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산이 왈칵왈칵 앗, 이렇게 재미있는 과학이 11
애니타 개너리 지음, 김은지 옮김 / 주니어김영사 / 1999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이 책은 화산에 대한 이야기를 적은 책 입니다. 저는 화산에 대한 내용으로는 용암, 마그마, 현무암 등만 알고있습니다. 저는 이 책을 일으면서 알게된 사실을 적었습니다. 

   맨틀은 대륙 지각 다음의 지구 안에 있는 고체이다. 하지만 온도가 높은 행에 의해 하부 맨틀이 데워지면서 연약권에 대류 현상이 생겨난다. 또한 지각은 몇 개의 판으로 나누어져 있다. 이 판들은 맨틀의 대류로 움직이게 된다. 이 때 판과 판의 경계부에서 화산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 지각 변동이 일어난다. 이것을 판구조론 이라고 한다. 

 섬은 주로 화산들이 바닷 속에서 화산이 폭발하여 솟아오른 것이다. 하지만 물 위로 솟아오르지 못한 해저화산이 훨씬 더 많다. 지구의 화산들 중 3분의 2가 바로 이러한 해저 화산들이다. 서기 79년 폼페이는 갑자기 베수비오 화산 폭발로 모든 것이 순식간에 화산제로 덮여졌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화산재에 덮여 인간 화석이 되엇다. 

 화산이 폭발할 때는 마그마 속에 들어 있던 수증기, 이산화탄소, 수소,질소 등의 휘발성가스와 액체 형태인 용암이 분출된다. 또 화산재, 화산탄, 부석 등의 고체 물질들도 분출된다. 우리나라의 백두산 화산 폭발로 발해 제국이 멸망했다는 설도 있다. 이것은 어떤 일본 학자가 주장한 얘기로 백두산에서 분출한 화산재가 일본까지 날아갈 정도로 큰 화산폭발이었는데, 그 시기가 발해가 멸망한 기기와 같다는 것이다. 

 화산 폭팔의 규모는 '화산 폭발 지수'로 기준을 정한다. 화산의 폭발지수는 크게 0~8까지로 구분한다. 어떠한 기록에 따르면 약 7만 4천 년 전, 인도네시아 수마트라 섬의 토바 화산이 지수 8에 해당하는 대폭발을 했다고 한다. 이 폭발로 인해 어마어마한 양의 화산재가 햇빛을 가려서 겨울이 수십년동안 계속되었다. 그래서 북반구의 식물 중 4분의 3이 사라졌다고 이야기 하고 있다. 이러한 대규모의 화산은 더이상 일어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아직 지수가 6이 넘는 것들이 많다고 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높은 산이 아찔아찔 앗, 이렇게 재미있는 과학이 29
애니타 개너리 지음, 마이크 필립스 그림, 오숙은 옮김 / 주니어김영사 / 2003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이 책은 산에대한 이야기를 적은 책 입니다. 저는 이 책을 읽고 산에대한 이야기를 적었습니다. 이 책을 통해서 산에대한 자세한 내용을 알게될수 있는 점이 좋습니다. 

   이렇게 볼 때 히말라야의 범위는 인도대륙 북쪽에서 중앙아시아 고원 남쪽을 동서로 길게 잇는 만년설의 산맥인데 경우에 따라 그 범위를 다르게 잡기도 한다.
즉 동쪽 부탄의 남차바르와(7,756m)에서 서쪽 파키스탄의 낭가파르밧(8,125m)까지 이어지는 이 산맥이 가장 정통한 의미의 히말라야산맥이며 그레이트히말라야라고도 부른다.

   엄밀한 의미에서 히말라야산맥은 펀잡히말라야에서 끝이 난다. 인더스강이 이 산줄기를 카라코룸산맥과 뚜렷이 나누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카라코룸산맥은 지리적으로나 지질학적으로 히말라야산맥과 뚜렷한 차이가 없기 때문에 양자를 하나의 산줄기로 보아도 무방하다는 주장이 많다.

