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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면하는 벽
조정래 지음 / 해냄 / 2012년 4월
평점 :
우리나라에 많은 작가가 있지만 그 중에 내가 제일 좋아하는 작가는 조정래이다. 그의 작품을 볼 때마다 느끼는 것은 장대한 스케일, 빼어난 인물 창조, 긴장감 넘치는 극적 구성이 빚어내는 감동과 재미는 그 어느 작품에서도 맛보지 못한 소설의 진수를 보여준다고 할 것이다. 조정래 작가가 쓴 <태백산맥>과 <아리랑>은 한국문학사에 대하소설의 전통을 확고하게 다지며 풍부한 문학적 자양분을 심어준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다.
내가 밤을 새워가면서 읽었던 <아리랑>은 일제 침략에서부터 해방하기까지 한민족의 끈질긴 생존과 투쟁, 이민사를 다룬 민족의 대서사시라고 할 수 있다. 군산과 김제를 비롯하여 일본·만주·중앙아시아·하와이에 이르는 민족이동의 길고긴 발자취를 따라가며, 일제 수탈기 소작농과 머슴, 아나키스트 지식인의 처절한 삶과 투쟁은 나의 가슴에 그대로 전해져 왔다.
나는 대한민국의 국민은 누구나 할 것 없이 조정래의 <아리랑>, <태백산맥>, <한강>은 꼭 읽어야 할 책이라고 생각한다. 만약 이 책을 읽지 않고는 대한민국의 국민이라고 말한다면 부끄러운 줄 알아야 한다. 우리 근현대사에 대해 바른 판단을 가지게 하며, 그 시대의 아픔을 돌아보면서 우리 역사에 대한 올바른 비판과 반성의 기회를 제공해 주는 소설이기 때문이다.
이 책은 1977년부터 1979년까지 조정래 작가가 문예지에 발표한 8개 작품을 모아 수록한 것으로, 1999년 ‘조정래 문학전집’(전9권)의 여섯 번째 책인 <마술의 손>으로 출간된 것을 다시 개정판으로 낸 것이다. 조정래 작가는 1970년에 등단해 올해로 집필 42년째를 맞는다. 작가가 청년시절의 문제의식과 고뇌를 보여주는 이 작품집에서 작가는 급속한 근대화가 빚어낸 소통의 단절과 각박한 사회상, 전쟁이 남긴 혼혈의 아픔들을 그의 사상에 그대로 집약시켜 놓았다.
이 책에는 총 8개의 단편들이 수록되어 있는데, ‘비둘기’에서는 사상범으로 붙들려 해도 들지 않는 암벽 감옥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았던 자의 절망을 다룬다. ‘우리들의 흔적’에서는 직장 동료인 미스 김의 자살을 통해 자본주의가 빚어낸 소통 단절의 상황을 조명한다. ‘진화론’에서는 소매치기 생활을 하다가 소년원 체험을 하고, 어린 소년이 겪을 수 있는 온갖 고통을 겪는 동호의 이야기를 다룬다. ‘한, 그 그늘의 자리’에서는 같은 고아원에서 자란 원생이었지만 의사가 된 태섭과 유부남의 아이를 밴 채 희망도 없이 살고 있는 경희를 대조적으로 그리고 있다.
‘
마술의 손’에서는 자본주의적 근대화가 농촌 공동체를 붕괴시키는 과정을 다룬다. ‘외면하는 벽’에서는 근대화가 초래한 의사소통의 단절과 공동체적 전통의 붕괴를 그리고 있다. ‘미운 오리 새끼’에서는 이 땅에서 태어났는데도 한 번도 사람으로서 대접을 받아보지 못한 혼혈아들의 고민과 갈등을 다룬다. ‘두 개의 얼굴’에서는 자본주의와 국가 권력의 유착 관계를 시골 마을에서 벌어지는 귀신 소동에 빗대 비꼬고 있다.
오랜 세월 작가가 고심했던 시대적 가치가 지금도 우리의 가슴속에 파고드는 이유는 우리시대 사회 발전과 연관되어 있는 문제들이기 때문이다. 이 책은 우리의 자화상을 되돌아보기 위해서라도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꼭 읽어봐야 할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