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의 고전적 통속영화에 '내가 버린 여자'가 있었는데 그 제목을 따왔습니다.나는 아무리 훌륭한 인물도 결국은 108번뇌를 지닌 인간으로 살 수 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정약용도 마찬가지입니다.그가 아무리 훌륭한 저서를 많이 남기고 조선의 미래에 대해 염려를 많이 한 선각자라고 해도 밥은 먹어야 하고 잠은 자야 합니다.당연히 정욕의 문제로 고민도 했겠지요.
정약용은 무려 18년 간 강진에서 유배생활을 했습니다.하지만 이 유배생활에 대해 오해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마치 감옥과 비슷한 연금을 연상하는 이들이 있지만 그 정도로 가혹한 것은 아니었습니다.이동의 제한은 있었지만 어느 정도 자유가 허용되었습니다.정약용도 유배생활을 하면서 방대한 저서를 남겼듯이 독서와 집필에는 제약이 없었습니다.연구를 위해서 인근의 해남 윤씨의 장서를 빌려볼 수 있었고 첩을 두기도 했습니다.
정약용의 첩에 대해서 내가 처음 접한 이야기의 출처는 기억하지 못하겠습니다. 강진에서 정약용이 어떤 소녀와 관계하고 임신을 시켰는데 나중에 유배를 끝내고 우연히 강진에 다시 와보니 자기와 비슷하게 생긴 어린 소녀가 있어서 그 아이에게 물어봅니다."혹시 네 어머니가 이러이러한 사람이 아니냐?" 알고 보니 그 어린 소녀의 어머니가 바로 자신이 임신시킨 그 여인인데 그녀는 이미 젊어서 죽었다는 내용입니다.정약용은 그 사연을 듣고 마음이 아팠다고... 그런데 내가 나중에 다시 알게 된 이야기는 다릅니다.
우선 정약용이 강진에서 유배생활을 할 때 현지여자와 친하게 되어 그 여인이 정약용의 수발을 들어주고 사실상 첩이 되었다는 것입니다.요즘 같으면 현지처 비슷한 존재였던 것입니다.사실 유배생활 하면서 첩을 본 남자로는 단종의 이야기(함께 간 시녀들 중 총애를 받은 이가 있었다 함)를 알고 있었기 때문에 별로 특별한 생각도 들지 않았습니다.꽤 오랜 세월 정약용과 함께 산 그 여인과의 사이에선 딸도 생겼고 그 딸 이름이 홍임이었습니다.하지만 유배 생활을 끝내고 고향으로 돌아가면서 정약용은 이 모녀를 데려가지 않고 그 뒤로 돌보지도 않았다고 합니다.홍임이라는 딸의 존재는 정약용의 서한에 그녀의 이름이 등장하면서 사실로 밝혀졌습니다.하지만 왜 정약용이 이 모녀를 버렸는지에 대해서는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외국의 전기에는 역사적으로 유명한 위인이라 할지라도 그의 사생활의 어두운 면까지 다 파헤치는 내용이 들어있습니다.가까운 일본만 해도 마찬가지입니다.그래서 작가 중에는 전기작가, 평전작가들이 있어서 상당한 판매부수를 자랑합니다.과거의 인물 뿐 아니라 생존 인물의 전기도 잘 팔립니다.<역사란 무엇인가>라는 강의로 유명한 에드워드 할레트 카는 역사학자이면서 전기작가이기도 합니다.도스트예프스키를 비롯하여 바쿠닌,헤르첸 등의 전기를 집필했지요.하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전기작가라는 용어자체가 생소합니다.
우리나라에서 전기작가라는 직업이 생소한 것은 역사적인 인물을 보는 시각에도 원인이 있습니다.우리나라에서는 위인들의 어두운 면을 파헤치는 내용을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어린이용 전기는 물론이며 어른들이 읽는 전기도 국내 위인들은 오로지 위대하기만 합니다.만약 누군가 흠이라도 잡는 책을 쓰면 그 위인의 후손들이 당장 격하게 반발합니다.소송까지 가고 협박까지 받으니 이런 환경에서는 전기작가라는 직업자체가 성립될 수가 없지요.
정약용의 생애 중에서 가장 어두운 장면 중 하나가 가톨릭 신앙을 저버린 일입니다.역사학 연구자 사이에서는 이것은 이제 사실로 공인된 분위기입니다.하지만 가톨릭 신자 사이에서는 이 위대한 사상가를 독실한 가톨릭 신자로 두고 싶어하는 이들도 많습니다.그래서인지 가톨릭 문학상을 받은 한무숙 여사의 <만남>에서는 정약용이 끝까지 신앙을 지킨 것으로 나와 있습니다.
이제 우리도 위인들의 어두운 면을 발견하고 침착해졌으면 좋겠습니다.물론 늘 훌륭하기만 한 사람이라고 배운 사람이 저럴 수가! 하고 놀랄 수도 있겠지만 인간의 약점이야 누구나 다 지니고 있을 것이고 정약용이라고 해서 예외는 아닐 것입니다.오히려 이런 약점을 그대로 다 묘사할 수 있는 전기가 후손들의 항의나 소송사태 없이 판매되는 세상이 더 바람직하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그런데 사료가 워낙 적으니 정약용에게 버림받은 뒤로 홍임과 그 어머니가 어떻게 살았는지는 모르겠습니다.평생 정약용을 원망했을까요...그리고 첩을 거느리던 것이 양반으로서는 큰 흠도 아니었던 시대에 왜 정약용은 이들을 버렸을까요.전기작가 지망생들이 파헤쳐보고 싶은 소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