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예슬 선언 - 오늘 나는 대학을 그만둔다, 아니 거부한다
김예슬 지음 / 느린걸음 / 201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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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나는 대학을 그만둔다, 아니 거부한다’를 읽고)  

 


에피소드

  얼마 전 내게 맡겨진 우리 학급 아이들에게 나답지 않게 긴 시간동안 잔소리를 했다. 학급 소품인 모래시계를 깼기 때문이다. 시험 문제 출제 중이었기에 교사 책상 앞으로 지나다니지 말라고 한지 2시간도 지나지 않아 지나가다가 깬 것이다. 그 하나를 빌미로 왜 생각 없이 사냐고 했다. 질문하는 삶을 살라고 했다. 피리부는 사나이를 따라갔던 쥐떼나 아이들처럼 살지 말라고 했다. 그러면서도 이해가 되지 않았던 것이 왜 아이들은 생각을 하지 않을까? 듣지를 않을까? 하는 것이었다.




실마리

  그 이유를 이 책을 보며 조금은 알 것 같았다. 트랙을 달리고 있는 것이다. 그것도 일부만이 승리 또는 성공의 감격과 기쁨을 누리는 끝없는 도는 트랙이다. 학습된 두려움이다. 다른 낱말로 비슷한 말을 한 사람이 있다. 사토 마나부 교수도 ‘배움으로부터 도주하는 아이들’이라는 책에서 ‘허무주의’와 ‘냉소주의’가 아이들에게 팽배해있다고 한다. 아이들은 안다는 것이다. 무한 경쟁에서 성공하는 사람은 얼마되지 않기에 많은 아이들은 배움으로부터 도주한다는 것이다. 조기숙 교수도 ‘왜 우리 아이들은 대학에만 가면 바보가 될까?’에서 ‘죄수의 딜레마’ 이론을 소개하며 불안한 심리 때문이라고 하고 있다. 김예슬씨의 말로 하자면 혼자만의 두려움이나 공포가 아닌 집단적 공포이기도 하다.

  종합하면, 살아남기 위해서는 질문할 여유조차 없는 것이다. 그냥 따라가는 것이다. 그것도 숨이 차고 지치는 것이다. 생각하고 질문하면 두려움과 불안에 사로잡히게 되니까 회피하게 되는 것이다. 질문하기도 인간다운 삶도 포기하는 것이다.

  자기주도적 학습을 강조하는 시대이지만 더 학원 의존적이 되고, 부모 의존적이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을 것이다. ‘초대딩’과 연애하는 방법까지 강의하는 학원이 등장하는 이유일 것이다. 그러니 인생에 대해서 삶에 대해서 질문하거나 꿈을 꾸는 것은 사치일 것이다.




분노와 눈물

  질문할 수 있는 사람만이 잘못되어 가는 것들에 대해서 분노할 수 있다. 김예슬씨는 사람다운 삶, 꿈을 꿀 수 없는 삶에 대해 분노하고 있고,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자기 자신에 대해서 주위에 있는 사람들, 세계에 있는 약자들을 힘들게 만들고 현실을 왜곡하며 팍팍한 삶을 살게 만드는 구조악에 대해 분노하고 그 아래 고통하는 사람들을 위해 눈물을 흘릴 줄 아는 사람이다.

  무심히 지나치는 것들, 보다 근본적이고 근원적인 문제들에 대해서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는 살아있는 사람이다. 살아있기에 분노하고 눈물을 흘릴 수 있다. 시체는 질문도 분노도 눈물도 없다.

  한 만남이 자신의 심장을 찔렀다고 한다. 유명하지도 않은 한 시인의 강의에서 몇 마디의 말 “그대는 진리를 알려고 하는가, 진리를 살려고 하는가. 그대는 길를 찾으려고 하는가, 길을 걸으려고 하는가. 그대는 사랑을 배우려고 하는가, 사랑을 하려고 하는가.”라는 말이었다고 한다. 삶으로 산다는 것은 살아있어야 가능하다.




