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닥다리 책에 지나치게 몰두한다는 말도 듣지만 원로들의 명저를 독파하면서 그들이 인용한 고전들을 하나 하나 찾아 읽어보려고 하는 편입니다.우리나라처럼 근대학문을 수용한지 얼마 안 된 나라에선 초창기 개척자 역할을 한 원로 학자들의 저작을 한 번 봐야한다는 의무감도 있구요.경제사라는 과목은 참 묘합니다.이게 경제학도 아니고 역사학도 아니고...두 학과 모두 그다지 내편이라고 해주진 않는 것 같습니다.하지만 매우 중요한 학문입니다.초창기 우리나라 경제사를 이끈 이들 중 조기준 (1917~2001)씨가 있습니다.특히 민족자본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여러가지를 생각하게 해준 학자이지요.저는 그의 민족자본에 대한 견해에 찬성하지 않습니다만 근대란 무엇인가를 설명하면서 우리나라의 경제사를 여러 각도에서 분석한 논문집 <한국자본주의 성립사론>은 저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습니다(이 책은 나중에 카터 에커트가 <제국의 후예>를 쓰는 데 자극을 주기도 했지요).그가 말년에 쓴 회고록에는 일제시대 일본 상지(조오치)대학에 유학갔을 때 읽은 독서목록이 있어서 재미있게 읽은 기억이 있습니다.간단히 여기 소개해 드리지요.
물론 일제시대 때 대학생은 지금의 대학생과 다르지요.조기준 씨 역시 "당시엔 대학생이라면 큰 이상을 품었지,당장 눈 앞의 취직에 신경쓰는 이들은 주변 친구들한테 좋은 소리를 못들었다"고 했습니다.그래서인지 동서의 고전들을 읽고 학과 공부도 해당 분야의 고전 및 명저들을 독파하라는 교수들의 권유를 들으면서, 어렵기는 하지만 두툼한 책들을 통해 소양을 쌓았다는군요.그는 독일에 가서 철학을 하려고 상지대학을 갔습니다(당시 그 대학의 학생모집 광고엔 졸업 후 독일유학의 길이 있음이라고 써 있었답니다).예과 시절은 독일어 공부에 몰두했는데 독어는 일주일에 12시간,두사람의 일본인 교수와 세사람의 독일인 교수가 있었는데 독일인 교수들은 학생들이 알아듣던 말던 무조건 독일어로만 강의를 했답니다.일인 교수들은 문법과 해석 담당이었는데 그 중 한 교수는 유명한 독일인의 명문 몇구절을 갖고 와서 다음 시간까지 무조건 외워오라는 숙제를 내줬고 그 덕에 조기준 씨는 그때 외웠던 파우스트,독일 국민에게 고함 등의 구절들을 평생 기억했다고 합니다.
학부는 철학이 아닌 경제학과를 선택,사회의 본질을 파악하기 위해서였다네요.당시 상지대학엔 마르크스 경제학,근대 경제학 모두 쟁쟁한 교수들이 있었다고 합니다.도다 교수는 경제원론을 담당하면서 마르크스 경제학을 소개했는데 마르크스의 <경제학 비판><자본론>을 추천했고,기무라 교수는 근대 경제이론을 소개하면서 멩거<국민 경제학원리>제본스<경제학 원리>왈라스<순수경제학요론>을 추천했습니다.크라우스 교수는 베버의 <프로테스탄트의 윤리와 자본주의의 정신>을 반박한 논문으로 유럽에서도 명성이 있던 학자로, 화폐론을 강의....이런 교수들의 지도를 받으면서 케네<경제표>아담 스미스<국부론>리카도<경제학과 과세의 원리>는 물론,마르크스의 주요저작을 비롯,마샬,멩거,왈라스의 고전적 저작들을 탐독했는데,이런 저작들은 당시 경제학을 전공하는 학생들은 적어도 한번은 읽어보는 것이 의무요,상식으로 되어 있었고,그 기초공부 위에서 어떤 학파를 선택하여 더 깊이 연구하느냐 하는 것은 학생자신이 결정할 일이었다고 합니다.특히 고전파 경제학자들의 저작은 통독해야 했다고...
2,3학년에 이르러서 조기준 씨는 경제사에 관심을 기울였습니다.그 당시 독서목록---좀바르트<현대 자본주의> 베버<사회경제사><프로테스탄트의 윤리와 자본주의의 정신>쿠리셔<일반 경제사> 모르간<고대사회>엥겔스<가족,사유재산,국가의 기원>....베버의 저작은 문장도 어렵고 내용도 어려워서 이해하기 힘들었다네요.1930년대 일본에는 마르크스 경제학이 학생들의 관심을 모아서 조기준 씨도 카우츠키,힐퍼딩,룩셈부르크의 저작들을 탐독했답니다.1942년에 대학을 졸업하고 만주국에서 일하는 중 해방을 맞았는데 자세한 이야기는 그의 회고록이 있는 1997년 신동아 3월호 4월호를 참고하시길...
역시 초창기 경제학 원로인 신태환 씨의 회고록을 봐도 당시 대학생들이 무슨 교육을 받았는지 나와 있는데 입이 떡 벌어질 정도의 어마어마한 공부를 시키더구만요.이런 원로들의 학창시절 공부편력기를 보면 비록 일제시기이지만 민족을 초월해서 사제지간의 정을 느끼게 해준 일본인들이 등장하여 가슴이 찡할 때도 있습니다.그리고 노학자들이 읽은 책의 목록을 경제사상사나 경제학사에서 하나 하나 찾아보는 재미도 있지요.아니...이런 책을 직접 읽었단 말인가...하면서요.알라딘의 동무들도 조기준 씨의 이 독서목록을 보고 분발해서 공부합시다.그래도 70년 전 일본의 수준은 넘어야하지 않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