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신들이 섬에 내려오시니 - 코스믹 호러 × 제주설화 앤솔로지
전건우 외 지음 / 들녘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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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이 책을 읽을까 말까 고민을 많이 했다. '공포'라는 단어가 주는 공포감 때문이랄까. 하지만 그 단어 때문에 읽지 말자니 '제주설화'를 모티브로 했다는 점에서 호기심이 발동했다. 읽을까 말까 고민될 때에는 일단 읽는 걸로 한다. 고민된다는 것 자체가 궁금하다는 것이니 말이다. 읽고 싶지 않을 때에는 그냥 단칼에 '아니다' 생각하게 마련이니, 결국 그냥 읽는 걸로 결정했다. 그리고 읽어보니 이거 정말 새로운 느낌이다. 안 읽었으면 후회할 뻔했다. 읽기를 잘 했다. 지금껏 제주설화를 전래동화처럼 오래된 이야기로만 전해 들었다면, 이건 그렇게만 생각되던 이야기들이 과거가 아닌 현재에서 살아 숨 쉬는 듯했다.

이 책 『오래된 신들이 섬에 내려오시니』를 읽으며 제주 설화를 소설 속에 녹여낸 이야기에 집중해 본다.




이 책은 전건우, 전혜진, 정명섭, 황모과, 김선민, 사마란 공동 저서이다. 이들은 괴이학회 회원인데, 괴이학회는 괴담, 호러 전문 출판 레이블로서 괴담과 호러 콘텐츠의 부흥과 발전을 위해 만들어진 창작그룹이다. 전설과 신화, 민담을 포함한 괴담을 바탕으로 기괴하면서도 흥미로운 이야기를 만든다. 현재 50여 명의 창작자들과 함께 커뮤니티를 만들어 다양한 창작 및 제작, 출판 활동을 진행하고 있다. (책날개 발췌)

먼저 '괴이학회'라는 모임이 신선하게 다가왔다. 앞으로 무궁무진하게 창작활동을 이어나가리라 생각되는데, 나는 아마 이들의 이야기를 한쪽 눈만 실눈 뜨고 바들바들 떨면서도 읽어나갈 듯하다. 전설과 신화, 민담이 사실 무서운 이야기가 많으면서도 따로따로 생각되는 장르였는데, 이렇게 다양한 모습으로 소설 속 이야기에 녹여서 활발하게 창작되는 모습이 정말 좋다.



이 책에는 전건우 「광기의 정원」, 전혜진 「단지」, 정명섭 「수산진의 비밀」, 황모과 「딱 한 번의 삶」, 김선민 「뱀무덤」, 사마란 「영등」 등 총 여섯 편의 소설이 수록되어 있다.

이 여섯 편의 소설은 '장르소설 대가들이 그리는 6편의 우주적 공포!'라는 설명에 부합한다. 첫 이야기부터 뇌리를 강타하는 공포감을 선사한다. 가장 먼저 읽고 가장 충격을 받았던 전건우의 「광기의 정원」 이야기를 구체적으로 해보아야겠다. 이 소설을 읽는 분들에게 스포일러가 되지 않기 위해 충격받은 장면은 구체적으로 언급하지 않겠지만, 나는 '내 다리 내놔~'보다 이런 식의 이야기가 더 충격적이었다. 정말 우주적 공포다.

1.전화

새벽에 걸려오는 전화는 받지 마.

어머니는 늘 그런 말씀을 하셨다. 그것도 치매에 걸린 이후로 줄곧. 한 번은 왜 그렇게 말씀하시느냐고 물었더니 새벽 전화는 귀신이 건다는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하셨다. 귀신이 꼬드겨서 데려가려는 거야. 그러니 받지 마! (9쪽)

전건우의 「광기의 정원」은 이렇게 시작된다. 워밍업이나 주위 환기 등의 불 지피는 시간 없이 바로 훅 치고 들어온다. 한평생 교회를 다니셨던 분이 귀신 운운하다니 무슨 일일까. 여기에서부터 무슨 일이 일어날지 벌써부터 궁금해진다.