몸부림

  살아있는 사람만이 끌려가지 않으려고 몸부림을 친다. 김예슬씨의 경우 대학을 거부하는 몸부림으로 나타난 것이다. 살아있는 사람답게, 동물과 다른 생각하는 사람처럼 살려는 몸부림을 치는 것이다. 자격증과 학벌에 묶인 경쟁사회의 거센 물결에 저항하는 몸부림을 치는 것이다. 글로벌 카스트 계급을 깨뜨리고 거슬러서 올라가려는 것이다. 트랙을 도는 오염된 꿈이나 주어진 꿈이 아닌 초원을 내달리는 야생마의 꿈을 꿀 수 있는 것이다.

  또 혼자 꿈꾸기에는 너무 힘들기에 공동체적으로 몸부림을 치자고, 몸부림을 치는 꿈을 꾸자고 한다. 사람마다 자기 나름의 재능이나 관심사를 가지고 장인성과 인간됨으로 존경받으며 살아갈 수 있는 자급자립 기반의 공동체를 만들어서 서로 돕고 나누자고 한다. 현재의 자격증 또는 학벌 구조나 제도로는 자신이 자격증을 따고 도달한 위치에 오르기까지의 본전 생각 때문에 인간답게 살 수 없다고 한다.




매몰

  많은 고민과 본질을 꿰뚫는 멋진 질문과 고민에 가득한 책이고 책의 디자인도 책의 내용처럼 심플하고 단순하며 투박하여 인간적인 냄새가 나지만, 학교와 자격증이 존재하기에 사교육비를 줄이는 것이 모순이라고 말하는 부분은 동의할 수 없다. 인간의 욕망이라는 부분을 간과한 것 같다. 서구나 북유럽의 살기 좋다고 하는 국가들이 학교가 없어서 그런 교육이나 삶이 가능한 것이 아니지 않은가? 그들은 학교가 있어도 자격증이나 학벌에 목매달지 않는다. 요즈음 가장 많이 인용되는 핀란드가 대표적이다. 경쟁이 아닌 상생과 협력의 학교 문화가 있다. 그래서 피사의 학력 테스트에서 우리 나라의 경우 지적인 부분은 상위권이지만 정서적인 부분에서는 하위권이다. 핀란드는 우리 나라와 달리 심리적인 부분에서도 훌륭하다는 평가를 받았다는 것을 김예슬씨가 모르지는 않을 것 같은데...... 너무 우리 나라의 현실과 맥락에 매몰되어 잘못 판단한 것 같다.

  자격증이나 학교가 없다고 해도 다른 것을 통해서 사람은 자신의 욕망을 해결할 것이다. 높아지고 굴림하고 자랑하려고 할 것이다. 인간의 본질이 변하지 않는 한 외적인 것이 사라진다고 이 고통이 해결되지는 않을 것이라고 본다.




나의 질문

  그렇다면 나는 어떠한 질문을 하며 지금의 위치(교사)에 있는 것일까? 정말 아이들의 아픔을 감싸주며 함께 분노하고 눈물 흘리며 초원을 달리는 꿈을 꾸게 해주고 싶은 꿈이 있었다. 그런데, 한 해 두해 경력이 쌓이며 이런 열정이 식고 꿈이 사그라지는 것을 본다.

  배움이란 무엇인가? 교사란 어떤 존재인가? 교육이란 무엇인가? 아이들은 어떤 존재인가? 등등, 끊임없이 질문하며 나아가던 삶에서 전면적인 교원평가가 시작되고 일제고사가 확대되어 더 경쟁체제가 되어 가는 교육의 현실에서 질문을 잃어가고 몸부림을 치지 않고 서서히 매몰되어가는 나의 모습이 비추어졌다. 나는 질문이 줄어가면서 학습된 불안과 공포, 허무주의, 냉소주의에 집단으로 빠져들어가는 아이들을 이해하고 감싸기보다 질문하지 않는다고 화만 내고 있었고, 나의 자격증과 학벌을 자랑하는 잘난 체를 하고 있었다. 삶으로 진리를 살지 못하고 있었다. 길을 걷지 않고 있었다. 사랑하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먼저 다시 묻기부터 시작해야겠다. 그래서 이런 현실에 분노하고 힘이 없기에 울기부터 해야겠다. 나도 돌멩이(조기숙 교수의 말을 빌리자면 ‘목소리 높이기’이다)를 던지는 몸부림에 동참하고 더 많은 사람들과 함께 거대한 골리앗을 향해 살아있음을 알리고 저항하는 것을 다시 시작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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