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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의 숲에서 세상을 읽다
김상욱 지음 / 나라말 / 2007년 5월
평점 :
절판
<시 읽기 초보자의 따라 하기>
걸어서 항구에 도착했다
길게 부는 한지(寒地)의 바람
바다 앞의 집들을 흔들고
긴 눈 내릴 듯
낮게 낮게 비치는 불빛
지전(紙錢)에 그려진 반듯한 그림을
주머니에 구겨 넣고
반쯤 탄 담배를 그림자처럼 꺼버리고
조용한 마음으로
배 있는 데로 내려간다
정박중의 어두운 용골(龍骨)들이
모두 고개를 들고
항구의 안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어두운 하늘에는 수삼개(數三個)읜 눈송이
하늘의 새들이 따르고 있었다
<황동규, 『열하일기』, 지식산업사>
이 시는 어느 한 곳에 안주하지 못하고 방황하는 시적 화자의 모습을, 차가운 겨울날의 항구의 모습과 눈송이를 통해 차분하게 묘사해 낸 작품이다. 화자의 감정이나 사상은 배제되어 있으며, 처음부터 묘사로 일관하여 한 편의 그림 같은 인상을 준다.
김상욱 교수의 해석 (51쪽): 항구는 ‘기항지’라는 제목에서처럼 머무름의 이미지, 안식의 이미지다. 그러나 이 시에서는 정반대로 오히려 떠남을 뜻하고 있습니다. 이를 통하여 화자의 지친 일상, 그 일상과 결별하고자 하는 은밀한 기도가 여실히 전해져 옵니다. ‘길게 부는 한지의 바람’는 도란거리는 가족들의 웃음소리가 들릴 법한 집조차 이곳에서는 불안정하게 흔들리게 하고 있습니다. 밤하늘은 낮고 음울하게 매달려 있고, ‘긴 눈’은 항구를 더욱 황량하고 삭막하게 그리고 있습니다.
‘지전(紙錢)을 만지작거리다 구겨 버리는 것으로 현실의 질서로 벗어나려 하고, 욕망을 뜻하는 ’담배‘ 꺼버려 타성과 욕망을 버리고 비로소 ’조용한 마음‘이 되어 새로운 출발을 감해할 수 있데 되는 것입니다.
화자는 막배로 내려가서야 ‘모두 고개를 들고’, ‘항구의 안을’, 곧 누더기 같은 사람들의 생활을 ‘들여다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시적 화자는 관념적인 열망으로 벗어나 새로운 상황으로 자신을 던져 넣습니다. 용골들이 ‘모두’동경의 몸짓으로 그가 떠나고자 했던 세계를 향해 엿보고 있었던 것입니다. (인용부분)
이를 통해 시적화자는 자신을 그토록 지치게 만들고 상처 입게 만들었던 이 세상을, 이전과는 다르게 되돌아보고 있다. 즉 ‘항구 안을 들여다보고 있는 배’를 통하여 어둡고 암울한 현실을 버텨 이겨내는 견고함의 의미를 화자에게 떠올려 준다.
그로부터 비로소 화자의 암울한 의식은 하늘을 나는 새를 통해 정화되고 오랜 방황을 끝내게 된다.
이 책의 저자는 수련한 문장과 감성어린 글 솜씨로 우리를 시의 세계로 안내한다. 어느 부분에서는 그의 시 감상문이 더 시적(詩的)일 때도 있다. 이런 미문은 어렵게만 느껴지는 시로 우리를 바싹 다가서게 한다. 허나 너무 미적인 문장으로 인하여 나 같은 초보자는 의미를 놓칠 수 있다. 또한 모호한 표현으로 느껴질 때도 있었다.