   그리고 보다 넓게 본다면 '히말라야'라는 어원이 의미하듯 히말라야는 만년설을 이고 있는 중앙아시아의 모든 고봉군을 일컫는다고도 할 수 있다. 중앙아시아 지역에서도 가장 많은 만년설 고봉이 밀집해 있는 산맥은 크게 여섯으로 나누는데 히말라야산맥은 물론, 카라코룸산맥, 힌두쿠시산맥, 곤륜산맥, 천산산맥, 파미르산맥 등이다. 광역 히말라야의 개념은 바로 이들 산맥을 하나의 등반대상지로 묶어 파악하자 는 의미이다.
 또한 히말라야산맥 외에 다른 남부지방에 있는 열대지방에 있는 고산에서 꼭대기에도 눈이 있는데 그 이유는 예전에는 그 지역이 남극부근 쪽으로 있어서 산이 원래는 설산이였지만 대륙이 이동하면서 산이 열대지방 근처인 적도쪽으로 가게된것이다. 그러면서 한정된 높이 이하에 있는 눈은 녹게되고 나머지 위에있는 눈은 온도차이로 녹지안게되는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블랙홀이 불쑥불쑥 앗, 이렇게 새로운 과학이! 35
박석재 지음 / 주니어김영사 / 2001년 1월
평점 :
절판


  이 책은 블랙홀에 대한 이야기를 적은 책으로 우리가 잘 알지 못했던 사실을 적어준 책입니다. 저는 평소때에도 블랙홀에 관심이 많아 이 책을 읽고 독후감을 쓰게되었습니다. 

   검은구멍이라고도 한다. 블랙홀은 A.아인슈타인의 일반상대성이론에 근거를 둔 것으로, 물질이 극단적인 수축을 일으키면 그 안의 중력은 무한대가 되어 그 속에서는 빛·에너지·물질·입자의 어느 것도 탈출하지 못한다.

   일반적으로 태양과 비슷한 질량을 가진 별은 진화의 마지막 단계에 이르면 백색왜성이라는 작고 밝은 흰색 천체가 되어 그 일생을 마친다. 그러나 태양 질량의 수배가 넘는 별들은 폭발을 일으키며 초신성이 된다. 이때 바깥층의 물질은 우주공간으로 날아가고, 중심부의 물질은 반대로 내부를 향해 짜부라져 중성자별이 된다. 이러한 중성자별은 그것에서 나오는 규칙적으로 맥동()하는 전파인 펄서가 발견되어 그 존재가 확인되었다.

   하지만 태양보다 10배 이상 무거운 별들은 폭발 때문에 중심부의 물질이 급격히 짜부라진 후에도 그 중력을 이기지 못하여 더욱 수축하게 된다. 이러한 수축은 천체의 크기가 슈바르츠실트의 반지름에 이르러서야 정지한다. 천체가 이 임계반지름에 이르면 물질의 모든 사상은 한 점에 모이는, 즉 부피는 0이 되고 밀도는 무한대인 특이현상이 일어나고, 모든 힘을 중력이 지배하게 된다. 이러한 천체는 1789년 프랑스의 P.S.라플라스가 처음 생각한 것으로, 그 속을 빠져나오는 데 필요한 탈출속도는 빛의 속도보다 크기 때문에 결국 빛조차 빠져나오지 못한다.

   이러한 천체는 직접 관측할 수 없는 암흑의 공간이라는 뜻에서 블랙홀이라 부르게 되었다. 일반상대성이론에 따르면 블랙홀은 아주 강력한 중력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빛을 포함하여 근처에 있는 모든 물질을 흡수해 버린다. 그래서 블랙홀의 내부는 외부와 전혀 연결되지 않은 하나의 독립된 세계를 이룬다. 만일 지구만한 천체가 블랙홀이 된다면 그 반지름은 0.9cm에 이를 것이고, 태양은 그 반지름이 2.5km보다 작아진다. 실제로 블랙홀이 될 수 있는, 질량이 태양의 10배 이상인 별은 그 반지름이 수십km밖에 안 되고, 반대로 중력은 지구의 100억 배 이상이 된다.

