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는 사이에 말은 주변 일대가 훤히 내려다보이는 작은 언덕 위에 썰매를 끌어다 놓았다. 달빛을 머금은 눈은 밝게 빛나고 있었다. 때때로 달빛은 마치 녹아내리는 듯했고, 눈은 어두워졌다가 금방 그 위로 북극의 오로라가 찬란하게 반사되었다. - P17
그는 눈 위에 누웠다. 추위는 더 심해졌다. 오로라의 마지막 빛줄기가 흐릿하게 가물거렸고 타이가 숲의 정상을 통해 마카르에게로 비추면서 하늘로 퍼져 나갔다. 종소리의 마지막 메아리가 멀리 찰간에서 울려왔다. 오로라가 확 타오르더니 이내 사그라졌다. 종소리도 잦아들었다. 그리고 마카르는 숨을 거두었다. - P25
마카르가 누군가로부터 총애, 환대 혹은 기쁨을 경험한 적이 있었던가? 그의 아이들은 어디에 있는가? 아이들이 죽어갈 때 그는 괴롭고 힘겨웠으며, 그들은 다 자랐을 때 홀로 힘겨운 가난과 싸우기 위해 그를 두고 떠나갔다. 이제 그는 두번째 아내와 단둘이 늙어버렸고, 기력이 쇠해지고 의지할 데 없는 노년이 찾아든 것을 알게 되었다. 그들은 사방에서 몰아치는 잔혹한 눈보라를 맞으며 초원 속에 서 있는 두 그루의 쓸쓸한 전나무처럼 외롭게 서 있었다. - P47
토이온이 말하는 신실한 사람들은 누구인가? 지상에서 마카르와 같은 시기에 부유한 목조 가옥에 살던 그들이라면 마카르는 그들을 알고 있다………… 그들의 눈이 맑은 것은 마카르가 흘린 만큼 눈물을 흘리지 않았기 때문이고, 그들의 얼굴이 밝은 것은 향수로 닦았기 때문이며, 의복이 깨끗한 것은 다른 사람들의 손으로 지은 것이기 때문이다. - P48
그런데 마카르가 다른 사람들처럼 땅과 하늘이 비치는 맑고 순수한 눈과 세상의 모든 아름다운 것에 기꺼이 열어 보일 깨끗한 마음을 가지고 태어났다는 사실을 그는 알지 못한단 말인가? 지금 그가 자신의 음 침하고 수치스러운 모습을 땅 밑으로 숨기고 싶어 한다면 그것은 그의 잘못이 아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누구의 잘못인가? 그는 이것에 대해 알지 못한다………… 하지만 그의 마음속에 인내가 바닥났다는 사실 하나만은 알고 있었다. - P48
아마도 산모는 헤어날 길 없는 무거운 슬픔이 갓난아이와 함께 세상에 나타나 바로 무덤까지 새 생명을 따라다니려요람 위에 걸려 있다고 직감하는 듯했다. 어쩌면 이것은 완전히 허튼소리였는지 모른다. 하지만 어쨌든 간에 어린아이는 눈이 먼 채로 태어났다. - P176
"불행히도, 마님, 당신이 옳았습니다.…… 아이는 실제로 맹인이고,‘게다가 희망이 없습니다……" 엄마는 슬퍼하면서도 차분하게 이 얘기를 받아들였다. "저는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답니다." 그녀가 조용히 말했다. - P178
「그러나 당시에는 가까운 사람들조차도 그가 어떤 문제에 골몰하고 있는지 알지 못했다. 그들은 단지 푸른 연기에 둘러싸인 막심 삼촌이 흐릿한 시선으로 짙은 눈썹을 음울하게 찌푸리며 때로는 꼼짝하지 않고 몇 시간이고 앉아 있는것을 보았을 뿐이다. 그런데 사실인즉슨 이 불구의 전사는 인생이란 투쟁이며, 그곳에 불구자가 설 자리는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는 이미 대오에서 영원히 이탈했고, 이제는 헛되이 호송 열차에 몸을 싣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삶에 의해 말안장에서 떨어져 땅바닥에 내동댕이쳐진 기사인 것 같았다. 짓밟힌 구더기처럼 티끌 속에서 몸을 뒤척이는 것은 비겁한 짓이 아닌가. 자기 존재의 하찮은 찌꺼기를 구걸하며 승리자의 등자에 매달리는 것은 비겁한 짓이 아닌가? - P181
"으음.....… 그렇군." 어느 날 그는 어린아이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생각에 잠겨 말했다. "이 작은 아이도 역시 불구자로군. 우리 둘을 하나로 합치면 아마도 한 명의 초라한 작은 인간이 만들어질 텐데." 그때부터 그의 시선은 훨씬 자주 어린아이에게 머물기 시작했다. - P182
소리들은 차례로 날아올랐다 떨어졌으며, 너무나 복잡하고 너무나 강력했다. 아이를 사로잡은 파동은 울리고 구르는 주변의 어둠에서 솟아나 그 어둠을 넘어 새로운 파동과 소리로 교체되면서 더욱 긴장되게 일렁거렸다.……… 파동은 더 빠르게, 더 높이, 더 고통스럽게 아이를 일으키고, 흔들고, 달랬다……… 또다시 이 어렴풋한 혼돈 위로 길고도 슬픈 사람의 외침 소리가 들려왔고, 곧이어 만물이 고요해졌다. - P191
때때로 무더운 한낮에 주위가 고요하고, 사람들의 움직임이 뜸해 자연 속에서 오직 끝없고 조용한 생명력의 질주만이 감지되는 독특한 정적이 드리울 때, 맹인 아이의 얼굴에는 독특한 표정이 나타났다. 외부의 정적으로 인해 아이 영혼의 심연에서는 오직 그만이 이해할 수 있는 어떤 소리가 일었고, 아이는 바짝 긴장하여 그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듯했다. 그런 순간에 아이를 바라보고 있노라면 마치 아득한 노래 선율처럼 어렴풋이 생겨나는 사고가 그의 심장에서 울리기 시작했다고 여기게 되었다. - P197
아이가 피리 부는 사내에게로 달려가 잠자리에 들기 전 그의 마구간에서 두어 시간이나 죽치고 앉아 있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다. 이제 이 시간은 아이에게 더없이 행복한 순간이 되었고, 엄마는 아이가 심지어 이튿날까지도 전날 저녁의 인상에 파묻혀 있고, 자신의 사랑에 전처럼 충실하게 응하지 않으며, 자신의 팔에 안겨 포옹을 하면서도 이오힘의 저녁 노래를 떠올리는 것을 질투심에 불타며 바라보았다. - P205
소년의 눈동자는 자신이 행하는 것과는 아무 상관없이 어딘가를 응시하고 있었는데, 저물어가는 태양이 그것에 야릇하게 반사되고 있었다. 순간 이 모든 것은 소녀에게 무서운 악몽처럼 느껴졌다. - P235
전체적으로 이 우정은 행운의 진정한 선물이었다. 이제 소년은 더이상 완전한 고립을 추구하지 않았고, 어른들의 사랑이 그에게 줄 수없는 소통을 발견했으며, 가끔 그에게 찾아드는 예민한 정신적 평온의 순간에도 소녀가 곁에 있는 것이 기분 좋았다. - P2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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