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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예슬 선언 - 오늘 나는 대학을 그만둔다, 아니 거부한다
김예슬 지음 / 느린걸음 / 201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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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나는 대학을 그만둔다, 아니 거부한다’를 읽고)  

 


에피소드

  얼마 전 내게 맡겨진 우리 학급 아이들에게 나답지 않게 긴 시간동안 잔소리를 했다. 학급 소품인 모래시계를 깼기 때문이다. 시험 문제 출제 중이었기에 교사 책상 앞으로 지나다니지 말라고 한지 2시간도 지나지 않아 지나가다가 깬 것이다. 그 하나를 빌미로 왜 생각 없이 사냐고 했다. 질문하는 삶을 살라고 했다. 피리부는 사나이를 따라갔던 쥐떼나 아이들처럼 살지 말라고 했다. 그러면서도 이해가 되지 않았던 것이 왜 아이들은 생각을 하지 않을까? 듣지를 않을까? 하는 것이었다.




실마리

  그 이유를 이 책을 보며 조금은 알 것 같았다. 트랙을 달리고 있는 것이다. 그것도 일부만이 승리 또는 성공의 감격과 기쁨을 누리는 끝없는 도는 트랙이다. 학습된 두려움이다. 다른 낱말로 비슷한 말을 한 사람이 있다. 사토 마나부 교수도 ‘배움으로부터 도주하는 아이들’이라는 책에서 ‘허무주의’와 ‘냉소주의’가 아이들에게 팽배해있다고 한다. 아이들은 안다는 것이다. 무한 경쟁에서 성공하는 사람은 얼마되지 않기에 많은 아이들은 배움으로부터 도주한다는 것이다. 조기숙 교수도 ‘왜 우리 아이들은 대학에만 가면 바보가 될까?’에서 ‘죄수의 딜레마’ 이론을 소개하며 불안한 심리 때문이라고 하고 있다. 김예슬씨의 말로 하자면 혼자만의 두려움이나 공포가 아닌 집단적 공포이기도 하다.

  종합하면, 살아남기 위해서는 질문할 여유조차 없는 것이다. 그냥 따라가는 것이다. 그것도 숨이 차고 지치는 것이다. 생각하고 질문하면 두려움과 불안에 사로잡히게 되니까 회피하게 되는 것이다. 질문하기도 인간다운 삶도 포기하는 것이다.

  자기주도적 학습을 강조하는 시대이지만 더 학원 의존적이 되고, 부모 의존적이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을 것이다. ‘초대딩’과 연애하는 방법까지 강의하는 학원이 등장하는 이유일 것이다. 그러니 인생에 대해서 삶에 대해서 질문하거나 꿈을 꾸는 것은 사치일 것이다.




분노와 눈물

  질문할 수 있는 사람만이 잘못되어 가는 것들에 대해서 분노할 수 있다. 김예슬씨는 사람다운 삶, 꿈을 꿀 수 없는 삶에 대해 분노하고 있고,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자기 자신에 대해서 주위에 있는 사람들, 세계에 있는 약자들을 힘들게 만들고 현실을 왜곡하며 팍팍한 삶을 살게 만드는 구조악에 대해 분노하고 그 아래 고통하는 사람들을 위해 눈물을 흘릴 줄 아는 사람이다.

  무심히 지나치는 것들, 보다 근본적이고 근원적인 문제들에 대해서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는 살아있는 사람이다. 살아있기에 분노하고 눈물을 흘릴 수 있다. 시체는 질문도 분노도 눈물도 없다.

  한 만남이 자신의 심장을 찔렀다고 한다. 유명하지도 않은 한 시인의 강의에서 몇 마디의 말 “그대는 진리를 알려고 하는가, 진리를 살려고 하는가. 그대는 길를 찾으려고 하는가, 길을 걸으려고 하는가. 그대는 사랑을 배우려고 하는가, 사랑을 하려고 하는가.”라는 말이었다고 한다. 삶으로 산다는 것은 살아있어야 가능하다.




몸부림

  살아있는 사람만이 끌려가지 않으려고 몸부림을 친다. 김예슬씨의 경우 대학을 거부하는 몸부림으로 나타난 것이다. 살아있는 사람답게, 동물과 다른 생각하는 사람처럼 살려는 몸부림을 치는 것이다. 자격증과 학벌에 묶인 경쟁사회의 거센 물결에 저항하는 몸부림을 치는 것이다. 글로벌 카스트 계급을 깨뜨리고 거슬러서 올라가려는 것이다. 트랙을 도는 오염된 꿈이나 주어진 꿈이 아닌 초원을 내달리는 야생마의 꿈을 꿀 수 있는 것이다.

