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익은 타인들의 도시
최인호 지음 / 여백(여백미디어) / 2011년 5월
평점 :
절판


1985년 ‘잃어버린 왕국’을 시작으로 역사와 종교를 다룬 장편소설에 치중해왔던 최인호작가는 2006년 ‘제4의 제국’ 이후 자신의 본령인 현대소설과 단편으로 복귀하기 위해 절치부심하던 중에 2008년 5월 침샘암이 발병하여 불행이 찾아와 수술과 항암치료를 받으며 홀로 3년 동안 암과 투병 중이었다. 이는 그의 작품을 기다려온 독자들은 물론 작가 본인에게도 엄청난 고통과 좌절을 안겼다.

이 책 ‘낯익은 타인들의 도시’는 영원한 청년작가 최인호가 5년 만에 내놓은 신작 장편소설이다. 작가는 이 소설을 통해 ‘잃어버린 왕국’, ‘제4의 제국’ 등 지난 30여 년 동안 몰두했던 역사·종교소설 스타일을 과감히 버리고 ‘최인호’라는 이름 석자를 세상에 알린 현대소설로의 회귀를 선언했다.

백제와 가야, 조선을 넘나들던 작가의 상상력은 다시 현대로 돌아와 뒤틀리고 붕괴된 일상 속에 내몰린 주인공 K의 ‘영원한 사흘’이 상징하는 질서와 무질서가 뒤섞인 혼돈의 시공간을 창조해냈다.

그는 “내가 아직 살아있다는 사실을 나 스스로에게 증명하고 싶었다”면서 “백기 투항한 3년 동안 몸은 고통스러웠으나 열정은 전에 없이 불타올라 두 달 동안 줄곧 하루하루가 ‘고통의 축제’였다고 한다.

이 소설은 작가에게 몇 가지 의미를 가진다. 첫 번째는 청탁으로 쓴 연재소설이 아니라 자발적으로 쓴 최초의 전작소설이다. 두 번째로 이 소설은 오래전부터 꿈꾸어왔던 체질 개선 후의 첫 작품이다.

이 소설은 주인공 K가 일상적이지만 무엇인가 균열이 생긴 듯 어느날 일상에서 그 원인을 찾기 위해 또 다른 자신을 찾아 사흘 동안 방황하는 과정을 그렸다. 사흘간의 시간을 통해 사회가 자신에게 내린 배역과 역할에 충실하기 위해서 정작 자신을 잃어버리고 살아가는 현대인의 모순을 그렸다. 또한 자신이 믿고 있던 실재에 배신당하며 방황하는 K의 모습은 현대인이 맺은 수만은 관계의 부조리함을 지적하고 있다. 이 작품은 특이한 구조와 그로테스크한 작중인물의 설정, 환상주의와 사실주의를 넘나드는 이야기 전개만큼이나 다층적인 해석이 가능하다. 때문에 빠르게 읽히면서도 한편으로는 흥미로운 전개로 강한 여운을 남기고 있다.

작가는 “하느님께서 남은 인생을 더 허락해주신다면 나는 1987년 가톨릭에 귀의한 이후의 ‘제2기의 문학’에서 ‘제3기의 문학’으로, 이 작품을 시작으로 다시 출발하려 한다. 남에게 읽히기 위한 문학이 아닌 오직 나만을 위한, 나중에는 단 하나의 독자인 나마저도 사라져버리는 본지풍광(本地風光)과 본래면목(本來面目)의 창세기를 향해서 당당하고 씩씩하게 나아갈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나를 나의 십자가인 원고지 위에 못 박고 스러지게 할 것임을 나는 굳게 믿는다.”고 고백한다.

나는 오랜만에 최인호 작가의 소설을 읽으며 멀리 객지에 나갔다가 고향의 어머니의 품에 안긴 것처럼 행복감을 느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