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통 나처럼 일년이나 기흉 주사를 맞아온 사람에게는 마취를 하지 않는다. 그의 손가락 끝의 싸늘한 감촉과 진찰복에 묻은 붉은 핏자국에 공포를 느껴 얼떨결에 내뱉었으나, 뱉고 나니 그 말이 생체해부를 하던 날 미군 포로가 수술대에서 애원하며 했던 말이라는 데 생각이 미쳤다. - P31
‘모두 죽어나가는 세상 아이가. 병원에서 죽지 않더라도 매일밤 공습으로 죽어가는 거야.‘ 스구로는 토다가 오늘 오후 화난 듯이 중얼거린 말을 떠올렸다. 회진이 끝난 뒤 공동입원실에서는 한바탕 헛기침이 울려퍼지고 환자들이 박쥐처럼 침대를 기어서 오르내리고 있었다. 스구로는 만일 인간의 죽음에 냄새가 있다면 그건 분명이 어두운 방의 악취일 거라고 막연히 생각했다 - P46
"당연한 거 아이가. 공습으로 죽으면 기껏해야 나까가와 강에 뼛가루나 뿌려지겠지만 수술받다 죽으면 진짜 의학발전에 공헌하는거니까. 아지매도 머잖아 같은 병을 앓는 많은 환자를 구하는 길이 열린다 카면 죽어도 좋다 안카겠나?" - P55
그것이 이 아름다운 부인의 남편에 대한 질투인지, 아니면 본디 자신은 얻을 수 없을 것 같은 행복에 대한 질투인지, 그것도 아니면 어두운 공동입원실에 누워 있는 환자를 대신한 단순한 의분인지는 자신도 알 수 없었다. - P62
타베 부인은 백치처럼 커다랗게 벌린 입 사이로 빨간 혀를 보이며 쑥 들어간 눈을 부릅뜬 채 이쪽을 응시하고 있었다. 사체가 눈을 부릅뜨고 있는 것은 수술 중에 고통스러워했다는 증거였다. 그녀의 복부와 손 그리고 얼굴에까지 온통 피가 튀어 있었다. - P69
자신이 어째서 아주머니에게만 그토록 오랫동안 집착했을까 하고 스구로는 생각했다. 그는 이제야 비로소 알 것 같았다. 토다가 말한 대로 모두가 죽어가는 세상에서 단 한사람이나마 살려보고자 했던 것이다. 나의 첫 환자, 그녀가 나무상자에 담겨 빗속에서 옮겨지고 있다. 스구로는 이제 오늘부터 전쟁도 일본도 자신도 모두가 될 대로 되라고 생각했다. - P79
"어차피 얼마 안 있어 죽을 환자예요. 안락사 쪽이 환자 본인을 위해서도 훨씬 도움이 되잖아요."
"죽게 되어 있더라도 죽일 권리는 그 누구에게도 없어요. 하느님이 무섭지 않나요? 당신은 하느님의 벌을 믿지 않나요?" - P109
여러분에게 묻고 싶다. 여러분도 역시 나처럼 한꺼풀을 벗기면 타인의 죽음이나 고통에 대해 무감각한가. 약간의 나쁜 짓이라면 사회로부터 벌받지 않는 이상 별다른 가책이나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으면서 오늘까지 살아왔는가. 그리고 어느날 그런 자신이 이상하게 느껴진 적이 있는가 - P136
그러나 공동입원실 입구에 들어서는 순간, 어둠속에 희붐하게 늘어서 있는 세줄의 침대 위에서 환자들이 일제히 자신을 바라보자 스구로는 다리에 힘이 풀려 후들거렸다. 그는 눈을 내리깐 채 곧바로 침대와 침대 사이를 지나 빠져나갔다. 나는 이제 이 환자들을 똑바로 볼 수가 없어. 그는 마음속으로 신음했다. - P1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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