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 이제 금융이라는 것이 이해가 되나요? 다시 요약해 보겠습니다. 금융은 내가 당장 돈 쓰고 싶은 것을 참고, 지금 미치도록 돈이 필요한 사람에게 일정 기간 동안 빌려 주는 행위입니다.
그 돈이 미치도록 필요한 사람은 감사한 마음에 이자를 냅니다. 그리고 이자는 빌려 주는 기간이 길면 길수록 많아집니다. 나는 돈 쓰고 싶은 욕심을 참은 대가로 돈을 법니다. 돈이 꼭 필요한 사람니다. 돈이 꼭 필요한 사람에게 잘 흘러가도록 만드 것 그리고 이것을 통해 돈을 버는 것이 바로 금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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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문학,과학, 수학 과목은 폐지되었고, 철학(공산주의)과 체육, 농업 위주로 교과과정이 재편되었다. 이 기형적인 교과과정은 몇 년 동안지속되어 전대미문의 학력 단절이라는 세태를 낳았다.
홍위병은 사람을 홍오류와 흑오류로 나누었다. 노동자, 빈농 등의 다섯 가지 출신 계급인 홍오류는 혁명 동지였고, 흑오류는 지주와 부자 등 유산계급이었다. 동네마다 흑오류에 속한 사람들은 홍위병에게 구타와 고문, 모욕을 당했다. 화가와 음악가,
대학교수, 문학가, 과학자 등 문화·예술인과 지식인에게도 홍위병은 일말의 동정심이 없었다. 그들은 문화대혁명을 단행해야만 했던 직접적인 원인 제공자이기 때문이었다. 홍위병들은이들 지식인을 집회장으로 끌고 나와 ‘반혁명 분자‘로 매도하며그들의 머리를 깎거나 불에 달군 인두로 지졌다. 문화 · 예술인과 지식인 들은 "나는 인민 노동자들의 피와 땀을 빨아먹었습니다!"라고 크게 외쳐야 했다. 어린 학생들에게 모욕을 당한 정신적인 충격에 빠져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이들이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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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향녀에 대한 사대부들의 태도는 평민들에게도 큰 영향을주었다. 그들은 임금의 지시 없이도 이혼할 수 있었으므로 환속한 아내와 며느리를 헌신짝처럼 버렸다. 그리고 그녀들에게 ‘환향녀‘라는 사회적 낙인을 찍었다. 이는 본디 ‘고향에 돌아온 여자‘라는 의미였으나, 오랑캐와 잠자리를 한 더러운 여자라는 악의적인 뜻으로 인구에 회자되었다. 정절을 잃지 않은 여자들도환향녀의 굴레는 벗어날 수 없었다. 손가락질은 집안에서 시작돼 동네 전체로 번졌다. 환향녀의 이빨에 빨간 칠, 까만 칠을 해서 사람들과 마주할 수 없도록 한 마을도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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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은 초기부터 외국과의 무역을 차단했다. 중국이나 일본과의 외교관계는 유지했지만 사신단을 통한 극도의 제한된 통상만 이루어졌다. 국 내 상공업의 미비와 국제무역의 부재는 더욱더 상품의 부재 혹은 편재 현상을 가져왔다. 생산품이 유통되지 않으므로 도로와 교통, 수송수단이 미비했고, 고대부터 이용해오던 수레도 사용이 제한되거나 수레바퀴 등의 제작기술이 발달하지 못해 물자의 이동이 어려웠다. 그러니 당연히 운송비가 비쌀 수밖에 없었다. 백성이 거주하는 집에도 제대로 된 가구 가 하나 없거나 작은 가구 정도만 두고 살았던 이유도 큰 가구를 제작하기 위한 나무 등의 원자재나 부피가 큰 완성품의 이동이 쉽지 않았기 때 문이다.

박지원은 국제정세를 제대로 파악하려면 조선의 첩자를 청에 상주시키면서 정보를 수집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사대부의 자제가 북경에 가서청의 과거를 통과하여 관리로 지내면서 중앙정부의 동향을 파악하고 조선 상인은 중국 각지를 다니면서 명의 회복을 기도하는 강남의 한족과연계하는 방안도 구상했다. 박지원은 청의 우수한 제도를 도입하여 부지강병을 이루고, 다양한 정보망을 통해 국제정세의 변화를 면밀히 살한다고 주장했다.
조선의 지식인들은 급박한 국제정세 속에서 자신들이 해야 할를 명확히 자각하고 현실에서 나타나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우리는 이를 조선 후기의 개혁사상인 북학론이라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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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리오는 서양 학문을 접하면서 실학에 눈을 돌리게 된 것이다. 1901년「연암집 』(김택영 편)을 시작으로 『흠흠신서 』와 『목민심서」가 각각 장지연張志淵에 의해 광문사에서 간행되었다. 박지원의 열하일기도 1911년 조선광문회에서 간행되었다. "실로 우리 대한제국의 정치학 가운데 제일 신서가 『목민심서』다" 라는 『황성신문(10902년 5월 19일)의 찬사도 이어졌다. 당대의 과제 해결책으로 다산 정약용이, 서양 근대 학문과의 만남 속에서 연암 박지원의 위대성이 부각된 것이다. 당시 실학은 현실 타개책으로 주목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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