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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닥꼬닥 걸어가는 이 길처럼 - 길 내는 여자 서명숙의 올레 스피릿
서명숙 지음 / 북하우스 / 2010년 8월
평점 :
유럽의 산티아고 길이 우리나라에서도 조금씩 인기를 얻어가면서 이에 대한 책들이 많이 나오고 있고, 직접 유럽 여행을 하면서 산티아고 길을 걷는 사람들도 많이 있다.
언론인 출신인 저자는 나이 쉰에 이십년 이상을 했던 기자생활을 청산하고 유럽의 산티아고 순례 길에 홀로 나섰다. 애초에 뜻을 정하고 시작한 길은 아니었지만, 순례 코스를 걷던 도중 저자는 문득 고향 제주를 떠올렸다. 제주가 관광지로는 유명해도 도보 여행 코스가 될 수 있으리라고는 누구도 생각하지 않았던 때였다. 저자는 온전히 걷는 사람들을 위한 길, 걷고 싶은 만큼 걸을 수 있는 아름다운 제주의 풍경을 알리고자 끊어진 길을 찾아내고 잊힌 길을 되찾고 사라진 길을 불러내면서 한코스 한코스 ‘제주 올레’길을 실현 시켰다고 한다. 올레는 집 대문에서 마을 길까지 이어지는 좁은 골목을 뜻하는 제주 말이다. 저자가 제주 올레를 구상하면서부터 만났던 사람들과 그동안 부닥친 어려움, 실제 느꼈던 보람과 단상을 책으로 묶은 것이 <꼬닥 꼬닥 걸어가는 이 길처럼>이다.
이 책에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가득하다. 난생 처음 걸어본다며 꽃처럼 웃는 류머티스관절염 환자, 죽으려고 왔다가 올레길을 걷고 다시 살고 싶어졌다고 말하는 암환자, 이별여행을 왔다가 다시 단단하게 결합한 커플 등 올레길을 통해 치유되고 새로운 삶을 얻은 사람들이 만나고 소통한 이야기를 담았다. 대부분 서 이사장이 함께 길을 걸으며 들은 마음속 깊은 애정과 수다가 듬뿍 버무려진 너무나도 맛깔 나는 이야기들이다. 스스로를 제주의 ‘올레꾼’이라고 칭하고 많은 사람들을 올레꾼으로 변신시킨 그녀의 희망이 기록된 이 책은 올레길을 가기 전에 제주를 미리 한번 돌아보는 여유를 가져다 줄 것이다.
‘재기재기 와리지 말랑! 꼬닥꼬닥 걸으라게’ 제주 사투리로 ‘빨리빨리 서둘지 말고 천천히 걸어라’라는 표현이다. 이 책의 내용처럼 재기재기 와라지 살지 말고 제주의 풍경을 언젠가 가슴에 담아보는 상상을 해보는 것도 행복한 일이다.
재일교포 할머니는 자식 다섯을 다 결혼시키고서 이 길을 걸으며 '인생 2막'을 설계했다. 자궁암으로 수술 받은 29세 서울 처녀는 죽을 결심으로 제주도를 찾았다가 "살아서 아름다운 바다를 더 보고 싶다"는 희망을 넌지시 품었다. 올레 길을 걷는 사람을 '올레꾼', 텔레비전 기상 뉴스에서 동네보다 서귀포 날씨부터 살피는 증상을 '올레 중독', 제주에서 머문 기간이 매년 100일에 육박하는 사람을 '올레 폐인'으로 부를 정도로 다양한 신조어가 생겼다.
게으름뱅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는 제주말인 '간세다리'처럼 되도록 하루에 한 코스씩 걷고, 시집 읽기나 엽서 보내기처럼 그동안 꿈꾸면서도 미처 해보지 못했던 일을 시도하며, 제주어 몇 마디를 미리 배워두고 지역 주민들과 환한 미소로 소통을 나누라고 저자는 조언한다.
예전 제주 할망들은 서둘러 달려오다가 넘어지는 손자들에게 이렇게 말하곤 했다. “재기재기 와리지 말앙 꼬닥꼬닥 걸으라게(빨리빨리 서둘지 말고 천천히 걸어라). 대한민국은 너무도 속도가 빠른 나라다. 성적도, 승진도, 집을 넓혀가는 일도, 운동도, 걷기에서도 남보다 빠르기를 원한다. 빨리 가려다 보니 자빠지기도 하고 쓰러지기도 한다. 이 책은 그런 사람들에게 “저 옛날 제주 할망들의 지혜를, ‘꼬닥꼬닥 걸으라게.’ 걷는 길만이 아니라 인생길에서도 마찬가지”라고 들려준다.