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드
코맥 매카시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0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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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드>는 일반적인 소설들과는 아주 많은 부분에서 결을 달리하는 작품이다. 보통 소설에서는 극 전체를 이끌어가는 하나의 서사 및 사건이 ‘기승전결’ 구조를 갖추어 이야기가 전개되는 반면, <로드>는 그렇지 않다. 종말이 도래한 세상을 배경으로 하고 그 안에서 어떻게든 살아나가는 부자(父子)의 모습만 비칠 뿐, 왜 종말이 찾아왔는지 그 이유에 대한 서술이 전혀 포함되어있지 않으며 주인공들이 극 중에서 겪는 사건들도 그저 에피소드 형식으로 짧게만 나올 뿐 극 전체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사건은 전무후무하다.

그렇기에 <로드>는 일반적인 소설같은 서사를 기대하고 읽는 사람들을 당황하게 할 수도, 지루하게 할 수도 있다. 맞다, 그 사람은 바로 나다. 사실 나는 이 소설을 두 번째 시도 만에 완독에 성공하였고 첫 번째 시도에선 처참한 ‘중도 하차’라는 결과를 맞이했었다. 그렇지만 처음 독서 때 이 소설의 전반적 분위기를 파악할 수 있었으므로 두 번째 시도 때는 ‘<로드>는 기존 소설들과는 다른 작품이다’라는 인상을 안고 시작해서 그런지 완독에 성공할 수 있었고, 더불어 첫 시도에서는 보이지 않았던 이 작품의 매력을 더욱 깊이 음미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주간 고속도로 나들목의 길게 휘어져나가는 콘크리트 길들이 멀리 암흑을 배경으로 거대한 도깨비 집의 폐허처럼 보였다. (…) 사방이 미라가 된 시체 천지였다. 뼈가 불거진 곳을 따라 살이 찢어져 있었다. 인대는 철사처럼 팽팽하게 말라붙었다. 토탄 늪에서 발굴된 사람들처럼 쭈그러들고 일그러져 있었다. 얼굴은 삶은 시트 같았고, 이는 누렇게 변색되었다.

30p

밤에 머리 위의 산에서 폭풍이 불기 시작해 우지끈 쿵쿵 소리를 내며 아래쪽을 폭격했다. 수의처럼 덮쳐오는 번개 불빛에 황량한 잿빛 세상이 모습을 드러내곤 했다.

57p

내가 <로드>라는 소설에서 느낀 가장 큰 매력은 바로 ‘문장’이다. 책의 어느 페이지를 펼쳐도 나오는 배경에 대한 황량한 묘사는 그야말로 압권이다. 진정한 ‘디스토피아의 묘사’란 바로 이 소설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읽는 동안 내가 직접 황폐한 세계에 머물러 있는 듯한 느낌을 받을 정도로, 정말 폐허가 된 세계의 묘사가 탁월하다.

있지도 않았던 세계나 오지도 않을 세계의 꿈을 꾸어서 네가 다시 행복해진다면 그건 네가 포기했다는 뜻이야. 이해하겠니? 하지만 넌 포기할 수 없어. 내가 그렇게 놔두지 않을 거야.

215~216p

그리고 또하나 말하자면, 이 소설에서 그리고 있는 아버지와 아들의 사랑이 너무도 가슴 아프게 따뜻하다. 불필요한 서사를 접어둔 채로 극을 진행하여 역으로 이들의 관계가 돋보이는 것일까, 아니면 황량한 디스토피아의 배경과 이들의 사랑이 대비되어 더욱 두드러지는 것일까? 뭐가 됐든 독자의 마음을 미어지게 하는 것은 매한가지다.

이 작품을 읽은 뒤 다른 코맥 매카시의 소설들이 궁금해져서 검색을 조금 해보았는데, 불행인지 다행인지 <로드>는 다른 매카시의 작품들과는 결을 달리하는 소설이라고 한다. (이를테면 하루키의 소설들 중 <노르웨이의 숲> 같은 느낌이랄까?) 만약 매카시의 모든 작품들이 <로드>와 같은 느낌이었다면, 나는 <로드>를 끝으로 그의 소설을 더 찾아서 읽어보지는 않았을 것이다. 물론 <로드>가 선사하는 묘사와 분위기는 정말 압도적으로 좋았지만 아무래도 나는 서사적인 측면이 강조되는 소설들을 더 선호하는 편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소설을 다른 사람들에게 쉽사리 추천하기도 힘들 것 같다.) 하지만 매카시의 다른 소설들은 <로드>와는 또 다른 매력을 가지고 있다고 하니, 기대를 품고 또 한번 찾아서 읽어볼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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