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현듯 떠오르는 추억의 순간들을 아들과 나누고 싶었을 뿐이다. 친구들이 꽁꽁 얼어붙은 찰스 강을 달려서 건너는 동안 눈 쌓인 다리를 건너면서 쟤네는 왜 저렇게 무모할까 생각했던 일, 좋아하던 휴턴 도서관에 처음 간 날 몽테뉴의 수양딸 마리 드 구르네가 쓴 희귀본을 대출 신청하고 사서가 찾아주기를 기다리던 일.적은 말로도 나에게 너무나 많은 걸 가르쳐주셨던, 오래전에 돌아가신 로버트 피츠제럴드 노 교수의 얼굴. 하비스트에서 마지막으로 마신 술. - P16
"눈앞에 파티가 펼쳐지고 심지어 그 소리가 들리는데도 초대받지 못한 느낌이랄까." 정말 힘들었던 건 내가 이미 초대받았다는 사실을 잊지 않는 것이었다고 말해주고 싶었다. - P17
브래틀 거리에 다가가니 많이 변한 것 같으면서도 변한 게 거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 P21
반면에 내 삶은 초월적인 노숙자의 삶이었다. 그들이 외출했다가 돌아오는 동안 나는 집에 계속 머물며 점점 더 그을리고 점점 더 지루해졌다. 종일 책 읽는 것 말고는 할 일이 아무것도 없었다. 강의는 없었고, 가끔 과외만 했다. 글을 쓰지 않았고, 집에 TV도 없었다. - P31
카페 알제에선 온종일 죽치고 있을 수 있었다. 카페 알제는 하버드 광장 옆에 있는 작고 어수선한 반지하 카페로, 작고 흔들거리는 테이블 십여 개가 놓여 있어 금방이라도 무너져 내릴 듯한 미니어처 카스바를 연상시켰다. 적정 면적의 10분의 1도 안 되는 공간에 어떻게 그 많은 테이블과 의자, 커다랗고 고풍스런 에스프레소 기계를 다 배치하고 부엌까지 만들었는지 그저 놀라울 뿐이었다. 카페 주인은 요리와 계산, 접대와 청소를 부업으로 하는 공학자가 틀림없었다. - P36
나는 그와 정반대였다. 타인에 대한 관심이야 당연히 있었지만, 너무도 많은 굽잇길과 장애물, 의심과 망설임을 극복하며 먼 길을 돌아오기 때문에, 우정을 향해 절반쯤 나아가다 보면 반드시 좌절과 실망감이 찾아왔고, 그러면 그냥 포기해 버리고 말았다. - P51
나는 모두를 포용했지만 단 한 사람도 사랑하지 않았다. 그는 사랑을 솔직하게 표현했지만 내 사랑은 마음속 깊은 곳에 묻혀 있었다. 그는 미국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벌써 케임브리지에 사는 거의 모든 주민과 말을 튼 반면, 나는 하버드 대학원에서 사 년째 공부했지만 그해 여름에는 거의 모든 날을 아무하고도 말하지 않은 채 보냈다. 그는 기분이 상하거나 지루할 땐 발끈해서 안절부절못하다가 폭발했지만 나는 그야말로 평정심의 화신이었다. 그는 모든 일에 대해 확고한 자기 의견을 갖고 있었지만 나는 타협이란 이름과 평정심이란 별명을 갖고 있었다. 그가 무슨 일을 시작하면 아무도 그를 막을 수 없었지만 나는 누가 조금만 얼굴을 붉혀도 아무것도 못 했다. 그는 누군가를 버리고 깨끗이 잊을 수 있었지만 나는 누군가를 버리기로 결정하고 나서도 영원히 그에게 앙심을 품곤 했다. - P72
그는 날마다 벼랑 끝에 서 있었지만 나는 벼랑 밑을 내려다봐야 했던 적이 한 번도 없었다. 내게는 그 심연을 가릴 담장이나 생울타리가 항상 있었던 반면 그에게는 그런 것이 주어지지 않았다. 한편 또 다른 차이도 있었다. 그는 그 벼랑에서 물러서서 살아나올 방법을 알고 있었지만 나는 벼랑과 나 사이에 그를 세워놓았다. 그는 내 가림막, 내 스승, 내 목소리였다. 어쩌면 내가 그토록 필사적으로 추구했던 삶이 그의 삶이 었는지도 모르겠다. - P96
당신이 누군가를 진심으로 원하면 상대방도 당신을 진심으로 원하게 된다. 당신이 무엇을 입고, 어떤 사람 이고, 어떻게 생겼는지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 - P120
이런 여자들은 항상 우울해하고, 남자들을 우울하게 만든다. 남자들을 충분히 우울하게 만들고는 남자를 비난하고, 흥미를 잃고, 우울하게 만들 새로운 남자를 찾아 나선다. - P148
그는 어디를 공략하면 상처를 줄 수 있는지 알고 있었다. 나의 어디를 공략하면 내가 상처를 받을지도 정확히 알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곳을 절대로 건드리지 않았다. - P168
그는 끝내 알지 못했다. 그가 다양한 삶의 방법을 내게 보여주기 위해 다른 세상의 문을 더 열어젖히고 케임브리지에서 나를 끌어내려 하면 할수록, 나는 하버드가 내미는 작은 특전과 잠정적인 약속을 더 절박하게 붙들고 늘어졌다는 사실을. - P173
나는 그가 왜 그렇게 화를 내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어쩌면 나의 세계에서 그도 비상용이라는 잠정적인 지위를 획득했다는 사실을 문득 깨달았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비상용 삶이 넘쳐나는 비상용 도시에서 피어나는 비상용 우정. - P184
우리를 하나로 묶어주는 것은 어디서도 평범한 사람들과 함께 평범한 삶을 살아갈 수 없는 우리의 극단적인 무능력이었다. 우리는 평범하게 사랑하고 평범한 집에서 살며 평범한 일을 하고 평범한 텔레비전을 보고 평범한 식사를 하는 삶을 살지 못했다. 심지어 우린 평범한 친구를 갖거나 유지할 수도 없었다. - P199
증오는 망각을 돕고 우리가 받은 상처를 빠르게 치유해주며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남긴 상처를 덮어준다. - P202
그는 나보다 딱 세 걸음 앞서가는 내 운명이었다. 나는 종합시험에 떨어지고 짐 싸서 뉴욕으로 돌려보내질 수 있었고, 지금으로부터 일 년 후엔 이 파티는 물론이고, 아무도 나를 기억하지 못할 수도 있었다. - P272
나는 그를 부끄러워했고, 그를 부끄러워하는 나 자신이 부끄러웠다. 내가 속물이라는 사실이 부끄러웠다. 우리의 공통점이 열악한 경제 형편 말고도 훨씬 더 많다는 사실을 남들에게 들키는 것이 부끄러웠다. 내가 그를 얼마나 좋아하는지 스스로 인정하지 않는 게, 우리를 하나로 묶는 것은 저급한 카페에서 어울리기 좋아하는 극빈자 정체성뿐이라고 생각하는 나 자신이 부끄러웠다. - P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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