  또 혼자 꿈꾸기에는 너무 힘들기에 공동체적으로 몸부림을 치자고, 몸부림을 치는 꿈을 꾸자고 한다. 사람마다 자기 나름의 재능이나 관심사를 가지고 장인성과 인간됨으로 존경받으며 살아갈 수 있는 자급자립 기반의 공동체를 만들어서 서로 돕고 나누자고 한다. 현재의 자격증 또는 학벌 구조나 제도로는 자신이 자격증을 따고 도달한 위치에 오르기까지의 본전 생각 때문에 인간답게 살 수 없다고 한다.




매몰

  많은 고민과 본질을 꿰뚫는 멋진 질문과 고민에 가득한 책이고 책의 디자인도 책의 내용처럼 심플하고 단순하며 투박하여 인간적인 냄새가 나지만, 학교와 자격증이 존재하기에 사교육비를 줄이는 것이 모순이라고 말하는 부분은 동의할 수 없다. 인간의 욕망이라는 부분을 간과한 것 같다. 서구나 북유럽의 살기 좋다고 하는 국가들이 학교가 없어서 그런 교육이나 삶이 가능한 것이 아니지 않은가? 그들은 학교가 있어도 자격증이나 학벌에 목매달지 않는다. 요즈음 가장 많이 인용되는 핀란드가 대표적이다. 경쟁이 아닌 상생과 협력의 학교 문화가 있다. 그래서 피사의 학력 테스트에서 우리 나라의 경우 지적인 부분은 상위권이지만 정서적인 부분에서는 하위권이다. 핀란드는 우리 나라와 달리 심리적인 부분에서도 훌륭하다는 평가를 받았다는 것을 김예슬씨가 모르지는 않을 것 같은데...... 너무 우리 나라의 현실과 맥락에 매몰되어 잘못 판단한 것 같다.

  자격증이나 학교가 없다고 해도 다른 것을 통해서 사람은 자신의 욕망을 해결할 것이다. 높아지고 굴림하고 자랑하려고 할 것이다. 인간의 본질이 변하지 않는 한 외적인 것이 사라진다고 이 고통이 해결되지는 않을 것이라고 본다.




나의 질문

  그렇다면 나는 어떠한 질문을 하며 지금의 위치(교사)에 있는 것일까? 정말 아이들의 아픔을 감싸주며 함께 분노하고 눈물 흘리며 초원을 달리는 꿈을 꾸게 해주고 싶은 꿈이 있었다. 그런데, 한 해 두해 경력이 쌓이며 이런 열정이 식고 꿈이 사그라지는 것을 본다.

  배움이란 무엇인가? 교사란 어떤 존재인가? 교육이란 무엇인가? 아이들은 어떤 존재인가? 등등, 끊임없이 질문하며 나아가던 삶에서 전면적인 교원평가가 시작되고 일제고사가 확대되어 더 경쟁체제가 되어 가는 교육의 현실에서 질문을 잃어가고 몸부림을 치지 않고 서서히 매몰되어가는 나의 모습이 비추어졌다. 나는 질문이 줄어가면서 학습된 불안과 공포, 허무주의, 냉소주의에 집단으로 빠져들어가는 아이들을 이해하고 감싸기보다 질문하지 않는다고 화만 내고 있었고, 나의 자격증과 학벌을 자랑하는 잘난 체를 하고 있었다. 삶으로 진리를 살지 못하고 있었다. 길을 걷지 않고 있었다. 사랑하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먼저 다시 묻기부터 시작해야겠다. 그래서 이런 현실에 분노하고 힘이 없기에 울기부터 해야겠다. 나도 돌멩이(조기숙 교수의 말을 빌리자면 ‘목소리 높이기’이다)를 던지는 몸부림에 동참하고 더 많은 사람들과 함께 거대한 골리앗을 향해 살아있음을 알리고 저항하는 것을 다시 시작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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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아이 1 - 아동교육 심리학의 영원한 고전 한 아이 1
토리 헤이든 지음, 이희재 옮김 / 아름드리미디어 / 200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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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혜란? 지혜로운 사람이란?

  지혜롭다는 것은 무엇일까? 어떤 사람을 지혜로운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까? 꾀나 재치, 융통성, 경험이 많은 것을 지혜롭다고 할 수 있는 것인가? 지식이나 경험을 현실에 삶에 알맞게 적용하거나 응용하는 사람을 지혜로운 사람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아닐까? 20대 후반까지 나름대로 생각하며 정의하던 지혜와 지혜로운 사람에 대한 정의였다.