"서천꽃밭으로 가는 길을 발견했네."

동료 교수 김동호가 5년 만에 최진만에게 전화해서 한 말이었다.

소설은 있을 법한 현실을 보여주는 도구인데, 이 말에서도 나는 정말 참신함을 느꼈다. 그동안 제주설화를 접하며 서천꽃밭에 대한 이야기를 전설처럼 듣기만 했을 뿐인데, 소설가는 제주 설화에 나오는 가상의 세계를 실제 장소로 끌어오다니, 정말 상상력이 대단하지 않은가!

서천꽃밭.

그곳은 제주도 설화에 내려오는 가상의 세계였다. 이승과 저승의 경계에 펼쳐진 광대무변한 정원. 그곳에는 죽은 사람을 살리는 꽃, 폭탄처럼 폭발해 적을 섬멸하는 꽃 등 그야말로 전설 속에나 등장할 만한 꽃들이 지천으로 피어 있다. 무척 흥미로운 장소고 재미있는 이야기지만 그렇기에 실존할 수 없는 장소, 그것이 바로 서천꽃밭이었다.

"선뜻 믿지 못하는 것도 이해하네. 그렇다면 그저 여행삼아 오는 건 어떤가? 오랜만에 회포도 풀 겸 말이야. 내 이야기를 들어본 후에 아니다 싶으면 바로 돌아가는 걸세." (15쪽)

아, 나 같아도 그 말에 흔들릴 만하겠다. 최진만 역시 그 제안에 따라 바로 다음 날 제주도로 향했다. 그 이후에 제주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는 휘몰아치듯이 격동적으로 다가와서 나를 뒤흔들었다.

'어어어~?!'하면서 읽어나갔다. 순식간이다.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말이 되는 듯도 해서 눈을 뗄 수 없었다. 후기에 보면 이런 말이 있다.

코스믹 호러의 매력, 즉 코스믹 호러라는 이 생경한 장르가 독자에게 공포를 선사하는 방식은 '감당할 수 없는 것'을 기꺼이 보여주는 데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감당할 수 없는 것이란 단순히 상대가 크고, 무섭고, 혹은 해결해야 할 게 많은 조금 골치 아픈 일을 뜻하지는 않습니다. 그야말로 인간이라는 미약한 존재로는 감히 범접할 수도 없는 거대한 괴물이나 신의 출현, 자연재해 등이 이 범주에 들어갑니다. (90쪽)

이번에 코스믹 호러의 매력을 제대로 느껴본다.



이 책 속에는 특이한 이야기가 많았다. 우리나라가 아닌 새로운 나라에 다녀온 듯하다. 신들의 나라 특집이라고 할까. 제주 신화를 코스믹 호러로 재해석하니 매력적인 소설이 탄생했다. 제주는 가는 곳마다 이야기가 많은 곳이다. 마을마다 신도 다르고 이야기도 계속 이어지고 있다. 그런 이야기를 소재로 하여 증폭시켜서 코스믹 호러로 탄생시키니 이 또한 매력적으로 다가온다. 신선한 충격이다. 전설의 고향, 무서운 이야기를 듣는 듯한 느낌으로 읽어나갔다.



무서워서 못 읽을 공포가 아니라, 현실에서 정말 있을 법해서 공포스러운 이야기다. 책 속에만 있었던, 그래서 당연히 현실이 아니라 신화 속 이야기라고만 생각했던 일들이 모티브가 되어 눈앞에 펼쳐지는 공포로 탄생했다.



아마 '제주설화 자료집'만 보았다면 그냥 설화를 학술적으로 읽어보는 듯한 느낌이 전부일 것이다. 하지만 거기에 숨결을 불어넣고 구체적인 사람들이 살아 움직이니 이렇게 소설로 탄생한 것이다. 이 매력적인 여섯 편의 소설들이 한동안 나에게 잔상처럼 남아있다가 문득 불쑥 어느 순간에 강렬하게 떠오를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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