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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런거리는 유산들
리디아 플렘 지음, 신성림 옮김 / 펜타그램 / 2012년 5월
평점 :
죽음은 누구에게나 찾아오고, 늘 우리 곁에 있는데도 우리는 언제나 나와는 상관없는 남의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 죽음이 나의 사랑하는 가족과 연결됐을 때 죽음은 고통과 슬픔, 분노, 뒤엉킴, 망연자실 같은 감정의 형태로 실체를 드러내게 된다.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면서 누구나 쉽게 겪는 죽음은 부모의 죽음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책은 벨기에 출신으로 정신분석학자이자 작가인 저자 리디아플렘이 부모를 사별한 뒤에 애도 경험을 바탕으로 쓴 심리 에세이이다. 저자는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지 2년 만에 어머니도 세상을 떠났다. 어머니의 장례를 모두 치르고 부모님이 살던 집을 ‘비우는’ 일을 맡을 사람은 그 집의 외동딸인 리디아뿐이다. 집을 비운다는 것은 부모님의 손때가 묻어 있고 세 사람의 추억이 굽이굽이 서린 물건들, 침대, 옷장, 탁자, 소파에서부터 냄비, 커피포트, 돋보기, 호두 까는 기구, 화면이 안 나오는 텔레비전, 납세고지서, 통장, 750통의 연애편지 등등 소소한 것들까지 법에 의해 상속받는다. 그러나 플렘은 부모가 생전에 자신에게 그것들을 사용하거나 처분할 권리를 주지 않았다는 사실을 떠올린다.
호스피스 운동가이며 의사엿던 엘리자베스 큐블러 로스에 따르면 죽는 이들은 다섯 단계-부정, 분노, 타협, 우울, 수용-를 거쳐 죽음을 받아들인다고 한다. 부모의 죽음을 지켜보는 이들도, 죽는 이들과 마찬가지로 여러 감정을 겪으며 죽음을 받아들이게 된다.
이 책은 오랜 세월 부모의 숨결이 녹아있는 부모의 물건들, 곧 부모에게서 물려받은 ‘유산들’과 나눈 기나긴 대화, 고독한 수다의 기록으로 읽는 이들에게 가슴 뭉클한 감동을 준다.
플랜은 “자신의 추억과 헤어지는 일, 그것은 버리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일부를 잘라 내는 일이다.”고 하면서 “땅속에 묻기보다는 불태우는 의식 치르기. 더 불우한 이들에게 주기. 친구들에게 선물하기. 기념품으로 서랍 깊숙이 넣어 두기.… 그냥 주는 게 좋았고, 그에 뒤따르는 작은 빈자리가 좋았다. 그들은 물건을 가득 싣고 행복하게 떠났다. 나는 가벼워졌다.”고 말한다.
‘
물려받은 연애편지’에는 저자의 부모가 1946년 9월 말부터 1949년 12월 1일 결혼할 때까지 주고받은 편지와 지은이의 회상을 통해 그들의 삶을 아름답게 재구성했다. 강제 이주와 전쟁, 참혹한 강제 노동, 굶주림과 모욕과 학대를 이겨내고 살아남은 두 젊은 유대인은 굳건한 사랑으로 힘든 고통과 치명적인 질병을 이겨낸다. 그들의 사랑이 너무나 아름답다.
저자의 부모가 나치 독일하에서의 처참한 고난 속에서 피워낸 사랑은 그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감동적인 이야기다. 또한 역사의 수레바퀴에 깔려 신음했던 수많은 익명의 사람들과 그들의 자녀에게 되물림된 상처는 유대인들 못지않게 6.25와 5.18이라는 현대사를 살아온 우리 부모와 할머니, 할아버지의 삶을 떠올리게 한다.
이 책을 통해 자식을 위해서 모든 것을 아낌없이 주시고 희생하신 부모님을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되었다. 우리에게 남겨주신 부모님의 유산은 ‘재산’이 아니라 부모님의 ‘삶’자체라고 할 수 있다. 그 어떤 것보다 고귀한 정신적인 유산이야말로 우리들에게 가장 가치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