  그러나, 이 지혜나 지혜로운 사람에 대한 정의는 성경에서 말하는 지혜와 ‘토리L.헤이든’이라는 특수교사의 체험사례집 ‘한 아이’(샘터 간)를 최근에 새롭게 곱씹게 되면서 너무나 협소한 개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성경(특히 구약)의 원어인 히브리어로 ‘지혜’는 ‘들을 수 있는 마음’을 뜻한다고 한다. 그러면 ‘듣는다’는 것은 무엇일까? 들을 수 있는 ‘마음’은 어떤 것일까? 하며 목말라 할 때 한 줄기 빛처럼 ‘한 아이’가 떠오르며 정말 이것이 ‘듣는 것’이며, 들을 수 있는 ‘마음’이라는 깨달음이 일어났다.




다양한 말하기

  쉴라는 마음이 아프기에 그 고통을 견디거나 상처가 낫고 싶어서 다양하게 표현하는 아이였다. 언어로는 표현하지 않아도 증오에 가득찬 눈이나 절대로 울지 않는 것, 헝클어진 머리, 악취를 풍기는 것 등으로 말하였고, 여섯 살 때는 세 살짜리 남자 아이를 유괴한 다음 근처 숲속 나무에 묶어 놓고 불을 지르는 행동으로 외쳤다. 이런 아이였기에 어떤 아이도 선생님도 감당할 수 없었다.

  쉴라를 가르치게 된 토리 선생님도 마찬가지였다. 신문에 난 기사로 쉴라를 처음 알게 되었고, 자기에게 맡겨진 특수학급(쉴라 말로 미친반)에 아이가 하찮은 돌멩이처럼 맡고자 하는 선생님이 없어서 떠밀려 오게 되었을 때 부담스러워 하였다. 아이도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른 다음 겨우 한 말이 ‘선생님은 나에게 말하게 할 수 없어요. 하게 할 수 없어요’를 반복해서 말하는 것 외에는 언어로 된 말을 하지 않았다.




듣는다는 것

  이렇게 힘들게 아이와 씨름하던 토리 선생님은 ‘피보디 그림 및 어휘검사(PPVT)'를 할 때에 쉴라가 잘 맞추는 것을 보면서, 오래된 오줌 냄새를 풍기는 쉴라를 자신의 무릎에 끌어다 앉히고 껴안아 주면서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쓸어넘겨 주거나, 머리핀을 사주고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빗겨주기, 쉴라를 개수대에 데려가 씻겨주는 일 등을 하면서 아이의 몸으로 하는 호소를 들었다. 쉴라의 말을 듣는 것이 고통스러웠기에 토리 선생님 또한 말 없이 몸을 움직이거나 쉴라와의 신체접촉을 통하여 들을 때도 있었다고 회상하고 있다.

  점점 개선되어 가던 토리 선생님과 쉴라와의 관계는 토리 선생님의 고정관념에 따라 시험지 풀기를 강제로 하게 하는 것과 같은 건성으로 이루어지는 들음이 있을 때에나 잠시 토리 선생님이 회의 겸 휴가를 다녀와서 쉴라를 제대로 들어주는 사람이 이루어지지 못했을 때는 위기를 맞이하기도 하였다. 쉴라가 이웃에 사는 아저씨에게 성적 학대를 당했을 때도 잠시 솔직하고 자발적으로 생각과 느낌을 이야기 하지 못하는 경우가 생겨서 토리 선생님의 깊이 있는 듣기가 곤란을 겪은 적도 있었다. 

  쉴라의 말하기 뿐만 아니라 듣기가 정확하기 않았던 까닭도 어머니에게 길가에 버려지는 고통이 있었고, 알콜 중독자인 아버지에게 학대를 받았지만, 아버지가 자신을 버리지 않았다는 것 때문에 아버지나 이웃 아저씨의 잘못된 말하기에 쉴라가 바르지 않게 알아 들었던 것이었다.




인내 그리고 길들여짐

  쉴라가 하고 싶었던 말은 사랑받고 싶다는 것이었고 버려지는 상처를 받고 싶지 않아서 난폭한 행동이나 울지 않는 것을 통해서 말을 한 것이었다. 그러나, 토리 선생님이 자신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사랑하고 어린 왕자를 읽고 토리 선생님과 이야기하며 서로 길들여진 존재 즉, 토리 선생님에게 ‘특별한 존재’라는 것을 토리 선생님의 진실한 듣기를 통해 알게 되자 쉴라의 마음이 더욱 더 치유가 이루어져 가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이것이 단기간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다. 쉴라의 경우도 한 학기의 시간이 필요했다.

  

나의 듣기와 말하기 능력은?