사평역에서
막차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
대합실 밖에는 밤새 송이눈이 쌓이고
흰 보라 수수꽃 눈시린 유리창마다
톱밥난로가 지펴지고 있었다
그믐처럼 몇은 졸고
몇은 감기에 쿨럭이고
그리웠던 순간들을 생각하며 나는
한 줌의 톱밥을 불빛 속에 던져주었다
내면 깊숙이 할 말들은 가득해도
청색의 손바닥을 불빛 속에 적셔두고
모두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산다는 것이 때론 술에 취힌 듯
한 두릅의 굴비 한 광주리를 사과를
만지작거리며 귀향하는 기분으로
침묵해야 한다는 것을
모두들 알고 있었다
오래 앓은 기침소리와
쓴 약 같은 입술담배 연기 속에서
싸륵싸륵 눈꽃은 쌓이고
그래 지금은 모두들
눈꽃의 화음에 귀를 적신다
자정 넘으면
낯설음도 뼈아픔도 다 설원인데
단풍잎 같은 몇 잎의 차창을 달고
밤열차는 또 어디로 흘러가는지
그리웠던 순간들을 호명하며 나는
한줌의 눈물을 불빛 속에 던져주었다
<곽재구, 『사평역에서』, 민음사>
저자는 시에 대해서, 강풍에 홀랑 날러갈 것 같으면서도 여전히 안녕한 까치집을 예를 들면서 이렇게 말한다. “그저 우리가 끝없이 주절대는 말들일 따름인데, 그 말들이 모여 이렇게 견고한 한 세계를 구축하고 있다니, 실로 경이가 아닐 수 없다.”(65쪽)
“시란 녀석은 체구가 아주 쬐그마한 놈이다. 허우대 멀쑥한 놈들과는 애초에 거리가 멀다. 하지만 어떤 덩치 큰 녀석에 뒤지지 않는다. 시는 자신의 내부에 빼곡하게 한 세계를 품고 있다. 그 작은 몸피기 때문에 정교해질 수밖에 없고 따라서 옹골차고 실팍한 고갱이만으로 자신의 내부를 단장하여야 한다.”(83쪽)
곽재구의 <사평역>에 대한 저자의 감상은 이 내용이 전부다.
저자가 이 시에 대해, 까치집을 통해 시사하고 있는 바를 짐작해 본다.
곽재구의 이 시는, 어느 추운 겨울날 자정 무렵의 사평역의 풍경을 통해 삶의 애환을 그리고 있는 작품이다. 즉 ‘졸고, 쿨럭이고, 말이 없고, 낯설 하고, 뼈아픔을 느끼고’의 시어로 어렵고 힘겨운 서민의 삶을 나타내며, 또한 꺼질듯하면 던져 넣는 ‘톱밥’과 싸륵싸륵 쌓이는 ‘눈꽃’은 이들의 유일한 위로의 표현이다.
‘자정이 넘으면 낯설음도 뼈아픔도 다 설원’이 되듯이 현재의 고통과 상념들이 내일이면 모두 그리운 추억이 된다. 그래서 시적 화자는 공감하고 위로하는 징표로 눈물을 던져 주는 것이다.
보성댁의 여름
살 찔 틈 없이 살 마를 틈도 없이
닭장 밑에서 지샌 듯 새벽같이 일어나
솔가지 꺾어 밥 짓고 마당 쓸고
조반 차리기 전 빨래하고 텃밭 매고
아침은 먹는 둥 마는 둥 밭으로 나가
콩밭 깨밭 고추밭 미영밭 더터
골고지에 풀매기에 북주기에 물대기에
등짝이 죄 타도록 저 호러 미쳐나다가
엉덩이에 불 붙도록 짧아진 그림자 밟으며
풀 한 짐 이고 돌아와 점심 차리고
갓난애 젖 주고 큰애는 목욕시키고
오후엔 논으로 나가 농약 치고 피사리 하고
웃논 아랫논과 물쌈 하고 물꼬 막고
논두렁 풀 베고 한 벌 두 벌 거름 주고
산그늘 내리도록 저녁별 새하얗도록
이 손이 저 손인지 저 손이 이 손인지
아 그만 세월 모르게 헤매이다가
또 풀 한 짐 이고 돌아와 저녁밥 안치고
소밥 주고 쇠똥 치우고 돼지 닭 모이 주고
사랑방의 중풍 든 노인네 똥요강도 치우고
이윽고 오밤중 밥 먹고 샘가에 나앉으면
에라 오살헐 놈은 중동 떠난 남정네
여자 속 밴댕이 속이라 해도 좋으니
그래도 그리운 것은 이역만리 서방님네.