  블랙홀은 직접 관측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오랫동안 이론적으로만 존재해왔으나, 근래에 인공위성의 X선망원경으로 백조자리 X-1이라는 강력한 X선원을 발견하여 그 존재가 확실해졌다. 백조자리 X-1은 청색 초거성과 미지의 천체가 쌍성()을 이루고 있는데, 초거성으로부터 물질이 흘러나와 미지의 천체 쪽으로 끌려들어가는 것이 확인되었으며, 아마도 미지의 천체는 블랙홀로 되어 있을 것으로 추측된다. 또 우주에서 최초로 생겨난 천체인 퀘이사도 중심부에 질량이 태양의 1억배나 되는 블랙홀이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맹꽁이 서당 11 - 고려시대 태조편 맹꽁이 서당 11
윤승운 글,그림 / 웅진주니어 / 2006년 1월
평점 :
절판


   이 책은 고려시대의 시작때 부터 무신의 난 까지의 일을 쓴 택입니다. 저는 이 책을 요약하여 독후감을 썼습니다. 
  고려를 세운 태조 왕건은 혼인 정책은 그가 죽은 듸 큰 문제가 되었다. 왕건과 친인척 관계를 맺은 호족들의 힘이 강해져 호시탐탐 왕위를 노리며 다툼을 벌였다. 943년에 태조가 죽고 뒤이어 맏아들 무가 왕위에 올랐다. 그가 바로 혜종이다. 그러자 왕규는 혜종을 살해하고 자신의 딸이 낳은 손자 광주원군을 왕으로 세울 음모를 꾸몄다. 그는 두 차계에 걸쳐 혜종을 살해하려고 시도했지만 모두 실패하고 만다. 그러다가 혜종이 죽자 왕규는 그 틈을 타서 난을 일으킬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왕건의 사촌 아우인 왕식렴에게 진압되었다. 그 무렵 형인 정종으로부터 왕위를 이어받은 4대 왕 광종은 호족에 대한 부담이 컸다. 그 후 관가에서는 불법으로 노비가 된 자들을 노비 신분제도 에서 해방시켜 주었다. 

 후삼국을 통일한 지어느 60년 고려가 건국 초기의 혼란을 수습하고 새로운 정치제도를 마련하며 국력을 다질 무렵, 만주에서 일어나 요나라는 중국 북부 지역까지 세력을 넓혔다. 그들은 고려를 침략할 계획을 세우고 마침네 993년 소손녕을 앞세운 80만 대군이 고려를 침공하니 이로꺼 고려와 거란의 한판 승부가 시작되었다. 이후 1029년까지 세 차례에 걸쳐 침입해 왔다. 그후 서희 장군이 요나라 장군인 소손영을 만나러 갔다. 그후 서희 장군과 소손영 장군이 대화를 하였다. 그후 서희 장군의 화려한 말솜시로 요나라의 소손영은 고려에게 차지했던 땅을 주고 물러났다. 그후 서희는 압록강 주변에 흥화진, 용주, 철주, 통주, 곽주, 귀주에 성을 쌓았다. 이것이 바로 '강동 6주' 이다. 

 993년 서희는 송나라와 멀리하고 거나라와 가깝게 지내자 했지만 서희는 10년 후 다시 송나라와 국교를 맺었다. 그 후 거한의 성종은 이에 화가나 고려로 진격하였다.  고려의 현종은 다급히 전라도 나주로 몸을 피하고 겨란 진영에 하공진을 보내어 협상하도록 했다. 그 후 협상을 한다 하여 거란은 물러났지만 고려가 협상제한을 하지 않아서 다시 처들어 왔다. 그때 강감찬 장군은 홍화진으로 가서 강물을 막았고 약 20만8천명의 군사를 그 주의에 잠복하였다. 잠시후 거란이 강을 건느려고 하자 강감찬은 막혔던 곳을 빼네었다. 그러자 거란족은 물살에 휘쓸려 내려갔다. 하지만 거란족은 계속해서 계경으로 왔다. 그러자 마을 주민들은 모든 식량을 가지고 가고 우물도 매꾸었다. 거란족이 도착했을 때에는 아무도 없었고 거란 병사도 몹시 지쳐서 후퇴를 하였다. 그 후 귀주에서 고려군과 거란군은 싸웠다. 그때에 고려군의 순풍이 부러왔다. 고려는 이 바람을 이용하여 거한족의 많은 군사들을 죽였다. 이 전투가 바로 '귀주 대첩'이다.