  내가 본 수능시험에서 에서 국어듣기와 영어듣기 점수를 생각해보면 꽤 높은 점수라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다. 사람들과 이야기하면서도 내성적인 성격 탓에 말하는 양보다는 듣는 양이 훨씬 많다. 그래서, ‘창가의 토토’라는 책을 보았을 때의 토토의 다양한 말을 들어주지 않았던 공립학교 담임선생님을 이해할 수 없었고, 난 교사가 되면 저러지 않을 것이라고 다짐하기도 했다. 오히려 4시간이나 말없이 토토의 이야기를 들어주었던 대안 학교의 교장 선생님처럼 할 수 있다고 자신하기도 하였다(결국은 교장 선생님이 지혜로운 교사요, 교장 선생님의 듣기를 통해서 토토의 잠재능력이 계발되고 토토가 변화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런데, 더 차이가 큰 평가 혹은 비교대상이 나타난 것이다.‘한 아이’의 토리 선생님은 더 인간적이고 현실적이며 듣기에 실패도 하지만 ‘토토’의 교장 선생님보다 듣기에 고수(더 지혜로운 교사)라는 생각이 든다. 토토보다 더 많이 몸으로 말하는 쉴라를 몸으로도 들어주었기 때문에 그런 생각이 든다.

  현재 공립학교 교사인 나의 모습을 보면 듣기 점수가 형편이 없다는 것을 점점 보게 된다. 수업시간이라는 핑계로, 쉬는 시간이나 점심시간은 다른 일처리 한다는 이유로 30여 가지의 다양한 상황과 아픔,이야기들을 가지고 있는 아이들이 몸으로 말로 하는 이야기에 시선-마음-을 향하지 않는다. 따라서, 서로에게 길들여진 존재(특별한 존재)가 아이기에 교사인 나의 말도 아이들이 들어주지 않을 경우가 많다. 또 아이들이 말이 채 다 끝나지도 않았는데 그 아이의 말을 판단하거나 한편의 아이의 말만 듣고 이렇게 저렇게 판결을 내려버리는 경우도 많아서 사실이 밝혀진 후에 미안하다고 사과한 경우도 있다.




나는 지혜로운가? 지혜로운 사람인가?

  이렇게 진단결과가 지혜로운 사람은커녕 어리석은 교사라고 나온다. 어리석은 교사는 잘못된 듣기를 하는 것이기에 아이들의 상처를 치료하기보다 쉴라의 아버지나 이웃 아저씨, 처음에 쉴라를 맡았던 다른 선생님들처럼 상처를 더욱 깊게 한다. 오히려 학대를 하는 것이기에 두려운 마음이 든다. 

  ‘눈은 마음의 창’이라는 말도 있다. 먼저 눈을 내게 맡겨진 아이들에게 향하고 눈높이을 맞추며 몸을 아이에게 기울여 주는 것이 크기는 작지만 들을 수 있는 ‘마음’이라는 생각이 든다. 아마 한 번에 안 될 것이다. 영어듣기도 몇 개월을 들어야 귀가 뚫려 영어가 들리는 것처럼 아이들의 말을 끝까지 들으려고 의식적으로 끊임없이 반복 훈련해야 할 것 같다. 이렇게 하다보면 들을 수 있는 마음의 크기도 점점 커질 것 같다.

  단지 아이들을 쉴라처럼 상처를 치료하고 성장 혹은 성숙시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내 자신이 지혜로운 사람이 되고 싶고, 특별한 존재가 되고 싶기 때문이다. 들을 수 있는 마음이 더욱 자랄 수 있기를 희망하기 때문이다.

  한 아이 2권도 출간되었다고 한다. 토리 선생님과 쉴라가 헤어진 7년 후 청소년이 된 쉴라를 다시 만난 후에 이야기라고 한다. 토리 선생님이나 쉴라의 들을 수 있는 마음은 얼마나 커져 있을까?  

 

* 샘터 간 한아이를 읽고 2008년도에 쓴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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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우리 아이들은 대학에만 가면 바보가 될까? - 두 아이 외고 보낸 조기숙교수가 참다 못해 제안하는 입시지옥탈출 솔루션
조기숙 지음 / 지식공작소 / 200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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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우리 아이들은 대학에만 가면 바보가 될까?를 읽고







1. 골품제

  요즈음 가장 인기 있는 드라마인 ‘선덕여왕’ 40회 마지막과 41회 시작은 화백회의에서 덕만공주가 국본이 되는 것으로 갑론을박을 벌이던 중에 김춘추의 “골품제는 천박하고 야만적인 제도”라는 선언으로 시작한다. 성골이 아니기에 왕이 될 자격조차 없었던 김춘추이고, 성골이지만 ‘여자’이기에 왕이 될 꿈도 꿀 수 없는 덕만 공주의 이야기가 그려지고 있었다.