<고재종, 『나의 애송시』, 미래사>
“시 같은 순간이 있다. 어떠한 상상력의 윤색도 없이, 그저 드러내는 것만으로 시가 되는 참으로 시 같은 삶이 있다. 그 순간 보고 듣고 겪은 모든 일은 행이 되고, 연이 되고, 마침내 꽉 짜인 시간 되어, 깊은 밤 달이 뜨듯 둥드럿하게 우리네 앞에 떠 오른다.”(121쪽)
여성들의 고된 삶은 현재도 진행형이다. 간혹 TV 연속극을 자기 인생의 전범으로 삼으려는 듯 종일 TV앞에 배 깔고 자빠져 있는 여자들도 없는 건 아니다. 별 할 일 없이 외출을 밥 먹듯 하고, 집구석은 돼지우리 모양 만들어 놓는 여자들도 종종 있다. 요즈음은, 술에 취해서 비틀 거리며 대로가 좁게 느낄 정도로 나대는 여자를 자주 보게 된다. 술 먹고 주정하는 것도 남녀 평등하게 만들려는 의도인지 아쉬울 때가 있다.
그러나 대다수의 주부들은 안 그렇다. 특히나 산업 시대의 초입에 살았던 농촌 여성들의 삶은 지난하기만 했다. 위의 시는 읽는 것만으로도 숨 가쁘고 고단하다. 그러므로 이렇게 아플 시간도 없이 바쁘게 살아온 이 시기의 우리의 어머니들은 위대했다.
빈 집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
잘 있거라, 짧았던 밤들아
창밖을 떠돌던 겨울 안개들아
아무것도 모르던 촛불들아, 잘 있거라
공포를 기다리던 흰 종이들아
망설임을 대신하던 눈물들아
잘 있거라,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열망들아
장님처럼 나 이제 더듬거리며 문을 잠그네
가엾은 내 사랑 빈집에 갇혔네
<기형도, 『입 속의 검은 잎』, 문학지성사>
‘밤, 겨울 안개, 촛불, 흰 종이, 눈물’ 등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열망들을 빈 집에 가두어 버린다. 사랑을 잃어버린 고통과 절망이 너무나 컸기에, 그 때의 모든 열망들은 지금은 소용이 없게 되어 눈물로 작별하고 있다.
“이제는 가엾게 되어 버린 자신의 사랑을 마음속의 ‘빈 집’에 가두어 버린다. 다시는 나오지 못하게, 거리를 활보할 수 없도록, 사랑의 아름다움과 사랑의 고통과 함께.”(156쪽)
이 꼭지의 글을 쓰며 저자는 줄곧 김광석의 노래를 들었다고 한다. “이룰 수 없는 사랑에 대한 애절한 비가가 그의 노래임을 알았다. ”(156쪽)
정말로 그렇다. 김광석의 노래와 이 시와 비슷한 톤과 정서가 있었다. 노래 제목은 모르지만 이어폰을 타고 들려오는 노랫말을 무작 정 적어 본다.
잊어야 한다는 마음으로 내 텅 빈 방문을 닫은 채로
아직도 남아있는 너의 향기 내 텅 빈 방안에 가득한 데
이렇게 홀로 누워 천정을 보니 눈앞에 글썽이는 너의 모습
잊으려 돌아누운 누운 내 눈가에 말없이 흐르는 이슬방울들
지나간 시간은 추억 속에 묻히면 그만 인 것을
나는 왜 이렇게 긴긴 밤을 또 잊지 못해 울까
창틀에 기다리다 새벽이 오면 어제보다 커진 내 방안에
하얗게 밝아오는 유리창에 썼다 지운다. 널 사랑해.
밤하늘에 빛나는 수많은 별들 저마다 아름답지만
내 마음 속에 빛나는 별 하나 오직 너만 있을 뿐이야
창틀에 기다리다 새벽이 오면 어제보다 커진 내 방안에
하얗게 밝아오는 유리창에 썼다 지운다. 널 사랑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