 만나게 되니까요. 그러곤 이렇게 말하죠. 결국 이것뿐이었다. - P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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