  골품제, 참 많이 비슷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대학에만 가면 바보로 만들어 버리는 현재의 교육정책과 학벌주의 사회인 우리나라의 모습이 겹쳐졌다. 조기숙 교수가 쓴 ‘왜 우리 아이들은 대학에만 가면 바보가 될까?’(지식공작소, 2007년)에서 예리하게 우리 사회의 교육의 모습을 진단하였기에 드라마의 한 장면이 그대로 적용되었던 것 같다.

  책에서는 다양한 사례와 연구, 통계자료, 다른 전문가의 책을 인용하며 어느 누가 읽어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쓰여졌다. 또한 미국의 교육철학과 제도를 우리의 교육정책과 제도와 비교하여 장단점을 알 수 있었다.




2. 충성, 목소리 높이기, 탈출

  이 책에 있는 내용으로 해석을 하자면 골품제라는 학벌주의에 순응하고 그 안에서 권력을 차지하려고 했던 귀족세력들과 미실로 대표되는 특목고를 가서 명문대에 가려는 학생과 도움을 주는 학부모, 명문대 출신의 고위관료나 지식인, 기업인 등은 ‘충성’을 하는 것이고, 여자로서 왕이 되려는 꿈을 꾼 덕만공주는 ‘목소리 높이기’를 한 것이다. 물론 김춘추도 ‘목소리 높이기’를 한 것이다. 새로운 세력을 만들면서 목소리 높이기를 한 것이다. 덕만공주와 김춘추는 공부 외에도 다양한 재능이나 경험을 가진 학생이나 농촌, 서민 출신이라고 비유할 수 있을 것이다. 후대에 등장하는 최치원은 ‘탈출’을 했다가 다시 돌아와서 목소리 높이기를 한 경우일 것이다.




3. 죄수의 딜레마

  목소리 높이기는 쉽지 않다. 42회를 보면 세종과 설원의 무리들이 서로의 우두머리를 납치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어떻게 되지 않을까하는 불안이 원인이었다. 이 책에서 대학입시와 관련하여 우리 사회의 모습을 비유한 ‘죄수의 딜레마’가 생각난다. 그래서 목소리 높이기보다 충성을 택하는 대다수의 사람들의 모습이기도 하다.

  대안의 구체적인 모습은 저자도 말한 것처럼 부족해보인다. 그것과 관련해서도 할 말이 많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대안이 아무리 그럴듯하고 많아도 자신만 손해볼 것 같기에 감히 나서지 못한다.




4. 새로운 대안세력의 공동체

  그러나, 그런 사람들이 점점 많아진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선덕여왕에서도 새로운 세력을 만들고 그 세력의 힘을 의지하고 있지 않은가? 힘이 미약한 덕만공주와 김춘추의 세력이 힘을 합쳐서 대항을 하지 않는가?  저자의 이 책쓰기도 세로운 세력을 형성하려는 노력의 일환으로 보여진다. 초고를 다양한 독자들에게 보이고 질의응답을 하며 수정하며 완성한 책으로 소통을 통해 같이 목소리 높이기를 하자고 말하고 있는 것 같다.




5. 인상적인 작은 생각의 조각들과 간절함

  경험한 나라가 미국이어서 그렇겠지만 대부분 든 것이 미국의 경우뿐이라 아쉽지만, 저자가 언제나 바탕에 깔고 말하는 5.31 교육개혁안을 좀 더 살펴보아야겠다. 나도 오해하고 있는 부분이 있었던 것 같다. 단지 경쟁만 심화시키는 교육정책이라고 생각했다.

  언어 왜곡 또는 착시 현상이나 자신들의 이해관계로 바르게 보지 못하는 것은 보수주의자나 진보주의자나 다 같다고 보여진다. 그래서, 다섯가지 장애물과 10가지 오해를 설명하며 현재도 남아있는 골품제를 깨려고 한다. 가장 그럴듯한 것은 저자도 지적하듯이 ‘평준화’라는 말이 대표적이다. 여러 가지 통계자료는 평준화가 학력을 떨어뜨리지 않음을 보여준다. 권영길 의원의 올해 국정감사 자료1)도 그것을 말해준다. 미실과 귀족들처럼 기득권 지키기의 일환이다. 그렇다고 진보주의 교육론자들을 지지하는 것도 아니다. 진보주의자들의 착각은 제대로된 평준화를 이룬 북유럽의 나라들이 작은 나라 작은 수의 인구를 가지고 있다는 것과 세금 투입이 많다는 것 등을 고려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또 하나는 이 골품제(학벌주의)가 존재하는 한 어떻게 입시제도를 바꾸더라도 효과가 없고 공교육이 아무리 정상화 되어도 사교육은 왕성해질 것이라는 부분을 너무 쉽게 생각한 것 같다. 학벌주의 타파의 이유나 방법을 언급하고 있지만 표피적인 치료라는 생각이 들었다. 5.31 교육정책의 좌초도 학벌주의의 영향이기 때문이다. 물론 저자의 말대로 새로운 세력을 형성한다면 물론 깨질 수도 있다. 동의한다. 그러나 한 가지가 더 필요하다. ‘간절함’이다. 책의 처음에 이런 힘든 교육현실이 유지되는 것 중에 하나로 학부모들이 그들의 자녀가 대학에만 들어가면 교육이나 교육정책에 대한 관심이 줄어들거나 없어진다고 진단한다. 간절함이 사라지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면 새로운 대안세력 또는 공동체는 만들어질 수 없다.




