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삼부작의 마지막 작품 읽기 시작. 초반 몰입도는 이 작품이 가장 좋은듯.

오이디푸스: 그 정화 의식이라는 게 어떤 거란 말씀인가? 어떻게 해서 깨끗하게 하란 말씀인가?
크레온: 한 사람을 추방하거나 아니면 피를 피로 갚으라는 것입니다만……
- 소포클레스, <오이디푸스 왕> - P1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이목구비가 뚜렷한 용모였다. 여자의 이름은 포니아 팔리. 아무것도 숨기지 않는 것 같으면서도 언뜻 끝을 알수 없는 외로움을 드러내 보이기도 하는 무표정하고 강마른 여러 표정 이면에, 지금껏 어떤 고통과 고뇌를 견뎌냈는지는 꼭꼭 숨겨둔 것만 같았다.
(끝을 알 수 없는 외로움이란.) - P12
의회와 신문 그리고 방송에서는 자기만 옳다는 주장으로 눈길을 끌어 인기를 얻어보려는, 남 탓을 못해, 남의 잘못을 개탄하지 못해, 그리고 그런 잘못을 처벌하지 못해 안달인 볼썽사나운 인간들이 도처에서 설교를 늘어놓고 있었다.
(지금도 다르지는 않다.) - P13
‘도대체 우리가 왜 이렇게 미쳐 돌아가고 있는 걸까‘ - P15
콜먼이 그 대학과의 모든 인연을 자발적으로 끊지 않을 수 없게 만든 원인이 되었고 스스로를 유죄로 만들어버린 말실수를 하게 된 것은 정교수로 강의를 맡은 뒤 두번째 학기가 반 정도 지날 무렵이었다. 그것은 오랜 기간 아테나대학에서 강의를 하고 대학을 운영하는 동안 쏟아낸 수백만 마디의 말 가운데 그를 유죄로 만든 단 한마디였고, 콜먼이 이해한 바로는, 그 한마디야말로 자신의 아내 아이리스를 죽게 만든 직접적인 원인이기도 했다 - P20
"이 두 학생에 대해 알고 있 는 사람 없나요? 이 학생들이 실제로 존재하기는 하는 건가요. 아니면 유령들(spooks) 인가요?"
(이 작품의 문제의 발단.) - P20
콜먼의 머리통, 한때는 누구도 감히 공격할 수 없던 학장 그리고 고전문학 교수의 두뇌를 감싸고 있던 머리통은 잘려나간 거나 마찬가지였고, 내가 두 눈으로 목격하고 있는것은 손발마저 잘려나간 나머지 몸통이 중심을 잃고 걷잡을 수 없는 상태로 빠져드는 모습이었다. - P28
겉으로는 멀쩡해 보이는 그것이 육체적 질병보다 한층 더 위험한 이유는 그걸 완화시키는 데 모르핀 점적 주사나 척수신경 차단 마취 혹은 환부를 도려내는 근치 수술 같 은 것이 하등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데 있다. 일단 마음의 병이라는 녀석의 손아귀에 붙들리고 나면 거기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죽는 수밖에는 없는 것처럼 보이니 말이다. 이런 현실을 받아들이는 것은 어떤 것과도 비교될 수 없다.
(마음의 병이란...) - P30
"노포크 창녀촌에서는 검둥이라고 쫓겨났고 아테나대학에서는 흰둥이라고 쫓겨난 거야." - P37
그 지혜는 남에게서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는 사람의 지혜라고나 할까. 그게 그녀에겐 지혜고, 긍지이긴 하지만, 그건 소극적인 지혜인 데다 우리가 하루하루 살아가는, 방향을 잃지 않게 해줄 그런 종류의 지혜는 못 되는 거지. 이 여자는 목숨이 붙어 있는 동안 내내 삶이 자신을 짓밟아 뭉개려 드는 경우만 겪고 살아왔어. 이 여자에게 배움이라는 건 모두 그런 삶에서 얻어진 걸세."
(지혜란 무엇일까...) - P57
그렇다면 왜, 이 극단적인 은둔의 실험을 고독하지만 모자람 없고, 완전한 생활로 바꿔놓은 다음에, 왜 갑작스럽게 내가 외로워야 하는가? 무엇에 대한 외로움인가? 사라진 것은 사라진 것이다. 엄격한 생활 태도를 누그러뜨린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며 자제하고 있던 욕망을 원상태로 되돌린다는 것도 있을 수 없다. 정확히 무엇에 대한 외로움인가? 간단하다. 내가 혐오감을 갖게 된 것에 대한 외로움이다. 내가 등을돌렸던 것에 대한 외로움이다. 삶에 대한 외로움이다. 삶의 번잡함에 대한 외로움인 것이다. - P90
어떤 것도 영원하지 않으며 또한 어떤 것도 소멸하지 않는다. 그리고 어떤 것도 영원하지 않기 때문에 어떤 것도 소멸하지 않는다.
(소멸하지 않는다.) - P103
단지 두 차례나 전장을 다녀와서 아무런 도움도 없이 혼자 그 후유증을 극복한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게 문제이긴 하지만 말이다. 그는 분노를 가라앉히지 못한다. 그는 마음의 평정을 잃었다. 그는 좌불안석이다. 그는 술을 마시고 있다. 그를 격노해 길길이 날뛰게 만드는 것은 어렵지 않다. - P127
베트남에서 복무할 때 사람을 죽여본 적이 있나요?" 베트남에 파병되었던 병사들 중에서 살인을 해보지 않은 인간이 어디 있다던가? 베트남으로 파병된 병사들이 거기 가서 하기로 되어 있던 게 바로 살인 아니었나? - P133
하지만 그런 다음에도 과거의 모든 기억은 지나간 일로 묻히지 않고, 그의 앞길에 진을 친 채 기다리고 있었다. - P147
이스트오렌지고등학교에서는 수석 졸업생이었던 그가 인종차별을 하는 남부에서는 단지 또다른 검둥이에 불과했던 것이다. 인종차별이 남아 있는 남부에서는 흑인들에게 개별적인 정체성이 존재하지 않았고, 그와 그의 룸메이트도 개별적인 존재가 아닌 그저 검둥이였던 것이다. 세밀한 구별 같은 것은 허락되지 않았고, 그 충격은 그야말로 통렬한 것이었다. 검둥이, 그것이 그를 지칭하는 말이었다. - P192
"그 백인이 아무리 좋은 의도를 가지고 있더라도, 흑인은 지적으로 열등하다는 가정이 늘 존재하게 마련이다. 말이나 얼굴 표정, 목소리에서 느껴지는 어조, 찌증 같은 것을 통해서, 심지어는 그런 것들과 정반대가 되는 인내나 자비심을 멋지게 드러내는 행동을 통해서 직접적으로 표현하진 않더라도 말이다. 어떻게든 백인은 너희에게 너희가 멍청이라도 되는 것처럼 이야기를 걸 것이고, 그러다가 너희가 멍청이가 아닌 것 같으면 놀라는 거지." - P193
하지만 뒤늦게 누군가가 콜먼을 면전에서 검둥이라고 부르는 경우를 당하면서, 콜먼은 자신의 부친이 그를 위해 겪어오고 있었던, 위대한 미국에 대한 위협이 되는 것을 막기 위한 엄청난 장벽의 존재를 마침내 알아볼 수 있게 되었다. - P1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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