윌리엄 트레버의 <여름의 끝> 재미있다. 여운이 남는 결말. 여름은 사라지지 않는다.

그들은 부모라서 어쩔 수 없이 아들을 너무나 대단하게 보았다. 플로리언은 그 사실을 알았다. 심지어 당시에도 대충은 알고 있었다. 다른 예술 분야에 도전해보라는 제안도 받았지만 매번 결과는 부정적이었고, 그래도 부모님은 기대를 버리지 않는 듯했다. 하지만 이제 그의 기억 속에는 실패만 남아있었다. 처음에는 속상했지만 나중에는 신경을 덜 쓰게 되었다. 집에는 책이 가득했고 그는 책을 많이 읽었다. - P46

코널티 양이 광장에서 그 사람을 가리켰을 때에야 그녀는 깨달았다. 캐시앤드캐리에서 그가 미소 지었을 때도 알았다. 햇살을 받으며 함께 서 있었을 때, 그가 담배를 권하고 그녀가 고개를 저었을 때 그녀는 이미 달라져 있었다. 함께 있는 모습이 사람들 눈에 띌 수 있었는데도 개의치 않았다. - P75

플로리언은 꿈이 이어지기를 바라며 다시 잠을 청했다. 어릴 때도 자주 그렇게 해봤지만 한 번도 성공한 적은 없었다. 개는 침실 문 너머 층계참에 곤히 잠들어 있었다. 꿈의 자세한 내용은 점점 흐려지다가 완전히 사라졌다. - P86

고통의 시간은 끝났지만 그녀는 그 시간이 아직 지나지 않았기를, 항상 무언가가 남아 있기를, 움츠림이나 떨림, 아직 풀리지 않은 분노의 일부라도 남아 있기를 소망했다. - P104

그가 궁금했고, 궁금해하지 않으려고 노력했고, 궁금해하면 안 된다는 것을 알았다고 말하고 싶었다. 그가 안녕하세요, 하고 말했을 때 누구인지 바로 알았다고 말하고 싶었다. - P111

그는 전과 하나도 다르지 않은 모습이었다. 엘리는 자꾸만 그에게로 눈길이 향하는 자신을 주체할 수 없었다. 한 번은 눈이 마주치자 그가 미소를 지어 보였고, 그녀는 자기 마음을 알까 궁금했다. 모르면 좋겠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 P113

엘리는 캐시앤드 캐리에서 그를 만났을 때 자기도 모르게 반지를 숨기지 않았을까, 오늘 아침에도 그러지 않았을까 자문해보았다. 자기도 모르게 하게 되는 일들을 조심해야 한다, 수녀님들은 그렇게 말하곤 했다. 무슨 일이든 그걸 행하는 사람은 바로 자신이다. - P117

침묵하는 이유는 엘리에게 고통을 주고 싶지 않아서일까? 혹은 시작은 그렇지 않았으나 이제는 기쁨이 된 관계를 갑작스럽게 끝내고 싶지 않아서일까? 아니면 과거에도 자주 그랬듯이 뭐든 숨기고 싶어 하는 성향이 우세했던 것일까? 알 수 없었다. 미루고 있을 때는 그게 옳다고 느꼈지만 숨긴다고 해서 어떻게 해볼 수 일이 아니며, 자신의 행동과는 상관없이 어쨌든 일어날 일임을 그는 알고 있었다. - P183

그는 떠날 테고, 매일 아침 가장 먼저 드는 생각은 그가 떠났다는 사실이 될 것이다. 지금 아침에 가장 먼저 드는 생각이 그가 있다는 사실인 것처럼. - P185

그들은 코리 호수에 도착했다. 지금까지 두 사람이 함께한 이 여름은 앞으로도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플로리언은 그렇게 말했다. 라이어의 어스름한 숲도, 올러리의 미로도, 라벤더나 나비들까지도. 그의 클룬힐, 그가 머릿속에 그려본 곳, 그리고 그녀의 셜해나. "모든 것이." 그가 말했다. 추억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 P186

그날 밤 엘리는 잠결에 울었다. 흐느끼는 소리가 들릴까봐 애써 잠에서 깨어났다. 그녀는 자기가 우는 소리를 들었지만 겨우 깨어나 보니 남편은 아무것도 모른 채 자고 있었다. 베개가 젖어 있어 뒤집었는데, 아침이 되어 보니 눈물은 마치 꿈속에서 흘렸던 것처럼 사라지고 없었다. 하지만 꿈이 아니었음을 그녀는 알았다. - P190

그가 주는 것을 받는 일은 그녀는 남고 그는 간다고 말하는 것과 같았다. 뭔가를 주고받는 일은 이별의 표시, 이별의 확인이라고 말하는 것과 같았다. 예전 같았으면 그러지 못했겠지만 이제는 아니라고 말할 수 있었다. - P222

플로리언은 거짓을 물리치며 부드럽게, 가능한 한 다정하게 그렇게 말했다. 거짓은 시간이 지나 진실이 드러나며 상처에 상처를, 고통에 고통을, 수치심에 수치심을 더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시간의 엄중한 지혜가 두 사람 모두를 벌할 터였다 무자비하게. - P234

두 사람이 친구가 되었을 때 그녀의 외로움은 그의 외로움이 되었다. 그러다 그는 지나친 욕심을 부려 우정에서 너무 많은 무엇을 바람으로써 위태로운 사랑이 피어나는 것을 무심히 내버려두었다. 그녀는 그에게 왔고, 이제 더 커진 죄책감은 연민을 더욱 키웠으며, 죄
책감에는 연민이 가진 어떤 위엄까지 드리워졌다. 무모한 착각은 오늘 일어난 일로 인해 조금 덜 무모해 보였고, 가망없는 갈망은 조금 더 설득력을 지니는 것 같았다. 두 사람은아무 말도 없이 앉아 있었고 시간은 멈춘 듯했다. - P254

엘리가 깨달은 또 하나의 서늘한 진실은 그의 괴로움을 덜어주기 위해 사실을 말한다면 그것은 자신이 줄 수 있는 가장 큰 고통을, 아무런 잘못이 없는 사람이 겪어서는 안 되는 그런 고통을 불러일으키리라는 것이었다. - P273

그리고 침입자도 라스모이를 떠나버렸으니 엘리 딜러핸과 그녀의 우정도 흔들리지 않을 것이다. 우정은 더욱 돈독해질 것이며 두 사람 다 그 사실을 알고 있다. 말하면 안 되는 일, 결코 말하지 않을 일에 대해서는 둘 다 언급하지 않을 것이다. - P2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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