6. 원대한 꿈

  그러나 이 두 사람(목숨을 걸고 새로운 신라를 만들고 복수하고자하는 간절함이 있는 덕만, 김춘추)2)으로 인해서 미실도 초라한 꿈을 버리고 새로운 원대한 꿈을 꾸게 된다. 그래서 목소리 높이기는 지금은 미약한 것 같지만 세력이 형성된다면 ‘죄수의 딜레마’로 인한 불안과 두려움을 가지고 현재의 제도(천박하고 야만적인 골품제-학벌주의) 안에서 꾸는 꿈인 초라한 꿈인 충성(왕후가 되는 것-명문대 입학, 대학에만 가면 바보가 되는 것)을 떨쳐버리고 원대한 꿈(왕, 삼국통일-베푸는 삶, 창의적인 사람)을 꾸게 될 것이다.

  성경도 말한다. 여호와는 온 땅을 두루 감찰하사 ‘전심으로’ 자기에게 향하는 자들을 위하여 능력을 베푸신다고 한다.3) 이 책은 혼자가 아닌 더 많은 사람들이 함께 이런 꿈을 꾸는데 동참하여 목소리를 높이자고 말하고 있는 것 같다. 같이 원대한 꿈을 꾸자 한다. 여기에 한 가지를 더 추가하자. 원대한 꿈(교육 안에서 아이들의 자유, 진리와 만나기 등)을 이룰 수 있도록 하는 에너지인 간절함과 아픔을 저에게 또한 우리에게 주시라고......

  


 

1) ‘학력향상도 평준화’ 지역이 더 높다, 한겨레, 2009.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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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10월 19일 선덕여왕 43회 미실과 춘추의 만남 장면에서 미실이 한 말(황족이라는 우월감으로 이 미실을 누르려했기 때문입니다. 이 미실을 누르는데 온몸과 온힘을 다하지 않았기 때문이에요. 그게 수 싸움의 실체입니다. 계략이 머리싸움이라고 착각하지마세요. 이 미실 일생을 황후가 되기위한 모략을 펼치며 온몸으로 온가슴을 온목숨을 던져왔습니다.




   그런제가 무섭거든 메달리고 복수를 해야겠거든 덕만공주처럼 목숨을 거세요

   저를 상대할수있는 법은 오로지 그 두가지뿐이에요. 목숨걸고 맞서거나 그냥 죽거나..) 참고 
 

 

3) 역대하 16:9 상반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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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움으로부터 도주하는 아이들 학력을 묻는다 1
사토 마나부 지음, 손우정 옮김 / 북코리아 / 200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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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제 : 언년이에게 쓰는 러브레터

지각

나의 사랑 언년아

  어제는 하루 종일 우울한 회색빛 하늘에서 비가 오더니 오늘은 조금씩 햇살이 비치며 밝은 하늘을 보여주는 것이 언년이도 보이니?

  어느 날인가 네가 학교에 온 모습이 보이지 않더구나. 그래서, 집에 전화를 했더니 숙제 내 준 것을 다 못해서 다 하고 몇 분전에 집에서 출발하였다고 하더구나. 숙제를 못해서 방과후에 남아 다 하는 것을 참 싫어한다는 생각이 들더구나. 엄밀히 말하면 수업시간에만 제대로 서로 배우기와 교과일기를 쓰는 등의 공책정리를 했으면 집에 가서 할 필요도 없었을 것이고, 아침에 공책 검사를 해서 못한 것을 집에 가기 전까지 다시 해서 검사받으라고 했기에 쉬는 시간과 점심시간을 조금만 내어서 쓴다면 숙제라고도 할 수 없는 것인데 왜 힘들어할까라는 생각도 들더구나. 그 때 떠오른 것이 그 전에 읽은 책과 시청한 방송이더구나.

