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록 어둠과 그 무한한 방들과 모양이 바뀌는 그림자들이 두렵긴 하지만, 나는 무미건조한 낮이면 밤을 열망한다. 때로는 허물어지는 집의 잔해와 혼돈 속에 사는 게 나의 운명이라는 생각이 든다. - P12
내가 전하고 싶어 안달할 만큼 위대한 진실을 깨달은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우리가 처한 상황과 시대에 빛을 드리울 만큼 모범적인 삶을 살지도 않았다는 거다. 나는 살아왔지만, 살아버린 것이기도 하다. 이곳에서의 삶은 너무나도 달라서, 마치 하나의 삶을 끝내고 이제 또다른 삶을 살고 있는 것만 같다. 그러니 어쩌면 나는 나 자신이 한때 다른 곳에서 또다른 삶을 살았지만 이제 그 삶은 끝나버렸다고 말해야 하는지도 모르겠다. - P13
"난민." 나는 말했다. "망명."‘그가 고개를 들었고 나는 눈길을 떨구었다. 그는 화가 난 눈빛이었다. "아, 영어를 하시는군요." 그가 말했다. "샤반 씨, 그동안 저를 줄곧 놀린 거로군요." - P23
대체 얼마나 나이를 먹어야 목숨이 아깝지 않게 되는 거지? 혹은 언제가 돼야 두려움 없이 살기를 바라지 않게 되는 거지? 내 목숨이 자신들이 들여보내주는 젊은이들의 목숨보다 덜 위협받는지는 어떻게 아는가? 그리고 더 안전하고 나은 삶을 살고 싶은 것의 어디가 부도덕하단 말인가? 왜 그게 탐욕이나 게임일 뿐이란 말인가? - P27
그녀는 오지 않았다. 가끔은 오겠다고 말하고서도 오지 않는다. 그녀는 마음 내킬 때 나에게 오는 것이거나, 혹은 그런 것처럼 보이는데, 그것은 내가 늘 선호하기는 어려운 방식이다. 그럼 전화를 들이라고 그녀는 내게 말하지만, 나는 그렇게 안 하는 편을 택한다. 나는 집에 전화를 들였던 적이 한 번도 없고, 이제 와서 번거롭게 전화를 들일 마음도 없다. - P72
반면에 나는, 나에게 티켓을 팔았던 사람이 왜 영어를 못하는 척하라고 조언한 것인지, 혹은 언제쯤 영어를 할 줄 안다고 말하는 게 현명것인지 여전히 아리송했다. 그리고 나는 내 동료 캠프 거주자들이를 모르는 게 나와 마찬가지로 전략적인 것은 아닌지, 그들이 영어를 모르는 척해야 하는 이유를 알고 있거나 혹은 그들 또한 다른 곳의 또다른 티켓 판매인에게서 들은 약삭빠른 조언에 따라 행동하고 있는것은 아닌지에 대해서도 분간할 수 없었다. - P79
"저는 오랫동안 생명의 위협을 느껴왔습니다." 내가 말했다. 지금에야 비로소 영국 여왕 폐하의 정부가 그 사실을 인지하고 제게 피난처를 제공했을 뿐이죠. 이제는 쓸모없는 목숨일 뿐이지만, 그래도 제게는 아직 소중하거든요. 어쩌면 지금보다 훨씬 더 소중했던 옛날에도 똑같이 쓸모없는 목숨이었을지 모르지만." - P115
나는 내가 또다른 존재의 계획 아래 내 뜻과는 무관하게 사용되는 도구, 다른 누군가가 들려주는 이야기의 등장인물이라고 느낀다. ‘나‘가 아니라 ‘나‘라는 존재가 자신에 대해 이야기하며 자신을 영웅적으로 만드는 일 없이, 자신을 포위당한 것처럼 보이게 만드는 일 없이, 논박할 수 없는 것을 논박하고 바꿀 수 없는 것에 앙심을 품는 존재로 그린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 아니겠는가? - P117
나는 내 고국에서 온 누군가를 만나야 할 때면 늘 느끼던 두려움을 억눌렀다. 그들은 내가 정말 영국인이 되었다고, 정말 다르다고 자신들과 정말 동떨어져 있다고 말하거나 속으로 그렇게 생각할까? 마치 내가 변했건 변하지 않았건 세상에는 이곳과 그곳밖에 없다는 듯이, 마치 그것이 소외에 관한 무언가 단순한 사실을 입증하기라도 한다는 듯이, 마치 내가 더이상 나 자신이 아니라 스스로를 속이는 가식적인 존재, 가공된 꼭두각시라도 된다는 듯이. - P125
나는 앞을 바라보고 싶지만 늘 뒤를 바라보고 있고, 이후로 일어났던 다른 사건들, 내게 커다랗게 다가와서 모든 일상적 행동들을 지시하는 폭군 같은 사건들에 의해 아주 미미해진 아주 오래된 시간을 뒤적이고 있다. 그래도 뒤를 돌아보면, 어떤 대상들은 여전히 눈부신 악의로 빛나고 모든 기억이 피를 흘리게 한다. - P145
하지만 후세인 삼촌이 떠난 일이 아버지에게 일종의 상실이었다면, 하산에게는 버려짐이고 사별이었다. 그는 거의 누구와도 말을 하지 않았고, 집에 있을 때면 얼굴을 벽 쪽으로 돌린 채 침대에 누워 있거나 앉아서 후세인 삼촌이 준 공책에 글을 쓰거나 항공우편으로 보낼 편지를 썼다. - P158
"너를 만나게 될 거라고 생각은 했지만, 그게 너일 줄은 몰랐구나" 그녀가 말했다. - P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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