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지나가 쓴 시나리오로 만든 드라마 중 가장 많은 시청률을 기록한 <모래시계>는 케이블 방송 등장 이전,여러 신기록을 세웠습니다.'386세대(철저히 대학물 먹은 사람들 위주의 용어)'라는 용어가 등장하기 전에는 '모래시계 세대'라는 용어가 있었는데 <모래시계>가 광주항쟁을 연상케하는 면이 있어서 그런 용어가 나온 것입니다.하지만 <모래시계>는 광주항쟁을 다루었다는 화제 뒤에 좀 씁슬한 인상을 남겼던 것도 사실입니다.광주를 다루었으면서도 호남차별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호남에 대한 편견에 오히려 편승했기 때문입니다.악당 중의 악당 종도 역을 맡은 정성모가 진한 호남 사투리를 쓰는 설정이 바로 그것입니다.뭐 그런 거 가지고 그 난리를 떠느냐 할 사람도 있겠지만 그래도 광주항쟁을 다룬 작품에서 왜 악당 역은 호남 사투리를 쓰느냐 이겁니다.
또 한가지.여주인공을 맡은 고현정은 당시 자신의 고향(전남 화순)을 숨겼습니다.국민의 정부 이후 호남 출신 연예인들도 방송에서 자신의 고향을 거리낌없이 밝히지만 문민정부 때까지만 해도 호남출신은 타향에서 자기 고향을 숨기는 경우가 많았고 남자들의 경우는 타향여자와 결혼한 뒤 호적을 옮기는 이들도 있었습니다.저의 지인 중에 고현정과 동향이며 국민학교(아직 초등학교로 개명하기 전)를 잠깐 같이 다닌 남성이 있었는데 고현정의 고향이 서울이라고 적혀 있는 프로필 내용을 보고 서운해 한 적이 있습니다.
고현정이 한참 인기있던 1996년 경인데 서점에 그 지인과 함께 가서 새로 나온 잡지를 뒤적이고 있었습니다.역시 여성잡지를 보니 고현정 사진과 함께 소개기사가 큼직하게 나와 있었지요.그런데 고향이 서울이라고 기재되어 있는 겁니다.저는 그 지인을 불러서 "고현정이 자기 고향을 서울이라고 했소"하고 그 잡지를 보여 주었더니 그 사람 왈 "어...진짜네...분명히 나하고 학교도 다닌 뒤에 서울로 갔는데..."하고 말했습니다.고현정은 부모님도 모두 전남 출신인데 왜 그랬는지...
<모래시계>는 광주항쟁을 다루긴 했지만 결국은 좀 세련된 조폭드라마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했다고 봐도 되지요.그게 그 당시 인식의 한계라고 하면 할말은 없지만 광주를 다룬 작품이 악역은 호남사투리를 쓰고 게다가 호남 출신의 여주인공은 공개석상에서는 자기 고향을 숨기고...여하튼 좀 더 들여다 보면 씁쓸한 뒷이야기를 남긴 드라마입니다.은퇴와 이혼 등 다사다난한 일을 경험한 고현정은 2005년 연예계에 복귀한 후로는 다행히도 고향인 전남 화순에서 주는 명예군민증도 받는 등 고향을 굳이 숨기지 않았습니다.호남 사람들도 이제는 본적을 옮기거나 하는 일은 안 할 것입니다.
오락프로그램에 나와서 조폭 성대모사를 하는 연예인들은 호남 사투리를 쓰는 게 관행입니다.심지어는 호남의 20대 젊은 연예인들도 토크 쇼에 나와 고향 이야기를 하면서 건달이라든가 껌씹는 동네 형,언니 이야기를 하지요.호남 사투리를 일부러 강조하면서요.그게 얼마나 서러운 사연이 있는 호남 편견의 산물인지 잘 모르고,,,
의식 있는 사람들이 읽어야 한다?는 조정래<태백산맥>에도 호남 사투리가 질펀하게 나오지만 한가지 이상한 게 주인공인 김범우와 염상진은 표준말을 쓴다는 겁니다.이 사실은 많은 독자들이 그냥 넘어간 것 같은데 생각해 보면 이상합니다.왜 그런지 조정래에게 묻고 싶을 때도 있어요.<태백산맥>에서 마지막에 염상진이 동지들을 설득하면서'역사투쟁 운운...'하는 대목도 완성도를 떨어뜨리지만' 김범우와 염상진이 표준말을 쓰게 한 것 역시 이해하기 힘듭니다. 염상구는 진한 호남 사투리를 쓰는데...악역이 호남 사투리를 쓰는 것은<모래시계>와의 공통점이죠.
광주항쟁에서 도청을 사수하며 마지막까지 결사적으로 싸운 윤상원이 표준말을 썼을까...그의 묘지에 가서 물어보고 싶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