 

진단

  사토 마나부 교사가 쓴 ‘배움으로부터 도주하는 아이들’이라는 책을 너는 알고 있니? 136쪽 밖에 되지 않는 작고 얇은 책이지만, 일본 사회와 좀더 넓혀서 우리나라를 포함한 동아시아 사회와 교육을 배경으로 왜 아이들이 배움을 싫어하고 도망갈까에 대한 오랜 고민과 연구가 담긴 책이더구나. 이 책에서는 언년이처럼 배움을 싫어하는 이유를 니힐리즘(허무주의)과 시니즘(냉소주의)이 아이들에개 팽배해있기 때문이라고 진단하고 있단다. 니힐리즘은 “무엇을 배워도 소용없다”, “무엇을 배우든 인생은 어차피 변하지 않으며 사회는 바뀌지 않는다”라는 생각을 가지는 것이고, 시디즘은 “일편단심 공부에 매달리는 일은 바보 같은 짓”, “배우는 것의 의미를 모르겠다”, “나는 바보라서 배워도 모른다”, “어떤 내용의 지식과 문화도 나와는 상관없다”, “세상이야 어찌 되었던 내가 알 바 아니다”라는 식의 가치관이 배어있는 것이라고 하더구나.

  일리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단다. 그러니 이 책이 기억이 났겠지? 원대한 꿈을 갖기를 원하지만 상급학교로 올라갈수록 그 꿈의 크기가 작아지는 언년이의 모습을 지켜보면서, 아예 무엇이 되며 어떤 일을 하며 살지 모르겠다고 말하는 것이 이해가 되고 나의 가슴을 아프게 한단다. 그렇게 꿈이 없는 언년이와 함께 생활하며 네 모습을 보아왔고 지금도 보고 있기에 나도 더욱 힘들구나. 더 나아가 초등학생이지만 성적 비관으로 자신의 생명으로부터까지 도망가는 저 멀리 떨이진 지역에 살았던 네 친구 언년이를 방송으로 보며 눈물까지 나더구나.

  작년 연말에 EBS에서 방송했던 다큐프라임 “삼동초등학교 180일의 기록”이라는 저기 남해에 있는 네 친구들의 모습을 보고, 그 친구들을 돕기 위해서 현재의 모습을 찍어 온 방송팀의 동영상을 보며, 교수님과 전문가들이 보였던 얼굴 표정과 말들처럼 나도 충격을 받았단다. 더 사토 마나부 교수의 진단이 맞다는 생각이 들더구나. 목가적이고 낭만적이며 꿈을 품고 힘차고 생명력이 넘치게 사는 모습을 기대하며 방송을 시청했는데 수업시간에 딴짓하거나 엎드려 자고, 선생님의 훈계에 눈을 똑바로 처다보며 말대답을 하는 모습, 여기에 성취도평가 결과는 낮았던 모습이란다.

  언년아, 이렇게 너와 친구들이 변해가는 이유를 좀더 구체적으로 설명하면 급격한 산업화와 경쟁원리가 팽배해지기에 경제적인 부익부 빈익빈으로 가정이 붕괴되어 문화 자본이 빈약한 가정이 늘어가고 있기 때문이라고 사토 마나부 교수는 말하더구나. 우리 나라 식으로 쉽게 말하면 ‘개천에서 용나기’ 힘들어지는 사회구조가 점점 되어간다는구나. 급격한 산업화와 경쟁원리로 교육의 공공성이 성숙할 틈이 없었고, 민주주의도 불완전하기에 문화적으로도 다른 나라에 식민지화되어 가는 모습이 많기 때문이란다. 그래서 언년이가 생활하는 가정이나 학교, 사회에서 체험하게 되는 것은 6, 70년대와 달리 현재는 실패와 좌절 밖에 없기에 허무주의와 냉소주의에 빠질 수밖에 없다고 하더구나.

  삼동초등학교의 네 친구들도 그렇더구나. 부모가 없이 할머니와 사는 아이, 아버지와만 살아서 아침을 챙겨 먹고 나올 수 없는 아이, 경제적으로 어려워서 부모님이 맛벌이하기에 공부하는 것을 봐줄 수 없는 아이 등 다양한 모습의 아이가 있더구나. 물론 꿈도 없는 아이도 많았단다.




만남과 대화

  언년아, 그럼 이런 허무주의와 냉소주의를 어떻게 하면 깨뜨리고 배움을 향해 나아갈까? 사토 마나부 교수는 공부가 아닌 배움으로 패러다임의 전환을 해야 한다고 하더구나. 신식민주의 이데올로기에 존재하는 특이한 ‘이항대립의 개념구도’에 속박된 사고를 하기에 ‘가르치는 것과 배우는 것’, ‘교사중심과 아동중심의 수업관’, ‘남자와 여자’, ‘지식․기능교육과 ’관심․의욕․태도교육‘, ’교사와 학생‘ 등의 속박된 전형적 사고를 한다는구나.