 12세기에 거란이 쇠퇴하자 여진족이 날로 강성해졌다. 만주에서 일어난 완옌부의 추장은 여진족을 통일하고, 점점 남쪽으로 세력을 넓혀 결국 고려와 충돌하엿다. 첫번째 전투에서는 고려군이 여진군에게 패하였다. 1104년 숙종은 윤관의 건의를 받아들여 보병 부대에 기병 부대를 보강한 특수부대 '별무반'을 편성했다. 그러나 숙종은 끝내 눈을 감고  그 뒤를 이어 예종이 왕위에 올랐다. 별무반을 만든 지 3년이 흘러 1107년 예동은 윤관을 원수로 삼아 육군과 수군을 동원한 17만 대군을 이끌고 여진을 공격하였다.윤관은 별무반을 이끌고, 길고 긴 천리장성을 넘어 두만강을 향해 북쪽으로 떠났다. 기병을 보강하여 한층 강해진 고려군은 전투마다 승리라여 여진족 마을을 무너뜨리고 수많은 포로를 잡았다. 고려군이 점령한 지역에 9개의 성을 쌓고 남쪽의 주민 수만 명을 욺겨 살게 하니 이것이 바로 '동북 9성'이다. 그후 여진족은 다시 그 땅을 돌려주면 고려를 잘 섬기겠다고 하였다. 결국 1109년 고려는 동북 9성을 여진족에게 돌려주기로 하고, 군애와 이주한 백성을 철수시켰다. 서경 출신의 승려 묘청은 서경으로 도읍을 옯기며 나라의 증흥을 이룰 수 있다고 주장한다. 에 친구는 왕권과 신권의 대립, 보수적인 문벌 귀족과 개혁을 원하는 관료들 사이의 충돌, 개경과 서겅의 지역 갈등 등 서겅 천도 운둥이 지닌 배경을 살펴본다. 

  이 내용을 보면서 고려시대때 우리나라가 얼마나 많은 다른나라에게 공격을 당했고 그때마다 현명하게 막아내고 또 적군을 처부수는 우리나라 고려시대때의 장군님들과 그 군사들이 자랑스럽고본받고 싶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맹꽁이 서당 10 - 조선시대 순종편 맹꽁이 서당 10
윤승운 글,그림 / 웅진주니어 / 2005년 12월
평점 :
절판


   이 책은 우리나라의 조선시대때의 이야기를 적은책 입니다. 저는 이 책을 읽고 간략하게 정리하여 썼습니다. 
  정조는 영조의 손자로, 아버지는 영조의 둘째 아들인 사도세자이고 어머니는 해경궁 홍씨이다. 1762년 사도 세자가 뒤주에 갇혀 죽자 영조의 맏아들인 효장 세자의 양자로 들어가 왕이 될 수업을 바았다. 그리고 1775년 영조를 대신하여 대리청정을 하다가 다음해 영조가 죽자 왕위를 물려받았다. 정조는 왕위에 오르자 문화 정치를 추진하였으며 왕실의 도서관인 규장각을 설치하여 학문을 연구하도록 하여 인재를 키워내었다. 또한 각종 서적을 편찬하고 새로운 활자를 개발했다. 정조는 당파 싸움에 의해 아버지를 잃었던 만큼 영조에 이어 강력한 탕평책을 실시한다. 당파에 상관 없이 인재를 등용하였고 첩의 자식이라도 능력만 뛰어나면 벼슬을 주었다. 또한 실학과 북학의 장점을 수용하고 장려하였으며 중인 이하 계층의 문학과 예술에도 적극적인 지원을 해주었다. 이 밖에 농업 발전과 형벌 제도 개선, 세금의 합리화 등 백성들을 위한 여러가지 정책들도 폈다. 

  이 내용을 보면서 왕중에서 자신의 이익만이 아니라 자신의 백성을 위하여 천민이라는 제도에서 능력이 있으므로 벼슬을 주는 왕이 존재했었다는 것이 정말 자랑스러웠다. 다른 외국의 왕이나 황제 등도 가난한 사람이나 천민들에게는 계급을 주지 않았겠지만 우리나라의 왕은 우리나라의 문화능력을 키우기 위하여 천민까지 벼슬을 준다는 것이 참 멋지고 자랑스럽다. 

  유향소는 벼슬에서 은퇴한 사람 중에서 지방의 풍기를 단속하고 지방관이 나쁜 행실을 막기 위한 민간 자치 기구였다. 경재소는 지방 관청의 서울 출장소로 정부와 유향소 사이에서 연락 기능을 담당하였다. 

  이 내용을 보면서 사람이 벼슬에서 내려와도 마을의 잘못되어진 부분을 자신이 직접 판단할 수 있는 권리와 그 내용을 정부에 신고할 수 있는 권력과  그에대한 문제점의 벌을 줄 수 있는 권력이 있다는 것을 처음 알게 되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