  일본말 ‘공부’라는 말에는 원래 학습이라는 의미가 없다는구나. ‘무리하는 일’이라는 뜻이 있고, 경제적이고 상업적인 개념에서 어원이 시작되었단다. 학습의 의미가 포함되기 시작한 것은 메이지 20년대 이후일 것이라고 한단다. 공부로부터 배움으로 전환되지 않으면 계속 배우는 의미를 잃고 허무주의와 냉소주의에 빠져 친구를 잃고, 배움을 뒷받침해주는 교사를 잃고, 나아가서는 자기 자신까지 잃게 된다는구나.

  그렇다면 ‘배움’은 무엇일까? 배움은 공부와 달리 ‘만남과 대화’가 있는 것이란다. 공부가 무엇과도 만나지 않고 아무런 대화도 없이 수행되는 것에 비해, ‘배움’은 사물이나 사람이나 사항과 만나고 대화하는 행위이며, 타자와 사고나 감정과 만나고 대화하는 행위이고, 자기 자신과 만나고 대화하는 행위란다. 즉 ‘사람이나 사물’, 일과 만남과 대화에 의한 활동적인 배움과 ‘타자와의 대화’를 통한 협동적인 배움을 추구하고 실현하는 것이란다. 예금개념 또는 전달의 공부개념으로부터 ‘만남과 대화’의 개념으로 전환시키는 것이란다.

  삼동초등학교 네 친구들도 아키타 현의 친구들이 서로 배우기(예를 들어 쉽게 설명하면 서당형 교육)와 교과일기, 복습공책 등으로 교사를 만나고, 친구를 만나고, 진리와 만나고 자기 자신까지 만나서 대화(특히 교과일기)하며 배움을 찾아 달려가는 것처럼 다양한 만남을 갖고 배움을 사랑하게 되더구나. 미래의 희망을 꽃 피우고 열매 맺을 수 있다는 꿈을 갖게 되더구나. 네 친구들뿐만 아니라 밤늦게까지 네 친구들과 함께하며 선생님들도 배움이 일어나는 모습을 화면으로 보았단다.







사랑의 도움

  나의 사랑 언년아, 네가 태하와 다시 사랑에 빠지고 함께 달려가는 그 길을 무사히 잘 갈 수 있도록 도와주고 싶구나. 사토 마나부 교수도 ‘배울 학(學)’자를 설명하면서 아이들의 만남에 노심하는 교사(어른)가 없는 곳에서는 배움이 성립하지 않는다고 한단다. 삼동초등학교 네 친구들도 이른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함께 하는 선생님들과 서울로 현장체험을 가서 꿈을 키울 수 있도록 한 주위 어른들의 도움으로 수업 시간에 배움의 열정으로 열심히 달려가고 있는 달라진 모습을 보고 언년이도 그렇게 될 수 있기를 소망하는 마음이 내게도 생겼단다.

  그래서, 우리 학급에서도 각 교과공책을 쓰고, 복습 공책을 적고, 서로 배우기를 하고 학습 도우미 제도를 활용하는 것인데, 새학기를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아 많이 힘든가보구나. 처음이라서 그럴 거야. 그래도 우리 함께 그 길을 달려가자꾸나. 도주가 아닌 공부에서 배움으로 옮기고 변화시키고 넓히는 ‘추학’을 우리 함께 해보자꾸나. 이렇게 우리 서로 대화하며 서로를 이해하고 함께 배움의 길로 달려가자꾸나. 더욱 우리 서로를 사랑하고 배움을 사랑하게 되면 힘이 들지 않겠지? 아니 힘이 들어도 능히 이겨낼 수 있겠지?

  힘내렴. 나의 사랑 언년아!

  비 오던 우울한 하늘이 개이고 햇빛이 비취는 것처럼 허무주의와 냉소주의로 가득한 언년이가 조금씩 변해가며 미래의 꿈과 희망이 더 밝게 빛나도록 하는 또 다른 더 넓고 깊은 만남과 대화를 기대하며......




2010년 4월 2일




  언년이만을 사랑하여 언년이만을 바라보고 찾고 싶고 만나서 대화하며 함께 배움의 길을 달려가고픈 대길이가




추신) 언년아, 이 편지를 쓰는데 만남과 대화를 통해 배움을 얻고 도움을 받은 자료들이란다.1)




- 배움으로부터 도주하는 아이들, 사토 마나부/손우정, 북코리아, 2005

- 삼동초등학교 180일의 기록 1부 : 아키타에서 배우다, EBS, 2009

- 삼동초등학교 180일의 기록 2부 : 기적의 조건, EBS, 2009

- 삼동초등학교 180일의 기록 3부 : 내일을 품은 아이들, EBS, 2009







1) 초등교사로 교단에 서며 있었던 일화에 읽고 보았던 책과 방송, 드라마를 버무려 편지글 형식의 수필로 써 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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